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곡
영화감독
영화감독
며칠 전 글 교정을 볼 게 있어서 고생을 했다. 하다 보니 신세계. 맞춤법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반(反)맞춤법적이었는데, 예컨대 ‘아무 것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쉬우시다고요? ‘지난 여름’이 아니라 ‘지난여름’. 그래도 쉽다고요? ‘할런지도’가 아니라 ‘할는지도’. 그래도 이러저러한 맞춤법 필터들이 있으므로, 천군만마. 문제는 천군만마로도 안 되는 놈들이었는데, 그게 바로 맞춤법 틀림과 또 다른 ‘오타’다.
오타는 맞춤법의 문제와 뿌리부터 다른 문제다. 아예 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법의 문제라고 우긴다면, 심지어 이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고 마는― 경범죄다. 차라리 오타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범절의 문제다. 맞춤법을 위반했으므로 맞춤법 틀림이 범죄라면, 그럴 의도도 의사도 없었는데 저질렀으므로 오타는 그저 실수다. 물론 범죄도 실수고, 맞춤법 틀림도 실수라고 반박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이 둘의 간극에 대해 변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분명 ‘아무것도’라고 썼습니다, 야호!). 같은 실수더라도, 맞춤법 틀림은 지식의 실수이고, 오타는 몸의 실수다. 지식의 실수는 넉넉히 용서되진 않지만(맞춤법을 틀리면 무식하다는, 최소한 맞춤법 개정 업데이트에 소홀했다는 핀잔을 면하기 힘들다), 오타는 내 손가락, 특히 팻 핑거(fat finger)의 실수로서, 심지어 넉넉히 용서되어 법의 필터들을 빠져나간다. 바로 이 미세함이 오타를 더 강력하게 만든다. 맞춤법 틀림이 죄라서 검거가 쉽다면, 오타는 죄도 아니고 단지 실수이기에 검거도 쉽지 않다.
오타를 우습게 보지 못할 더 강력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의미왜곡력이다. 맞춤법을 틀릴 때, 무식하다는 핀잔이 유도될지언정 의미전달까진 방해되진 않는다. 예컨대 ‘할런지도’라고 써도, 누구든 ‘할는지도’로 읽는다. 그러나 오타는 완전히 사정이 다르다. ‘불꽃놀이’를 ‘불국놀이’로 잘못 쓰고, 끝내 ‘불놀이’로 잘못 쓰는 동안, 의미는 ‘불국사에서 하는 놀이’인가? ‘불로 하는 놀이’인가? 같은 질문들로 점점 흐려져 끝내 왜곡되고 만다. 죄가 아닌 실수란 이유만으로 검거도 쉽지 않은 이놈이, 의미는 더 잘 왜곡하다니. 오타는 최종병기다. 맞춤법 틀림은 그래도 보이는 적이었다. 그것은 보병 1개 연대고, 탱크고, 폭격기다. 때려잡으면 되고, 격추시키면 된다. 하지만 오타는 쉽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건 지뢰와도 같다. 자간과 행간, 심지어 형태소 사이에 숨어서 점점 증식해 나가며, 저자의 레이더망을 피해 의미를 왜곡하고 끝내 정반대로 반전시킬 수도 있다. 차라리 오타는 바이러스다.
우리네 또한 생의 맞춤법도 많이 틀렸을 테지만, 또 얼마나 많은 오타를 길러봤을까. 사실 맞춤법 틀림보다 더 빈번히 놓았던 게 오타는 아니었을까. 그럴 의도도 의사도 없이 무심결에 뱉은 말이 누군가의 기억에 지뢰처럼 이식되었고, 누군가의 맘에 바이러스처럼 남았다면, 그래서 우리네 누구에게도 굳이 용서될 필요도 없는 만큼 쉽게 검거되지 않아서 지금껏 본의를 왜곡하고 있다면, 그 또한 생의 오타는 아니었을까.
이번 교정에서 내가 친 최고의 오타는, “삼켜도 삼키는 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를 “삼켜도 삼키는 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로 잘못 친 것이다. 이상야릇하게 반전된 저 의미. 게다가 내가 가장 깊이 새겨 온 문장이고, 또 가장 존경하는 철학가의 문장이라, 오타의 파급력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크다. 제발 지면에서만 그러기를. 생에서는 아니기를. 오타가 우리네 의미를 삼켜도, 과연 “삼켜도 삼키는 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