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사랑의 찬가[한국교회오늘의부흥은교회초기외국선교사들의고귀한희생덕분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8. 18:10

060326 사랑의 찬가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2-17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1-39)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의 부흥을 이루게 된 데에는 교회 초기에 우리나라 조선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가운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 가운데 비슷한 시기에 이 땅에 들어와서 목숨을 잃었던 두 선교사의 모습이 특별히 눈길을 끕니다.

그 한 사람은 캐나다 사람으로 맥캔지라고 하는 분이에요. 이분은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다가 조선의 소식을 듣고 친구들 후원그룹을 만들어서 그 후원을 받아 한국에 홀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언더우드를 만나 그의 조언을 듣고 황해도 장연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에 가서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사람들 속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살게 됩니다. 그는 30대의 젊은이로서 내가 이 땅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리라하고는 들어와 삽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들어온 지 1년 반 만에 죽게 됩니다. 갑작스런 생활의 변화 즉 기후의 변화, 그리고 조악한 식생활, 또 홀로 있는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뼈저린 고독, 그리고 열병에 걸리게 됩니다. 열병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그는 권총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합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캐나다에 전해졌을 때, 캐나다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캐나다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선교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삶과 모습을 보면서 아쉬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희생은 하였지만 과연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이라고 하는 역시 캐나다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일찍 선교의 꿈을 안고 의사로서 들어오려고 준비합니다. 그리고 뉴욕의 빈민가 병원에서 의사로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로제타라고 하는 미국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도 선교의 꿈을 가지고 의사로서 공부하다가 이 병원에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이 두 사람은 다 선교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홀이라고 하는 사람은 중국선교사로 파송되게 돼있고 로제타라고 하는 이 여인은 조선으로 파송되게 돼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둘이 같이 갈 수 있을까? , 로제타는 선교사로 파송 받으면서 맺은 조건이 한번 파송을 받으면 5년 안에 결혼하는 건 곤란하다. 이런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면서 이 두 가지 문제가 잘 해결되어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함께 중국으로 갈까. 아니면 함께 조선으로 갈까. 기도하는 가운데 로제타가 먼저 조선으로 파송됩니다.

그 당시에 미국에서 제물포까지 들어오는데 뱃길로만 약 두 달 걸립니다. 배를 세 번을 갈아타야 올 수 있는 참으로 험악한 길입니다. 그들은 1년간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또 그들의 선교에 하나님이 도우셔서 함께 봉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때로는 희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이 되기도 하면서 안타까움을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1년 후에 홀도 역시 선교본부에서 정책을 바꾸어서 조선으로 파송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감격 속에 만납니다.

이제는 5년 안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는 여자 미혼 선교사에 대한 규정을 놓고 또 이들은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청원을 한 끝에 조선에 도착한 지 반 년 만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 조건이 있습니다. 홀은 평양에서 일하게 돼있고 로제타는 서울에서 일하게 돼있었는데 그것만은 지켜야 되겠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만, 평양과 서울로 나뉘어서 일을 하게 됩니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그 때 걸음으로는 1주일이 걸립니다. 1주일을 꼬박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그 거리에 서로 나뉘어서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아주 바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능히 넘어설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이 그들 마음 속에 불타고 있어요. 나의 어려움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를 위해 기도합니다. 상대의 어려움을 더 마음에 담습니다. 사랑하면서 그 일을 헤쳐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몇 달 만에 휴가를 얻으면 1주일을 꼬박 걸어서 홀이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다시 반갑게 만나고 2주 동안 머물고 또 다시 1주일을 걸어가야 하는 그러한 생활이 반복됩니다.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났습니다. 그리고 평양은 격전지였습니다. 전투 이후에 평양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체와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넘어갑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홀이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을 끝까지 지키면서 수많은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간호합니다. 그러다가 자신 역시 그 전염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만난 지 5년이요, 홀이 조선에 들어온 지 3년이요, 결혼한 지 2년 반 만에, 맥캔지와 같이 같은 해에 34살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제타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들 사이에 얻은 두 아이를 안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남편을 묻은 조선을 두고는 마음이 편치 않기에 3년 만에 모든 준비를 해가지고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78세에 해방 직전 은퇴할 때까지 한 평생을 조선사람을 사람하며 조선사람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난 아들도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조선을 위하여 끝까지 일합니다. 기록을 보면 동대문에 있는 이대부속병원, 고대부속병원, 알고 보니 다 로제타가 시작한 병원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결핵환자를 위하여 크리스마스씰을 붙였던 기억이 나는데 알고 보니 그 아들이었던 셔우드 홀 박사가 이 나라에 최초로 결핵요양원을 세우고 결핵퇴치운동을 펼쳤던 것이지요. 그들 일가는 모두 다 미국에서 죽었습니다마는 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나를 조선 땅에 묻어주시오. 그래서 지금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한 가족이 오붓하게 같이 모여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홀로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목적을 같이하고 목표를 같이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일할 때, 그들의 사랑도 온전한 사랑이 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사명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놀라운 감동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가끔 누가 바람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아내도 자식도 심지어는 그 직장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순식간에 거기에 빠져들어서 도피하듯이 그렇게 가는 모습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렇지 너와 나 누구에게도 사랑의 불씨는 있는 것이지요. 길을 잘못 든 것뿐이지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모든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뜨거운 마음, 뜨거운 불씨, 사랑의 경험이 오늘도 숨겨져 있는 거지요. 그것이 말씀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갈 때, 아름다운 결과로 나타나는 거지요.

