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사색주변 (思索周邊)-소설 1962.08 [(1962년 현대문학 8월호) 추고][오승재 지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9. 20. 17:01

사색주변 (思索周邊)-소설 1962.08|소설, 콩트, 에새이, 칼럼

은혜 | 조회 27 |추천 0 |2019.09.13. 09:59 http://cafe.daum.net/seungjaeoh/J74U/83 

 

1

 

"박 중위"

성긴 소나무 사이론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박 중위"

어디를 거닐다 돌아오는 건지 교육부장 백 소령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이서 들려왔다. 박 중위는 책을 읽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텅 빈 장교 숙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장교 숙소래야 솔밭 위의 작은 교육장 하나를 칸 막아 놓은 것이었다.

"사색하러 갑시다."

박 중위는 멍청해졌다. 사색하러 가다니 어디 가서 무엇을 어떻게 사색하자는 말인가?

백 소령은 무조건 그더러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백 소령이 직접 운전대에 앉아 그들은 교육대의 정문을 나섰다. 정문을 막 나서면 그곳이 바로 해운대의 백사장이었다. 좀 더 가면 미군들이 막아 놓은 해수욕장이 있고 이와 반대 방향으론 철조망이 둘러 있는 언덕이 있는데 그 안엔 탄약창이 있어 민간인들의 통행 금지구역이 되어 있다.

그들이 십 여분 동안 빙글 돌아 달려간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차를 내려서 오륙도가 보이는 그 숲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 소령은 앉자마자 아무 말 없이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또 볼에 턱을 괴고 넋 나간 사람처럼 땅을 보고 있기도 했다. 박 중위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멍청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과 땅이 맞닿아 버렸다.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무엇을 사색할 것인가?)

그는 사색이란 말마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막연히 무엇을 불러일으켜서 생각해 보는 것, 그런 것이 사색이 될 수 있을까? 어떤 특정한 대상을 깊이 파고 생각해 보는 것 그런 걸 사색이라 할 것인가? 숙고란 또 어느 때 쓰는 말인가? 어떤 계획을 샅샅이 검토하고 생각해 보는 것은 사색이라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언어의 기원을 따져 본다든가 역사를 고증하는 따위는 연구가 될지언정 사색이라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리해서 모색해 보는 것, 이런 게 사색일까? 그러나 이 엄청난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색해보자는 말인가?

그는 자기가 읽었던 책 가운데 사색에 관해서 이야기해 놓은 것이 없을까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빈약한 독서 시절을 통해서 기억해 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을 알았다.

백 소령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본격적인 사색에 잠긴 모양이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바로 그대로였다. 육사생들의 수양록 기록시간을 생각해 냈다. 먼저 수양록을 내놓고 책상에 배를 붙이고 똑바른 자세로 앉아 눈을 감는다. <반성 시작!> 모두가 하루 생활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반성 끝, 일기 쓰기 시작> 싹 싹 싹 모두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지루해져서 몸을 고쳐 앉았다. 백 소령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서른일곱인데 독신이었다.

"부장님은 결혼 안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 결혼하면 뭘 해." 하고는

"그런데 말이요, 박 중위, 난 결혼한 사람이 혼자서 이 장교 숙소에 있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건 어느 계통에 속하는 거요?"라고 했던 것이다.

"무슨 그게 계통이 있습니까?"

"엄연히 있지요. 기혼자의 생활, 미혼자의 생활, 또 미혼자도 결혼 안 한 사람의 생활, 결혼 못 한 사람의 생활."

"그럼 기혼자의 생활도 행복하게 결혼한 사람의 생활, 불행하게 결혼한 사람의 생활, 이렇게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박 중위는 그럼 불행하게 결혼했단 말이요?" 하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러지는 않지만."

"그거 봐요. 그러기 때문에 모르겠다는 것이오." 하고 사뭇 심각했었다.

"우리의 체험도 말이요 이게 아주 어수선한 것 같지만 사색하면 계통이 선명해지거든요.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이렇게 말이요."

