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12) 바울의 고백적 간증④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1:38

" 바울의 고백적 간증"
2. 생사(生死)의 의의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
빌립보서 1장 21~26절
석원태 목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바울의 삶의 존재적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함이나, 가족을 위함이나, 아니면 국가나 민족이나 세계를 위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자체가 그의 삶 전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전 동기요, 전 힘이요, 전 내용이요, 전 의미요, 전 사상(생각)이요, 전 이상이요, 전 방향이요, 전 목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철저하고도 또 철저한 그의 생명관(生命觀)이요 생사관(生死觀)이다.

다시 바울의 간증적 고백인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① 그리스도는 바울 생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신기원이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바울로 변하면서 그 생이 새롭게 시작된 사람이다(행 9: ). 그는 그때부터 자기 인생을 새로 시작한 사람이었다.
② 또한 그리스도는 바울 생(삶)의 계속(진행)이었다.
그리스도가 바울의 존재적 삶의 현주소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맞은 삶의 순경 중이나 아니면 역경 중에도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함께해 주심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승리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행 18:9-10). 그의 현재적 생존 그 자체는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③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마지막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바울의 마지막 종착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렸을 때 결국 그 마지막에 이를 곳이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 앞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개인과 인류역사의 종착이란 말이다(딤후 4:7-9).
④ 또한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영감이라는 뜻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전 활력이고 활동이며, 주동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자체가 바울 삶의 전 동력이라는 것이다.
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울 삶의 과제라는 것이다.
바울을 신자를 만들고,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세계로 보내어 복음의 사도가 되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⑥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울 삶의 모든 가능의 힘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였다.
⑦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는 바울의 삶의 극치의 보상이라는 내용도 된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생사’(生死), 곧 ‘살든지 죽든지’에 대하여 초월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두 사이에 끼여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붙잡혔다’는 뜻이다. 빌립보서 1장 23절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바울이 두 가지 소원에 흔들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두 가지 사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여기 ‘끼여 있다’(συνέχομαι)는 말은 양쪽에 암벽이 솟아 있어서 방향을 바꿀 수 없고, 오직 전진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좁은 암벽에 둘러싸인 협곡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쓰이는 말이다.
그 둘 중 하나는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살아서 자기 일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금세와 내세,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 육계(肉界)와 영계(靈界) 사이에 끼여 있다고 했다. 빌립보 교회와 주님 사이, 착한 뜻으로 전도하는 사람들과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 사이, 삶과 죽음, 곧 생사 간에 숨 쉬고 있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 경우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b)고 하였다. 죽는 것은 ‘떠나는 것’(빌 1:23)이라고 하였다.
여기 ‘떠난다’(ἀναλύω)는 말은 세 가지 경우의 배경이 있다.
① 텐트의 밧줄(rope)을 풀고 말뚝을 빼면서 캠프를 걷어치우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이 세상 장막을 걷어치우고, 영광스러운 새 세계를 향하는 경우이다(고후 5:1).
② 항구에 정박된 배의 밧줄을 풀고, 닻을 올리고 귀향을 위하여 출항하는 경우이다. 죽음이란, 세상이라고 하는 외국의 항구를 떠나서 영원한 천국의 고향으로 귀향한다는 뜻이다.
③ 얽힌 문제들을 푼다는 뜻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생의 희비애락의 문제를 푸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로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빌 1:23)고 하였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5장 1절과 베드로후서 1장 14절에는 죽음을 장막을 허무는 것에 비유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는 죽은 후의 영생을 집(내 아버지 집)으로 비유했다.
성경에는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5:8, 계14:13). 그래서 바울은 ‘떠나는 것’(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반면에 바울은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고도 하였다.
여기 ‘육신에 거하는 것’이란 ‘누구를 도와줄 것을 목적하고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유익하다(좋다)’는 말은 ‘단연코 더 좋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살아서 이 세상에 더 머무는 것이 빌립보 교회(교인)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 사역의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2절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라고 하였다.
‘내 일의 열매’가 무엇인가? 바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더하여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1장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의 존재론적 의의가 분명하였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성화적 믿음과 기쁨 때문이었다. 이 일 때문에 자기는 육신에 머무는 편을 택했다고 하였다.
바울은 처음에는 이 두 사이에 끼여서 잠깐 혼란에 빠졌다. 빌립보서 1장 22절 하반절에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 장차의 영광 사이에서(롬 8:18) 흔들리다가 교회를 위한 남은 사명 편을 택함이 주의 기쁘신 뜻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재회할 미래적 소망을 피력하게 된다. 빌립보서 1장 26절에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옥에서 나와 빌립보 교인들을 다시 만날 그때는 바울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풍성한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 자랑은 기쁨을 동반하고, 사랑을 동반하고, 믿음의 진보를 자랑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본적(神本的) 자랑이다. 바울은 자기의 석방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실로 목회적이고 목자적 자랑이다. 요셉과 야곱 부자가 만났을 때 목을 서로 껴안고 실컷 울고 난 다음에,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창 46:30)라고 한 야곱의 행복한 자랑과도 비교될 것인가!

이 부분의 중심 뜻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생사관(生死觀)이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될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다(빌 1:19).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생사를 걸고 그리스도 예수만을 존귀케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빌 1:20). 그 이유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나(죽음), 아니면 살아서 빌립보 교회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자랑이 되는 것이라면 살아 있어야 된다고 한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궁극적인 목적이 뚜렷하고 분명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바로 이러한 생사관이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사관이 아닌가!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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