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강해(22) 교리적 교훈 - 그리스도의 재림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20

"교리적 교훈 - 그리스도의 재림"
- 예수 재림과 부활①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석원태 원로목사


교회를 향한 교훈(살전 4:1-5:28)

 

Ⅰ. 실천적 성화생활-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12)


1. 개인적인 ‘도덕적 성화생활’(살전 4:3-8), 곧 ‘거룩함’이다.
2. 형제 사랑에 더욱 힘쓰라고 하였다(살전 4:9-10).
3. 더욱 힘써야 할 노동생활이다(살전 4:11-12).

 

Ⅱ. 교리적 교훈 - 그리스도의 재림(살전 4:13-5:11)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영감의 편지는 이제 그 전체의 중심 부분에 와 있다. 사실상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 재림에 대한 서신이라고 할 만큼 장(章)마다 예수 재림에 대한 내용이 빠짐없이 언급되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에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도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로 5장 11절까지에는 더 구체적으로 예수 재림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 4장 13-18절은 예수 재림과 부활, 곧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에 대한 부활 소망을 언급하고, 5장 1-11절에는 재림의 시기에 관한 문제, 즉 그 대망의 준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1. 예수 재림과 부활(살전 4:13-18)

1) 자는 자들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하였다(살전 4:13).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울은 「자는 자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누구를 말함인가? 4장 14절에 나오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바울은 신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죽음에 대하여 바로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한 것은 ‘너희가 바로 알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신자들의 사관(死觀)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여기 ‘소망 없는 다른 이’란 곧 불신자들과 저들의 잘못된 죽음관(死觀)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 이면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죽음에 대한 잘못된 헬라적 사상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헬라적 철학사상은 육신의 죽음을 인간의 마지막으로 보고, 그 죽음을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비통해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헬라의 아이스킬루스(Aeschylus) 같은 자는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부활이란 없다.’고 하였다. 데오크리투스(Theocritus) 같은 자는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으나 죽은 사람에게는 희망 같은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카툴루스(Catullus) 같은 자는 ‘한 번 신앙의 빛이 꺼지면 우리에게는 잠만 자야 하는 무한의 밤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이교도들은 묘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지금 없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등의 기록을 남겼다. 또 어떤 비문에는 ‘촛불은 껐다가 다시 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은 한 번 꺼지면 다시 켜지 못한다.’라고 쓰기도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오, 사람이 한 번만 살 수 있고, 또 이렇게 짧게 산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이 생각만 하면 미친 사람처럼 되고, 나의 머리는 실망으로 소용돌이친다.’고 하였다. 카툴루스(Catullus)는 다시 ‘우리의 짧은 빛이 한 번 사라진 다음에도 졌던 해는 다시 올라오지마는 끊임없는 잠의 밤은 그냥 있더라.’고 하였다.
이러한 헬라적 인본주의 사상들은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죽음을 싫어하고, 욕하고, 멀리하려고 하고, 생각하기도 싫어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당시의 죽음에 대한 헬라적 사상과 생각들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두 가지로 요약하고 거기에 대해서 답했던 것이다.
그 첫 번째로 저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전 15:12)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약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고 하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죽은 자 곧 육체적 호흡이 멈춘 자들에 대하여 ‘자는 자들’(살전 4:13)이라고 표현하였다. 구약과 신약 여러 경우에서 ‘육체적 죽음’을 ‘잠잔다’고 묘사하였다.
야곱은 애굽 땅에서 17년을 거한 후 자기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창 47:30)고 하였다. 여기 ‘조상과 함께 눕거든’이라는 말은 ‘잠들면’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을 때에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고 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하셨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의 현장에서도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 9:24)라고 하셨다.
지금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에 대하여 믿지 않는 다른 이들처럼 슬퍼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 중 하나로 저들이 ‘자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육신이 죽은 자들의 영혼은 소멸되거나 활동이 중지된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살아 있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를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의 영혼이 다 살아서 의식적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저들은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살아서 깨어 있고, 의식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서 이 세상에 있는 형제 다섯을 기억하고, 저들만은 지옥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증거하게 해 줄 것을 아브라함에게 소원하고 있었다(눅 16:19-31).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한편 강도에게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하였다. 이는 영혼이 살아 있어 안식의 상태를 누리고 있음을 말함이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1-23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7장 15-17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 중에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하였다.
‘살아서 왕 노릇 한다’ 함은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의 영혼들을 가리켜 말함이다. 그러므로 ‘잠자는 자들’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죽은 자들의 영혼이 깨어서, 즉 살아서 의식하고, 판단하고, 즐거워하고, 활동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저들의 생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재림을 체험하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슬퍼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의 영감은 예수 재림과 함께 일어날 장래의 영광, 곧 부활진리를 새롭게 알려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처음 단계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맛보지 못하고 이미 그 육신이 죽은 자들을 가리켜 ‘자는 자들’이라고 함으로 신자의 죽음에 대해 새롭게 환기시키며 영혼은 죽지 아니하고 살아 있음에 집중을 시켜 주었다.
실제로 스데반 집사가 순교했을 때 성경은,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고 말하고 있다.
‘잔다’는 말은 ‘깨어난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그러니 부활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2) 부활 소망의 근거는 예수 부활이다(살전 4:14).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다.
‘예수 안에 자는 자들’이란 말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은 4장 13절의 ‘자는 자’와 같은 뜻이다. 이미 생각한 대로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은 불신자들처럼 죽음에 대하여 낙심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그 큰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첫 번째 이유는 예수 부활이 우리 부활을 성립시킨 보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다.
당시 헬라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고 믿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고전 15:12).
그러나 예수 안에 자는 자들은 예수의 역사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 그 예수의 부활이 성도 부활의 결정적인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4장 18-19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라이트풋(Lightfoot)은 ‘신자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잠드는 것 같은 복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어서 평화롭게 운명(죽음)하고 깨어날 소망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언제나 두 가지 부활 소망을 즐기고 살아간다.
첫째 부활은 영적 중생이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 5절에 의하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듭남 곧 중생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5장 24-25절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였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는 이 사실을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첫째 부활이다.
내세에서의 첫째 부활이 있다.
내세에서의 첫째 부활은 죽은 후에 영이 살아서(ζαω)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상태를 뜻한다(계 20:4-5).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부활은 마지막 부활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이 있다.
마지막 부활은 예수 재림과 함께 새로 받는 영화로운 부활의 몸, 불사(不死)의 몸을 받는 사건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예수 재림과 함께 일어날 최후 영화로운 상태이다. 그 부활의 몸을 가리켜 「영광의 몸」(빌 3:21)이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는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였다. 죽음 없이 살아서 주를 만날 자들은 다시 사는 마지막 부활 없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고 하였다.
문제의 초점은 ‘자는 자들’에 대하여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근거가 되고 우리 부활을 성립시키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2) 두 번째 이유는 예수의 재림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별세한 성도(자는 자)들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하였다. ‘데리고 오다’라는 말은 ‘인도하다’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예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로 인도될 것을 가리킨다.
멋진 말씀은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재림과 함께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 안에 잠자는 자들이 받을 최후 축복이다.
저들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된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롬 6:8),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고(롬 6:4), 함께 살리심을 받고(골 2:13, 엡 2:5), 함께 영광에 이르고(롬 8:17), 함께 후사가 되고(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인도를 받게 된다(살전 4:14).
기억해야 할 중요한 초점은 자는 자들을 슬퍼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근거가 되고, 예수 재림의 날에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의 나라로 인도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자는 자들에 대해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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