(백 소령은 현재까지의 체험을 정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박 중위는 그의 신병을 잘 몰랐다. 그러나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북에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그들은 흥남 철수 당시 함흥에서 급히 흥남으로 왔었다. 그러나 타고 갈 배는 하나도 없었다. 애인은 그동안 짐을 더 챙기기 위해 함흥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새에 교통은 차단되고 민간인들을 철수시킬 LST는 도착했다. 서로 먼저 타려는 아비규환의 혼잡 속에서 그도 타야만 했다. 배는 떠났다. 그러나 그는 선창에서 소리쳐 부르는 애인의 환상에 가슴이 멘다. 아직도 바다 저편에서 애인의 손길은 어른거린다.

전마선이 하나 멀리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박 중위는 사촌 동생 숙이와 그녀의 친구 미애와 셋이서 해수욕장에 갔던 지난여름이 생각났다. 숙이는 해변에서 모래집을 만들고 파묻혀 있었고 그와 미애는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왔었다. 숙은 조금도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물이 흐린 바닷가 낮은 곳을 뛰어다니면서 얼굴에 물이 뛰어오를 때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린애처럼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그가 보트를 타자고 말하자 그녀는 싫다면서 달려가 버렸다. 그는 숙이 미애만큼 활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박 중위는 보트 젓는 것이 서툴러서 몇 번이고 미애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미애는 더욱 거들먹거리는 것이었다. 어느새 꽤 먼 바다까지 나왔었다. 그는 내심 두려워져서 노를 안으로 당겨 놓았었다.

"좀 더 멀리요."

그녀의 말은 착 가라앉아 있었고 눈은 집요하게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갑자기 피가 멎는 듯하면서 절망감 같은 것이 엄습해 왔었다. 그녀는 배 안으로 내려앉으며 발을 가지런히 놓았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왜요?"

"그냥 죽고 싶어요."

그녀는 그의 발을 들어 자기 발 위에 올렸다.

"어젯밤에 저는요, 누군가가 칼을 들고 내 가슴을 찌르는 꿈을 꾸었어요. 가슴이 섬뜩하지 않아요? 그런데 연거푸 막 찌르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무서웠는지 사람 살리라고 막 악을 쓰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어요. 무서웠지만 난 어쩐지 그렇게 한번 죽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그의 발을 쓰다듬었다. 그는 노를 젓는 것을 그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하고 씽긋 웃더니 갑자기 밀짚모자를 던지며 일어섰다.

"헤엄칠 줄 아세요?"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배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조심해요."

그가 겁에 질리는 소리를 질렀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또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머리가 배 꽁무니에서 솟아올랐었다.

"시원하고 좋아요."

그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여름이 될 것이다. 소위 마크를 달고 나온 처음 휴가였다. 그들은 절에 들려 며칠 쉬었다 가기로 했었다. 그때 아주 해수욕장까지 들린 것이다. 그는 일생 처음으로 자유로운 공기를 마신 것 같다. 그때 미애를 소유하려 했으면 이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는 숙이 외의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이 순간 어떻게 해서 갑자기 숙이와 미애 생각이 떠오른 것일까?)

바람이 솔밭 사이를 지나쳤다. 바다 물결이 거품을 일으키며 해면을 씻는 것이 보였다. 정말 미애는 그때 죽고 싶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또 한 번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정말 그도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건 너무나 감상적이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한동안이나마 백 소령이 쭈그리고 앉았던 그런 모습으로 앉아 생각에 젖었던 자신을 깨닫고 일어섰다.

"박 중위, 사색 다 끝냈소?"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에 올랐다.

"어떤 사색을 하셨습니까?"

