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왜 하나님은 재난에 침묵하시는가? [변철환 영사 물음/ 장영수 목사 답변]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30. 09:40

한마음의 은혜

2010년 특별호 (통권 65)

 

왜 하나님은

재난에 침묵하시는가?

                                         재난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성경은 신화인가요? 사실인가요?

                                         기독교 신앙의 역설

장영수 목사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다>

 

드디어 욥이 말문을 열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

그 밤에는 새벽별들이 빛을 잃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도 밝지를 않고,

동트는 것도 볼 수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표준새번역 욥기 3:1-4, 9-10)

 

 

재난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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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 5 18일 화요일

보낸이 : 변철환

받는이 : 장영수 목사님

 

목사님, 언제나 정열적으로 목회에 임하시는 목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저는 재외국민보호업무를 맡고 있는 영사로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보면 늘 남의 일 같지 않고,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자연재해에 대한 종교적 차원의 관심과 의문도 일어나게 됩니다.

10여 년 전 제가 아이티에 출장간 적이 있었는데 지구상 최빈국의 하나인 불쌍한 나라였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 워낙 먹을거리가 없어 진흙으로 만든 쿠키를 아이들이 먹고 있더군요. 하나님을 믿는 카톨릭 국가이고 너무나도 불쌍한 이 나라에 20만 명이나 사망하는 가혹한 자연재해가 무슨 연유로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한다고 믿는 크리스천으로서는 이 재난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났다고 해도 문제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났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우하사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는 장면을 TV에서 볼 때 새삼 종교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징벌을 받은 것인가? 사실 대다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자신의 구미에 맞고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견강부회하고 있으며, 교회는 이를 은근히 조장하고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인간의 생사여탈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 난폭하고 변덕스런 마음으로 수십만의 피조물을 가볍게 몰살시켜버리는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진 사망자 대부분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가장이고,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요,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아들이 올라가서 놀고 있는 모습을 예로 들며 아바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쳐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으니, 그저 불문에 붙이고 믿으라고 합니다. 동의합니다. 다 알 수 없습니다. 처녀잉태와 부활의 과학적 논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과 모순된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교리체계와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해석논리를 포기해버릴 때 기독교는 미신이 되어버리고, 대중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릅니다. 인류역사에 명멸했던 수많은 종교들 처럼요.

혹자(국내 유수의 K교회 K목사 같은 분)는 이러한 재해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K 목사는 수년 전 아체 쓰나미 재해가 발생한 것을 이교도들과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휴양지에 있는 기독교도들을 징벌한 것이라고 강단에서 주장하더군요. 실소를 넘어서 절망감마저 느낍니다. 이런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성도들은 뭐가 되고, 인류구원의 숭고한 사명을 외치는 기독교의 수준은 뭐가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 속에 현대의 신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그 보편적 징후가 신에 대한 불문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신은 무지와 물질적 결핍 속에 생겨났으나, 과학적 풍요의 시대에서는 대중의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이겠지요. 저는 이러한 세태가 개탄스럽고 두렵습니다.

제가 위에 제기한 의문과 사용한 언어가 다소 불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시대에 만연한 불문에 저항하는 작은 몸짓이라 생각하고 목사님께서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고민에 대한 목사님의 지도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변철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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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 5 19일 수요일

보낸이 : 장영수

받는이 : 변철환 영사님

 

이렇게 편지를 주셔서 감사하고 교제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가족은 모두 건강하신가요? 진우 유학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주일성경공부를 열심히 참석하시고 진지하게 공부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참 기뻤습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분들에게도 도전과 자극이 되었을 테니까요.

먼저 진지한 물음을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쉽지 않은 물음이지만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이기에 솔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만물과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서 지어졌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일 텐데 재난이 하나님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물론 당장 눈앞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재난 속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흥분하며 감사하는 것을 신학적 잣대로 판단하기 보다는 우선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 공감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그 사람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것 같네요.

먼저 우리의 논의를 사건보다는 성경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구체적 사건은 너무 다양한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므로 개개의 사실에 매이다 보면 생각의 갈래가 흩어져 중심을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중심원리를 확인하고서 개개의 사건에 적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진노의 하나님이신가?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양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심판과 구원하시는 사랑이 함께 나타난 자리입니다. 진노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도 있지만 또 그렇게 출발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비유이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케네디 대통령과 그 어린 아들의 사랑스런 모습이 바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재난으로 죽은 자들은 그들의 죄의 대가로 저주받아 죽은 것인가? 그토록 가난하고 무지하다 못해 순박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인가?