여러분, 이번 4월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승리가 있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이라고 그래요. 사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40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그 부활사건 이전까지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정이라 해서 특별히 우리의 신앙을 경건하게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거예요. 그래서 사순절에는 특별새벽기도회도 하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순종은 마치 이런 모든 제품의 사용설명서와 같지요. 사용설명서를 잘 읽고 그대로 쓰면 제품을 길게 잘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설명서를 성경으로 펼쳐 보이신 거지요. 그러니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복 받는 삶이 되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런데 순종에 함정이 있어요. 어떤 함정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는 거지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해요. 그 분명한 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사순절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카니발을 해요. 여러분,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카니발이 뭡니까? , 이제 내일부터 금식에 들어간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자제하고 40일 동안 금식에 들어가야 한다. 다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달래기 위해서 좋다, 그러면 그 앞에 한 주일 동안은 평소보다 더 해방을 허락하고 마음껏 해도 좋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방탕하고 무절제해지고 쾌락에 빠지는 카니발을 허락한 것이지요. 인간이 스스로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과 명령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미 우리 선조들도 알았기에 문화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겠어요.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사순절의 경건보다는 카니발의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요. 리우 카니발이 시작될 때, 단 한번도 신문에서 그 사진을 싣지 않은 적이 없어요. 참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의 사악한 꾀를 잘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는 거지요. 또 하나, 만약에 이게 굳은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약하니까 작심삼일 무너지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독하게 끝까지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도 문제가 있어요. 이걸 내가 해내야지 이걸 내가 지켜야지 하면 자기에게 초점이 주어지고 자기의지를 강화해서 맹세하고 결심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지요. 그런데 뭐든지 움켜쥐면 고집스러워져요. 그리고 너는 못했는데 나는 했다고 하는 교만이 올라오는 거지요.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필립 얀씨의 책을 읽으면 이런 대목이 하나 나와요.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어요. 아내가 시장에 가서 설탕을 사왔는데 그 값을 물어보다가 서로 차이가 생겼어요. 그게 싸움이 되었어요. 화가 났어요. 그래가지고 이 남편이 살던 통나무집을 정확하게 이등분으로 잘라버립니다. 잘라가지고 자기 몫을 저쪽으로 옮겨 다시 세우고 40년을 말없이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내에 대해서 두고 보자 이럴 거 뭐 있어요. 남편에 대해서 어디 보자 그럴 거 뭐 있어요. 볼 게 뭐 있습니까. 둘 다 연약한데.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길을 잘못 들면 사람은 오히려 악한 것에 고집을 부려요. 교만해져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순종을 원합니다만 그 순종은 내가 그냥 안간힘을 써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하는 몸부림이 아니에요. 그 이전에 내 마음의 순종이에요. 마음의 순종이라는 게 뭐예요.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아니 보세요. 눈이 맞으니까 아내고 자식이고 다 버리고 도망가버리잖아요.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있다고요. 그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지고, 내 아내에게 맞춰지고, 내 자녀에게 맞춰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넓은 사랑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폭군같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무릎 꿇고 복종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내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며칠 전에 자카르타에 장동건이 왔다고 하네요. 전 그것도 몰랐는데 구름떼 같이 사람들이 몰려갔다고 그러대요. 좋아하니까. 어디 장동건이 사탕을 준다고 했습니까. 빵을 준다고 했습니까. 그저 자기 혼자 좋아하니까. 우리에겐 이런 숨겨진 비밀이 있어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total acceptance’ 전적수용,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그 놀라운 사랑을 내가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 사랑을 받는 것이지요. 그리고 ‘total commitment’ 전적헌신. 그러고 나서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total discipline’ 전적순종, 그렇게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지요.