달려오면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부대에서 차를 세우고 내렸을 때 그는 상기도 심각한 백 소령의 표정을 보고 놀랐다. 그는 자기 어깨를 치면서

여기 오기까진 이야길 않는 것이 좋소, 이 가까운 거리를 왜 차로 가는지 압니까?”라고 묵상한 뒤는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2

 

백 소령은 그에게 사색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사색하러 가자고 했을 때 처음 한순간 그는 싫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백 소령은 그의 감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그 지점까지 운반해다 놓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하고 헤매는 사이 어머니는 열아홉에 그를 낳았다는 생각이 돌발적으로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열아홉이라면 아직도 어리고 어린 처녀가 아닌가? 그는 이 신기한 생각을 왜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였다. 2, 3학년일 수밖에 없는 처녀가 어린애를 낳았다! 그것도 남편이 없는 사이 무서운 시어머니의 감시하에. 그는 어머니가 한없이 측은해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혼자서 감당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꿈마저 설익었을 시골 처녀가 부모의 명 때문에 같은 마을 한 양반의 가문에 시집을 왔다. 의지하고 온 남편은 역마살이 끼어 만주로 달아나 버리고 시어머니 밑에서 불안과 공포로 어린앨 낳는다. 그리고 일생을 논과 밭에 엎디어 고무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짚신으로 살아간다. 이 얼마나 참혹하게 유린당하여 버린 삶인가?

그는 그때 어리고 어리던 처녀의 배를 아프게 하고 태어난 아들이다. 20대 중반이 되어 겨우 어머니의 진정을 알게 된 것에 죄송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 나왔다는 말인가? 언젠가 한 번 들었을 그 말이 무의식중에라도 어린 자기 마음에 각인(刻印)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떠오를 수 있을까? 그는 기억이란 우리의 머릿속에 시간 순서로 쌓여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언제부턴지 하고 있었다. 기억이 만일 그렇게 차곡차곡 시간 순서로 쌓여 있는 것이라면 먼 옛날을 생각해 내는 데는 퍽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말 것이다. 또 인간의 두뇌는 교묘하게 생겨서 우리가 일별할 수 있도록 평면적으로 기억은 저장된 것이 아니다. 훅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땐 시간적인 전후 관계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다만 그대로 두뇌에는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미립자 같은 기호들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가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고자 할 때 그는 번개와 같이 움직이는 입자 가운데 어떤 한 입자를 본다. 그럼 그 입자는 그의 앞에 한 화면을 가져다준다. 그는 그 화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손쉽게 읽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억해 내려는 아무 특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을 때만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건 웬 까닭인가? 그는 이런 걸 또 생각했다. 그건 아주 깊이 각인된 입자가 격렬히 운동하다가 그것이 과잉된 에너지로 궤도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떤 사고가 기억을 요구하는 동안은 그 과잉 에너지는 미미해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인간의 사고가 공허한 상태에 있으면 튀어나온다. 튀어나온 기억은 많은 연쇄 기억을 불러낸다. 그러는 동안 다른 기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끝나면 이젠 다른 기억이 튀어나온다. 절에 있는 중들은 먼저 자기와 맺어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세속의 정을 절단해 버리는 것을 수도의 첫 과정으로 삼는다고 한다. 모든 존재는 실아(實我)는 없고 일 주야를 육십 사억 구만 구천 팔십 찰나로 나눌 수 있는 그 찰나 속에서 다만 인연으로 얼핏 병존했다 사라지는 가아(假我)가 있을 뿐이다. 우리와 함께 있었던 것은 그 찰나 찰나뿐이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공() 속에 있어야 하는 수도승이 수도는 혼자서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너무 많은 잡념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해 냈을 때 그는 기억에 대한 많은 이 잡념이 공이 될 때 한순간의 상념이 떠오른다는 가설을 그 나름대로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백 소령이 그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그의 머리를 공의 상태로 해 놓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사색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백 소령의 사색주변에서 그대로의 공의 상태가 오기를 즐기는 셈이다. 그가 수도승이라면 이 기억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 나타나는 기억을 또 거부하고,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공의 상태로 만들어버려야 한다. 정말 사색해야 할 것들은 거기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 더욱 생각했다. 얼마나 포근히 감싸주는 정이 그리웠을 것인가? 어린애를 낳고도 어머니는 잠시를 쉬지 못했다 한다. 아침에 젖을 먹이고 밭에 나갔다가 점심때 돌아오면 그는 온방을 헤매며 울다 울다가 지쳐서 방구석에 새파랗게 되어 처박혀있었다 하지 않았다던가? 어머니는 혹독함이 시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인식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배가 고파도 밥을 많이 먹지 못해서 밭두렁을 지나는 행인에게 친가의 어머니더러 밥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지 않는가? 출가외인이고 그때는 모두가 너무 가난해서 그렇게 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불현듯 할머니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인생의 체험을 많이 쌓은 할머니가 나이 어린 연약한 며느리를 어찌 그렇게 혹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든 집을 빠져나가려던 박 중위를 붙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듣기 싫은 말을 되풀이하던 할머니의 얼굴. 거기엔 어떤 사람도 옆에 붙이지 못할 천품 같은 게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인 드는 것이었다. 학문한 할아버지는 농사일에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농사를 안 지어도 자기 옆에서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자기 옆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도시로 나가 딴 살림을 차렸다. 품앗이로 농사를 지탱하고 있던 할머니는 어린 며느리를 들였는데 아버지는 사랑 없는 결혼이라고 또 집을 떠났다. 그러나 반면 박 중위는 할머니가 그렇게 잔인하고 인색해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서른에 과부가 되었었다. 아들 두 형제를 거느리고 살았는데 큰아들은 만주로, 둘째는 고학의 길을 떠나 두 여인이 꽤 많은 전답을 거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할머니도 따뜻한 정에 말랐던 것인지 모른다. 과부가 된 할머니는 잃어버린 정을 기다리고 기다려 아들들에게서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떠나버렸다. 그 울분은 모조리 나이 어렸던 어머니 위에 쏟아져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숙명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가족이 이렇게 흩어져 있는 것은 어떤 선조의 무덤을 잘 못 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쓰라린 현실을 체념으로 받아들이자는 한갓 방편일 것으로 생각했다.

