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15) 교회를 향한 사도의 권면과 경고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40

"교회를 향한 사도의 권면과 경고①"
교회생활에 관한 권면 - 교회의 일치 단합

빌립보서 2장 1~4절
석원태 목사


  본론

  1. 교회를 향한 사도의 권면과 경고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서신의 서론 부분(1장)이 끝났다. 이제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4장 9절까지에서는 교회를 향한 권면(빌 2:1-30)과 이단에 대한 경고(빌 3:1-21), 종합적인 권면(빌 4:1-9)을 말하고 있다.

  1. 교회생활(공동체의 윤리)에 관한 권면

  1) 교회의 일치 단합(빌 2:1-2)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이다(빌 2:1).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여러 경우의 영적인 일들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경우는 '권면'하는 일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2장 1절에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라고 했다. 이 말은 교회 안에 여러 경우에 미숙하고, 약하고, 또 시험에 빠진 교우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에게 '권면'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여기 '권면'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para,klhsij)인데, 격려하고, 호소하고, 장려하는 내용을 말한다. 영적으로 약한 신자, 곧 교리(진리 신앙)에 약하고, 실천하는 행위에 약한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저들을 권면함에 일치해야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사랑의 무슨 위로'를 받을 자들이 있다고 했다.
  빌립보서 2장 1절에 「사랑에 무슨 위로나」라고 했다. 이는 교회 안에 있는 영·육간에 고통과 실의에 빠진 자들을 가리킨다. 저들에게 '사랑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뮈디온'(paramu,qion)인데, '곁에서' + '말해줌'의 합성어로 권면과 같은 내용이지만, 따스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온정을 나타냄을 가리킨다. 이런 일에도 일치해야 한다.

  세 번째 경우는 '성령의 무슨 위로'를 나눌 경우가 있다고 했다.
  빌립보서 2장 1절 중에 「성령의 무슨 교제나」라고 했다. 여기 '교제'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wni,a)인데, '함께 나눔'을 의미한다. 곧 '사귐'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성도 피차간의 만남 관계를 뜻한다.
  사도 요한은 복음 전도는 죄인들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게 하고, 신자끼리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요일 1:3).
  성도 간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영의 만남이고, 영의 사귐이다. 이것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특색이요, 자랑이다. 교회 생명의 특징이고, 교회 부흥의 비결이다. 그 중심이 그리스도이고, 교회이다.
  성도의 교제는 신앙의 교제이다. 기도와 감사의 교제이다. 신령한 복음 역사를 위한 교제이다.
  이 성령의 교제는 성령의 열매로 나누는 교제이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다. 이런 열매들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이다. 이런 교제는 인간적인 친교를 즐거워하는 세상 모임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교회는 성령의 위로로 사귐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네 번째 경우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빌립보서 2장 1절 하반절에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했다. 이는 성도 피차간의 태도를 말함이다.
  여기 '긍휼'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나'(spla,gcna)인데, '내장 전부'를 가리킨다. '자비'는 헬라어로 '오이크틸모스'(oivktirmo,j)인데, '연약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의 연민 행위'를 가리킨다. 긍휼은 마음속으로 불쌍히 여김이고, 자비는 그 불쌍히 여김을 행위로 표현하는 뜨거운 동정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여기 「긍휼과 자비」는 성도 상호간에 나누는 '넘치는 사랑의 호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교회는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일치의 내용이 무엇일까?
  ①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했다. 이 말은 '같은 것을 생각함'을 가리킨다. 주의 일에 대한 생각의 일치이다.
  ②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 「같은 사랑을 가지고」라고 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속죄 은총의 사랑을 가리킨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떤 유의 크리스천이든지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속죄 은총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된 자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다. ③ '뜻을 합해야 된다'고 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 「뜻을 합하여」라고 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쉼푸시코이'(su,myucoi)인데, '영혼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인격적 단합을 뜻한다.
  ④ '한 마음을 품어라'고 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 「한 마음을 품어」라고 했다. 이 말은 '그 하나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에베소서 4장 4절로 6절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경우는 '겸손'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다.
  '허영과 다툼'은 하나님 대신, 진리 대신, 교회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본위의 공명심, 자기 본위의 명예심과 자존심이다. 이것들은 교회 일치를 파괴하는 암이다. 이런 자는 모든 경우에 자기 집중적이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 이는 개인 개인의 타고난 기술이나 능력을 가리킴이 아니고, 영혼의 성결 문제를 두고 한 말이다.
 하나님의 표준에서 보는 그 사람의 신앙 중심을 두고 한 말이다.
  초대 교회의 저 유명한 감독 암부로스(Ambrose)는 군중들이 자기를 그 교구의 감독(주교)으로 청빙했을 때, 너무 두려워 도망친 일이 있다.
  그 후에 황제가 명을 내려 그를 밀라노의 주교로 삼은 일이 있다. 하나님이 쓰신 개인이나, 지도자나, 교회를 보면 겸손할 때 쓰임을 받는다.
  '다툼'은 헬라어로 '에리데이아'(evriqei,a)인데, 이는 '성령의 교제'와 정 반대되는 것이다. '허영'은 헬라어로 '케노독시아'(kenodoxi,a)인데, 이는 '사랑의 위로'와 맞서는 것이다. 이 다툼과 허영은 그 뿌리가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위세가 깔려 있다. 자기가 칭찬 받는 것, 존경 받는 것,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깔려 있다.
  이런 경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좋게 여기고, 우수하게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허영과 다툼으로 일하는 자는 결국 그들 곁에서 사람이 떠나 버린다. 뿐 아니고, 세월이 흐르면, 교회 중에 자기가 앉을 자리가 없다. 교역자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아니 한다. 같은 교우들도 그를 멀리 하고, 그와 함께 일하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결국 허영과 다툼은 자기를 죽이는 자기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직 겸손한 마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것을 각각 남의 일을 돌아보는 실천적 활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허영과 다툼」은 결국 자기 교만으로 이어진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한다고 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5-18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다. 어떤 경우든 '겸손'은 교회 일치의 첩경이다. 교회는 겸손한 자들의 공동체이다. 다른 형제가 받은 달란트를 맡아주고 귀중히 여릴 뿐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은 불일치의 해독이 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고 대적하지만 겸손한 자를 귀히 보시고, 또 축복하시고, 당신의 일에 사용하신다. 설교가였던 존 로(Jhon Rough)가 있다. 그는 존 낙스로부터 성 앤드류(St. Andrews) 교회 강단에서 봉사할 성직에 임명을 받았다. 그때 그는 상심하고,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꾸만 중얼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후 그는 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억지로 강단의 설교자로 서게 되었다. 그는 강단에 서기 전이나, 선 자리에서 늘 그의 안색이 침울하고,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것은 그가 맡은 성직의 두려움에 대한 영적인 고민과 고충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야말로 이 일을 하기에 부적합하고, 가치 없는 자인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다. 축복의 부흥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사」는 그의 이러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비단 존 로 뿐 아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와 직분자들도 그러하다. 자기가 맡은 직분 앞에 두려워 떨면서 움직이는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감당할 축복의 역사를 더하신다. 겸손의 일치는 교회 공동체의 축복스러운 덕목 중에 하나이다.