데이빗 시멘즈라고 하는 기독교 상담학자가 말합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정서적인 문제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그러냐. 세상 사람들보다 내가 더 반듯하게 살고 있거든요. 그만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버렸어요. 마치 내가 그것 때문에 구원받은 양 착각해버렸어요.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베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 아내가 인정하는 남편이에요. 우리가 밖에 나가게 되면 옷 다 입고 넥타이 매고 화장하고 또 우리 마음에 도덕과 윤리로 다시 한번 재무장하고 그리고 나가는 거지요. 다른 사람의 평판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집에서 옷 훌렁훌렁 다 벗고 지낼 때에 아내가 인정하는 남편, 그 사람이 행복한 남자예요. 남편이 인정하는 아내, 그 여인이 행복한 여인이에요. 이미 다 알기 때문에 다 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밀이 있어요. 그건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봐주는 사람이 부드럽게 봐주면 합격이에요. 그거 행위로는 상대를 절대 만족시킬 수 없어요. 내 맘에 드는 남편 내 맘에 드는 아내가 세상에 있습니까? 없는 거지요. 부드러운 눈으로 봐주어야 하지요. 제가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발견한 건 뭐냐면 학생들의 수준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고. 그런데요 선생님이 부드러운 눈으로 봐주고 격려하면 아이가 살아나요. 그런 아이는 뭘 해도 할 수 있어요. 근데 뭔가 좀 있어도 자꾸 야단치고 부정적으로 얘기해주면 시들어버려요. 죽어버려요. 남편과 아내는 더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그 비밀을 말하는 거예요. 사랑을 찬송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주셨는데 이제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어찌 하나님이 다 주시지 않으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잘한다고 칭찬하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죽어도 다시 사는 이 놀라운 천국의 소망과 영화로운 삶을 약속해주셨는데 누가 이 좋은 것을 끊어버릴 수 있겠느뇨.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버리겠느냐.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에 주목해야 되요. 사순절에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있지만 홀로 한번 그 십자가의 은혜가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런 우화가 있어요. 어떤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면서 물을 찾고 있는 거예요. 물이 어디 있나. 아무리 찾아도 울이 안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는 거예요. , 이걸 모를까요.

제가 군에 있을 때, 병장이 됐어요. 그런데 제가 병장 때 군종업무를 봤기 때문에 부대에 사병들이 들어오면 잠깐 면담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교회로 인도할 수 있는 사병들을 격려하는 일을 한 거지요. 한 졸병이 들어오는 걸 제가 봤어요. 그러고는 우연히 제가 PX에서 빵을 먹고 나오다가 그 친구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너 이리로 와.” 빵을 하나 줬어요. 그랬더니 저 제대할 때까지 저만 만나면 , 장 병장님 그 때 그 빵 너무 맛있었어요.” 그거 몇 푼 하겠어요. 그러나 언제냐에 따라 빵의 심리적 크기는 많이 다르지요. 배고플 때 먹는 빵하고 배부를 때 먹는 빵은 완전히 다른 거지요.

십자가의 그 놀라운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내가 쥐고 있는 이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탓이에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예요.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만 다시 한번 자기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주의 은총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십자가를 발견하는 순간,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펼쳐놓으신 이 우주 하나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에 눈 뜨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랑에 이끌려 삽니다. 그는 늘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날 강권하신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과 은총으로 붙들어주시고 오늘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사랑에 마음을 열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