박 중위는 중학생이 되기까지 이 농촌, 할머니와 어머니 곁은 떠난 적이 없다. 그곳은 삼십 리는 족히 걸어야 기차역을 볼 수 있는 깡촌(두메산골)이었다. 외부 사람이라곤 외숙이 큰딸을 데리고 할머니 집을 다니러 왔을 때였다. 그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삼학년 때인 것 같다. 그 사촌 동생이 숙이었다. 얼굴이 얼마나 희고 야들야들한지 그런 여학생을 이런 시골에서는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그 애가 그의 동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엇으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그렇게 희고 고울 수가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그는 숙이를 시골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었다. 보릿대 사이에서 뒹굴기도 하고 또 동리 정자까지 갔을 때는 다리가 아프다 해서 업고 오기도 했었다. 그 인상은 오래도록 그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숙이가 떠난 후에도 그는 어린 생각에 크면 그런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그는 숙을 만나지 못했다. 얼마 있지 않아 해방이 되었고, 호열자는 만연했으며, 곧이어 6·25가 터지고 모두 피난 길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3

 

박 중위는 6·25 후유증으로 혼란한 가운데 고등학교를 졸업 후 중등교사 양성소라는 곳을 선택했다. 그때는 중학교에 수학·과학 교사가 부족하여 그런 양성소를 각 대학 부설로 설치하고 있었다. 등록금도 저렴했거니와 졸업 후 곧 취직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는 졸업하자 바로 취직하여 돈벌이를 하지 못했다. 일 학년 말에 갑자기 대학의 교내 군사훈련제가 폐지되고 집단 입소훈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을 일 년 앞둔 대학생으로 상무대에서 육군 보병학교 제1기 학도 특별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명목은 대학 내 훈련이 부실해서 군에서 훈련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간부후보생 전반기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과정이었다. 훈련 후 바로 예편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졸업과 동시 군에 소집되어 입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후반기 간부후보생을 지원하여 장교가 되느냐 사병으로 입대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그는 장교를 지원하였다. 어떻게든지 독립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위로 임관하여 군에 적응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숙이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면회를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시기에 맞추어 휴가를 신청했다. 그래서 숙이와 미애를 만났던 것이다.