  여섯 번째 경우는 상부상조함의 일치이다.
  빌립보서 2장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다.
  여기 「각각」이란, 피차간을 의미한다. 일치의 덕목 중에 「겸손」은 내적인 마음 자세를 뜻한다. 그리고 '피차간의 일을 돌아본다'
  함은 그 외적인 면, 곧 드러나는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면을 의미한다. 이것은 타인을 향한 행동적 섬김, 곧 봉사 행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개인이 독존하는 곳이 아니다. 두세 사람으로 시작된 연합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하는 상부상조의 미덕이 필요하다. 부부끼리 상부상조함은 물론이고, 교우끼리 상부상조해야 한다.
  전도서 4장 9-12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 상부상조의 힘을 말하고 있다.

  교회 생활에 개인적으로는 참 잘하는데, 연합하는 공동체의 역사에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봐주는' 피차간의 상관관계를 잘하는 데에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다른 형제들이 만난 아픔과 시련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함께 짐을 짊어져 주고, 또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데 일치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형제에게 짐을 지우는 자가 아니고, 짐을 함께 나누어 지고, 그 짐을 덜어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의 결정적인 단점 가운데 하나가 저들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저들이 개인적으로 영적인 장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좋은 것들을 하나로 묶는 데 힘을 쏟으라고 한 것이다.
  교회는 여러 경우들에서 권면할 일이나 위로할 일이나 성령 안에서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일이 있다. 겸손하고, 상부상조해야 될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생각)으로 일치하라고 사도는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올린 마지막 대제사장적인 기도의 실천이다. 요한복음 17장 11-21절, 23절에서 주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기도했다. 교회사 중에 익나티우스나 클레멘트 같은 교인들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이 하여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사도의 목자적 심정이 여지없이 나타난 내용이다. 사도는 교회가 영적인 일에 일치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들의 일치를 기뻐함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빌립보서 2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하였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권면, 위로, 교제, 긍휼,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롬 8: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가능과 축복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의 일치와 교회의 일치의 차이인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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