먼저 죄에 대한 분명한 정의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미지)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만물과의 관계가 열려있고 온전한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으며 제한된 자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을 때 수고하며 고통 당하다가 끝내는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도덕적으로도 방황하며 살게 된 것이죠.

즉 죄란 도덕적 행위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 그 상태를 말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빈부와 지식의 유무를 떠나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 죄의 대가는 영적 무지로 인한 방황과 고통과 죽음입니다. (에베소서 2:1-3) 창세기 6장에서 노아 홍수 사건을 설명하면서 그 당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육체가 되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고깃덩어리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부동산 파동이 일어나면 늘 가장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난한 서민이듯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전쟁과 재난의 일차적 피해자가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재난 속에 하나님의 심판적 요소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욕망 속에 묻혀 죽어가는 인생을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길이지요. 그 재난 속에 죽든지 살든지 또는 소위 믿는 자든지 안 믿는 자든지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것이지요.

재난 속에 구원을 부르짖는 인생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의미와 무목적 속에 길을 잃고 헤매는 인생이거나 모두 자기의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새생명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고 그 은혜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지요.

2천 년 전 유대의 상황도 정치 사회 경제적 고통이 극심한 때였지요. 그 시대를 사셨던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 즉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따라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붙들어야 할 모습이지요.

예루살렘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제자들이 전할 때 (누가복음 13:1-5) ‘그 사람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말씀하셨지요.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소식을 듣고서도 그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한 줄 아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하셨습니다.

재난을 당해서 죽었건 그 재난의 소식을 듣고 놀라건 모두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설교 강단에서 쓰나미로 죽은 사람들이 죄 때문이라고 한 것 때문에 사회의 질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너무 거칠고 일방적인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죽은 자들을 매도하기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방향을 잡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모습대로 하나님과 열린 관계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살았어도 죽은 인생이겠지요. 사람이 자기 죽음의 실상을 깊이 발견하고 새 생명의 길을 찾아 살아가지 않는 한 살았다 한들 죽은 것이지요.

재난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을 하나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된 시각장애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저 사람이 눈먼 것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장애인이 되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이 눈먼 것은 그 자신의 죄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애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이적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믿는 자는 어둠 속에 헤매지 않으리라

알 수 없는 것은 묻지 말고 믿으라?’

알 수 없는 것은 최대한 알고자 노력해야겠지요. 한편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한계에 부딪치겠지요. 한계를 직면하는 순간 겸손하게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손에 넘겨 드리라는 말이지요.

물음은 신앙에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정작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면서 자라게 된다는 역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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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 5 27일 목요일

보낸이 : 변철환

받는이 : 장영수 목사님

 

존경하는 목사님

친절한 회신에 감사 드립니다. 진우는 미국에 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실 진우의 미국 유학문제로 고민이 많았고, “제가 믿음의 수준이 낮아 하나님의 뜻을 직접 들을 수 없다면 주변 상황을 통해 뜻을 알려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계속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난 3월 진우 엄마가 미국에 가서 현지답사를 하였는데 그간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이 확인되었고. 주위 지인들도 대부분 만류하는 충고를 해주어서, 이쯤에서 유학 추진문제는 접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진우의 대학진학 문제에 너무 강박관념을 가지고 무리한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돌이켜 보면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청소년 시절에는 부모와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여겼습니다.

막상 진우가 성인이 되기까지 가족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 부부는 마치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듯한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진우도 한국에서 잘해낼 수 있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며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이티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목사님의 답은 욕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 “진노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내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를 드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이티 지진에 이 명제를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악설에 바탕하고 있는 기독교 철학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이고 욕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계속 죄를 짓고, 이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직 어리석고 미숙한 자식들이 실수와 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반성하고 앞으로는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식들을 자애롭게 격려하는 부모처럼, 불완전한 인간들을 사랑으로 감싸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입니다.