한순간 또 얼굴이 붉혀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들이 목욕하는 동안 그가 보초를 섰던 일이다. 그는 숙이를 만나 함께 영화를 보러 갔었다. 그녀는 숙부가 직장을 제대로 가지지 못해 대학진학을 포기했다고 좀 우울한 표정이었다. 영화관에서 돌아오면서 얼음집에 들렀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우연히 숙이보다 이년 선배인 미애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불쑥 그림을 그리러 절에 가겠다고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혼자는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박 중위와 숙이는 곧 동의했다. 그들은 어디든 가고 싶었던 것이다. 동래에 있는 절에 도착한 그 날 밤, 미애는 덥다고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녀들을 데리고 절 옆을 흐르는 냇가로 갔었다. 좀 으슥한 위 골목으로.

그녀들은 거기서 옷을 벗어 던지고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바위와 나뭇가지로 가려진 그 밑 바위 위에 서서 승려들이나 유람 온 손님들이 나타나지 않나 파수를 보았다. 검푸른 산 계곡에서 울리는 물소리는 좀 무서웠다. 그러나 눈이 어둠에 익고 하얀 살결들이 교대로 바위와 나무 사이로 비칠 때 그는 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서서 파수를 보는 것이 대견하고 즐거웠다.

"덥잖아요?"

미애의 소리가 들려왔었다.

"괜찮습니다."

"오빠, 오빠도 더우면 거기서 목욕하지."

그때 같이 장교숙소에 있던 임 중위가 나타났으면 뭐라고 했을까?

(여보 파수 보고 섰소? 하고 비웃으며 지나쳤을 것이다.)

여자와의 관계는 공개하고 보면 유치하고 부끄러운 일뿐이다.

 

4

 

숙이와 만난 뒤 그녀는 자주 편지를 해 왔다. 일선에서 숙이의 편지를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중위로 진급한 뒤로도 그는 휴가를 받으면 집보다는 외숙 집을 먼저 방문했었다. 군에 입대해서 삼 년이 되던 그 나이 스물여섯의 가을에 그가 휴가로 들르자 숙모는 그에게 결혼하기를 권했었다. 그즈음 바짝 할머니도 그의 결혼을 강요하게까지 된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숙의 혼담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숙은 번번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그에게 있는 것으로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사실 이상으로 상상하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는 결혼하겠노라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러자 부대로 여자의 사진이 보내지고 그만 괜찮다면 겨울에라도 해치우겠다는 편지가 왔었다. 그의 부대는 그해 겨울에 야외 기동훈련이 바빠서 그럴 여가가 없다고 결혼을 거부했다. 그때 숙에게는 국민학교 교사이며 진실한 크리스천인 청년이 프러포즈하고 있다는 말이 들렸었다. 그가 야외 기동훈련 때문에 험준한 고갯길을 지프로 달려 내려가다가 버스와 교차하려고 멈추어 선 버스에서 숙을 본 것은 결혼을 미루고 있던 그해 겨울이었다. 바람이 심히 불어 강추위를 하던 날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 지점에서 서로 용케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일까? 숙은 바로 차에서 내려 그를 따랐다. 그들은 반가워 껴안다시피 하여 부대로 돌아가 토굴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새웠다. 그녀는 혼담에 너무 시달렸음인지 감정이 격해 있었다. 스물다섯이라면 나이로 그럴 때이었을까? 그들은 길게 입 맞추었다. 그러다가 그는 숙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때 숙은 갑자기 그를 밀어내며 오빠 안 돼.”하고 돌아 누었다. 그는 좌절감, 수치감, 한순간 쾌락의 노예로 전락한 자신에 몸이 굳어져 어쩔 바를 몰랐다. 그는 천정을 보는 자세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오빠, 어젯밤 화났어?”라고 숙은 다음날 말했다.

아니야. 미안해.”

내가 오빠 사랑하는 걸 알지?”

그러면서 숙은 떠날 때 말했다. “오빠는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

 

돌려보내고 난 뒤 박 중위는 결혼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숙이가 말하는 영원한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의 사랑은 육체적으로 그녀를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그녀는 거절한다. 만일 그날 그가 욕정에 사로잡힌 대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이 사회에서 저주받는 패륜아가 되었을까? 그들의 감정은 아름다운 것은 없었으며 단순한 독점욕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었을까?

