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7) 교회를 향한 감사와 간구의 근거 ②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35

"교회를 향한 감사와 간구의 근거② "
빌립보서 1장 6~8절
석원태 목사

2. 감사와 기도(빌 1:3-11)

1) 먼저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쁨의 감사이다.

2) 감사의 근거(빌 1:5-8)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감사와 간구의 근거와 내용을 말하고 있다.

(1) 시종이 여일하게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선한 일의 궁극적 성취 때문에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다.
이 본문이 강조하는 뜻 가운데 하나가 「시작」이란 말과 「이루신다」(완성)는 말이다. 그 가운데 「착한 일」이 나온다. 그 앞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나온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모두의 확신이 나온다.
지금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감사와 기도의 근거가 이제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장면이다. 사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있다고 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착한 일」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의 의도와 계획과 목적에 근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대 다른 신이라든가, 아니면 하나님과 다른 신들과의 합작이라든가, 아니면 세상 중에 어떤 고명한 유덕군자라든가, 또 아니면 그 유덕군자와 하나님의 합작이란 말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란 뜻이다. 유일무이하신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계획과 목적을 따라 빌립보 교회를 향한 착한 일이 시도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신 「착한 일」(a good work)이 무엇인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향하여 복음 안에서 물질(헌금)로 교제하게 하셨다는 뜻인가? 소극적으로 이런 의미가 내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분의 궁극적 의미에서 「착한 일」이란 죄인을 향한 풍성한 하나님의 긍휼의 최대 표현이요, 사건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가리켜 착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 「착한 일」(a good work)은 결코 어떤 윤리적, 도덕적 선행이나, 자선 등의 의미가 아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화육하시고,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완성(요 19:30)하시고, 죄인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시고, 하늘에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役事)를 말함이다. 앞에서 말한 ‘복음’의 사건, 복음의 역사를 말함이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구속 역사를 말함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행하신 「착한 일」이시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시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무이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하나님이 행하신 「착한 일」이다.
이제 그 착한 일은 ‘시작’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루실 날’이 있다고 했다. 그 착한 일은 시작과 성취(마침)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작’이라고 하는 ‘에나르게스타이’(enarchesthai)란 말과 이루신다(완성)는 ‘에피텔레인’(epitelein)은 당시 헬라 사회에서 저들의 희생식의 처음과 나중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종교 행위의 희생식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관계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한 처음(시작)이요, 마지막 완성(이루심)이시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시고(눅 2:10-11), 그로 하여금 속죄 제물이 되게 하사 인류의 사죄와 구원을 성립시키셨다(요 19:30).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그 구속사를 완성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예수 자신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곧 ‘주의 날’이라고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했다. 구약에도 「여호와의 날」(암 5:18-20)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은 ‘오실 이가 오시는 날’, 데살로니가후서 1장 10절에는 「그 날」, 빌립보서 1장 10절, 2장 16절에는 「그리스도의 날」,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인자의 날’, 고린도전서 5장 5절에는 「주의 날」, 고린도후서 1장 14절, 고린도전서 1장 8절에는 「주 예수의 날」,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날」, 요한복음 6장 39절에는 「마지막 날」(끝 날), 유다서 6절에는 「큰 날」, 마태복음 10장 15절에는 「심판 날」, 로마서 2장 5절에는 「진노의 날」, 에베소서 4장 30절에는 「구속의 날」, 요한계시록 6장 17절에는 「진노의 큰 날」, ‘어린양이 진노하는 날’, 마태복음 25장 10절에는 ‘신랑이 오는 날’, 마태복음 15장 15절에 ‘종들의 주인이 돌아오는 날’, 마태복음 25장 31절에 ‘인자가 자기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오는 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인류 구속이 완성되는 날이 아닌가? 큰 날이다. 영광의 날이다. 승리의 날이다.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하는 날이다. 새 임금, 새 백성, 새 나라가 도래하는 날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 구원이 성취되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여기 ‘확신’이라는 말의 헬라어 ‘페포이도스’(pepoiqw.j)는 ‘설득하다’, ‘설복하다’라는 말의 기본어인 ‘페이도’(pei,qw)에서 왔다. 이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설득하여 믿게 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여질 때는 ‘믿다’, ‘확신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다.
상대의 설득에 의해 어떤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리고 때로는 ‘동의하다’, ‘순순히 따르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우리 본문의 경우는 어떤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 그것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완료형으로 쓰여졌다.
그렇다면 바울 자신이나,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우들은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화와 설득에 의해,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이 경험적 믿음으로 사실화되고, 그 구원의 경험이 지금도 생생하게 진행이 되는, 앞으로도 이 경험이 유효할 것이라는 확신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와 기도의 이유이다. 첫째는 인간 편에서 빌립보 교인들의 시종이 여일한 복음 안에서의 교제였고, 그 둘째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자신이 시작하신 착한 일(3년의 역사)이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완성될 줄을 믿는 모두의 확신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도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 이유, 기도 이유는 영적이다. 구원론적이고, 교회론적이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한 바울의 결론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자신이 감사와 기도를 하게 된 그 근거와 이유가 당연하다고 했다.
빌립보서 1장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기(빌 1:7)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의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고 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투옥에 동참했고, 복음의 방어(변명)에 동참했고, 확정함(내적 신앙 경험)에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울은 이것을 바울과 함께 은혜에 동참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빌립보의 발신자와 또 수신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 자로서, 감사와 간구의 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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