그는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겨울을 넘긴 그해 봄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소개해 준 여인과 결혼하였다. 결혼해서 아내와 같이 지내면서도 그는 얼마 동안 숙을 잊지 못하였다. 박 중위는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결혼 생활 가운데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이다. ‘오빠를 사랑한다.’라는 숙의 말을 들은 지 반년도 지나기 전이었다. 또 숙은 아직도 결혼하고 있지 않은데 벌써 그는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장교숙소에 면회 오는 것을 싫어하였다. 도저히 그녀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영원이란 현실을 초월한 신에 속한 영역의 단어이다. 어떻게 이 세상에 영원이 있을 수 있는가? 평행선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평행선 끝까지 가본 사람이 있는가? 지구는 위도와 경도가 있다. 동경 10도와 20도는 항해하는 사람이 평행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끝에 가보면 북극과 남극에서는 한 점에서 만난다.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평행도 한 점에서 만난다. 사랑과 미움도 평행선처럼 영원히 하나가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성을 초월한 신의 세계에서는 애증(愛憎)은 한 몸이 될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것이 아니라 미움은 사랑의 한 그림자로 영원에서는 미움은 사랑 속에 포용 되는 것이 아닐까?

숙이는 언니를 사랑하세요. 그것이 저를 사랑하는 것이에요.”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그것이 말이 되는가?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율배반이고 위선이다. 그러나 이성을 초월한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세계의 사랑은 이 지상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미애의 말이 떠 올랐다. 내가 죽고 새로운 세상에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사랑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숙이를 놓아버리자. 숙이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 숙이를 소유하고 싶다는 집착에서 해방되자. 그것이 유일한 사랑은 아니지 않은가?

5

 

아내가 출산할 기미가 보인다고 가능하면 집으로 오라는 어머니의 전갈이 있어 박 중위는 휴가를 얻어 집으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출산 준비로 분주했다. 아기를 잘 받는 동내 아주머니를 불러오고 부엌에서는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아내는 손발이 묶여 누워 있었다. 그는 출산하는 동안 밖에 쫓겨나가 있었다. 드디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고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30대에 과부가 된 할머니, 남편이 집을 나가 생사가 불분명해 생과부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이제 막 출산을 한 아내가 한 방에 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앞으로 무슨 짓을 하려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 여인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가 증오했던 할머니, 그가 미련하다고 저주했던 어머니,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던 아내,. 그들이 가련하지 않은가? 자기는 그런 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과연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일까?

언니를 사랑하세요. 그것이 저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라고 말했던 숙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내가 너를 놓아버리는 거야. 그래야 내가 모든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너도 사랑하고 할머니도 어머니도 아내도 동시에 사랑할 수 있게 될 거야. )

박 중위는 동생 숙이가 자기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오자 장교숙소에 숙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그 속에 그녀의 결혼 청첩장도 있었다. 그는 날 듯이 기쁜 발걸음으로 백 소령을 찾았다.

밖에서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해변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와 섞여 마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휑한 장교 숙소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백 소령님!"

임 중위가 놀란 듯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건넛방에서 무표정한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백 소령이었다.

"사색하러 갑시다

이번에는 박 중위가 사색하러 가지고 자청하였다. 그는 운전대에 앉아 지정된 코스로 차를 몰았다.

철썩 쏴아. 철썩 쏴아. 물결은 끊임없이 해변을 씻고 물러갔다.

나뭇가지를 울리며 또 바람이 지났다.

웬일이야. 사색하자고 자청하게.”

제자가 스승이 된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이젠 누구에게도 사색하러 가자고 권하고 싶어요.”

차는 급커브를 돌아서 우뚝 멎었다. 백 소령은 차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박 중위의 어깨를 치며 어느 때나 다름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사색은 가을이 제일이야."

그렇습니다. 기분이 한결 상쾌합니다.”

그는 숙이 결혼도 축하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박 중위는 자기도 숙이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깨에는 투박한 백 소령의 손의 무게가 오래도록 남았다.

몸을 곧게 하고 여느 때나 다름없이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박 중위는 전혀 우연히 백 소령의 애인은 벌써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1962년 현대문학 8월호) 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