아이티 희생자들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죄악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너무나 평범하고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흑인노예들의 후손이자 하나님을 믿는 카톨릭교도들로서 저마다의 소망을 가지고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갑자기 이들의 아내와 남편 아이들을 죽여버리고, 작지만 아담한 보금자리였던 집을 폐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영문도 모른 재난에 절망에 빠져 울부짖고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식에게 매를 들 수는 있지만, 짜증난다고 자식들을 몰살시켜놓고, 이것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겠습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부모는 진흙 쿠키를 먹는 아이에게 밀가루 빵이라도 사줄 수 있도록 수입이 좀 더 증가하기를, 아이들은 번듯한 가방을 메고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특별히 더 나쁘지는 않지만 다른 인간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너희들이 좀 죽어줘야겠다.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더욱 심한 가난에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하다면 과연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둘째, 과학과 신앙의 조화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대 중세에서는 많은 자연현상을 신의 노여움의 표시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일식, 월식, 천둥 번개, 지진 등을요. 그러나 과학에 의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밝혀진 지금, 과거의 그러한 믿음이 무지에 의한 미신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지진도 지구 대륙판의 이동과 충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특히 인도네시아의 경우 인도호주판과 유라시아판이 부딪히는 곳이라서 지진이 다발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인도네시아나 아이티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형성되어온 지구의 지질상의 특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오늘 그들 지역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앞으로도 이들 지역에는 지진이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과는 무관하게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생각한다면 미신의 암흑 속에 인류의 방황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망대가 무너진 현장에 가서 붕괴의 원인이 지난 3일간 내린 폭우로 지반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기둥이 불량재질이었는지를 분석하여 지반을 다지고 기둥재원을 변경하는 조치를 취하였기에 인류역사가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진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한다면, 지진 조기경보시스템을 구축하고, 건물에 내진설계를 하는 등의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징벌에 순응하지 않고 회피하는 불경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대로라면 바빌론 왕국의 침공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저항하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주장이 이 부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이 눈먼 것은 그 자신의 죄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도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성경말씀도 제 마음으로부터 공감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 사람은 운 좋게 예수님을 만나 개안의 이적을 경험하였지만 99.9%의 소경들은 절망과 탄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0.1%가 오늘날에는 육체의 눈을 잃고 난 뒤, 심령의 눈을 뜨게 되었다라고 교회에서 간증하는 사람들이겠지요.  예수님 시대에나 오늘이나 이러한 현실이 제게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기독교가 아이티 지진재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대다수 인간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 고대 중세의 무지랭이 농노들에게나 통할 사기를 아직도 치고 있느냐, 헛소리하지 말고 재난지역에 의약품과 식료품을 보내는데 동참하기나 하시오라는 일갈만이 돌아올 것입니다. 저로서도 지진이 신의 징벌이라는 시각은 번개가 제우스의 주 무기라는 고대 그리스 신화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목사님께 여쭙습니다. 혹시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연재해를 포함하여 예기치 못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아픔을 만져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신다. 더 나아가서 에덴동산에는 자연재난이 없었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자연재해는 기근 질병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겪어야 할 고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자연재해는 그 대상을 특정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보편적인 인류애를 바탕으로 이러한 기근, 질병, 자연재난들을 극복해나갈 때 지구는 에덴동산으로 점차 변해갈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지요?

물음은 신앙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격려해주신 목사님의 격려에 고무되어 다소 과격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부디 꾸짖지 않으시고 친절하게 지도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변철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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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 5 29일 토요일

보낸이 : 장영수

받는이 : 변철환 영사님

 

변 영사님 안녕하세요.

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진지한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질문에 저 자신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게 됩니다.

진우 문제를 잘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유학을 보냄으로 얻는 것도 있겠지만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주는 기쁨이 크다 하겠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얻는 기쁨이 넘치는군요.

계속된 물음에 대해 마지막에 하신 자연재해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한결 같다.’ 는 해석이 보다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공감합니다.

지난 편지가 다소 소극적 해석이었다면 이번 편지에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지 서로 큰 모순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상황은 늘 양면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진노조차도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임을 확신합니다. 그 구체적 상황과 해석은 때로 정확하지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아이티 재난의 원인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는 것은 그 재난 속에 심판적 요소도 있다는 것이고 그런 모습은 인간의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로운 욥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고난과 고통이 있었듯이 과학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잘 지적하셨습니다. 미국에서도 허리케인 피해 정도에 있어서도 보다 보수적인 남부지역이 중서부지역 보다 더 피해가 크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수적 신앙이 자연재해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소홀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혜 부족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분석과 대비는 필수적이지요. 그 결과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를 크게 줄인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한편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생명과 환경 속에 나타난 오묘한 이치를 더 깊이 깨닫게 되는 일 또한 부인할 수 없겠지요.

실로암 소경의 고침 받은 이야기에서 그 이적의 참 뜻은 물리적인 시력회복을 넘어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의 빛을 가리키는 사건이기에 표적이라고 구분해서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는 화니 제인 크로스비의 노래 가사가 제일 많습니다. 모두 23곡이 실려 있는데요. 그는 100여 년 전 미국에서 살았던 분으로 9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생후 6개월 만에 시력을 잃고 고생하던 중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믿고 한평생 주님을 노래하면서 살았습니다.

모두 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요.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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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신화인가요? 사실인가요?

 

날짜 : 2010 8 4일 수요일

보낸이 : 변철환

받는이 : 장영수 목사님

 

존경하는 목사님

저희 가족을 위해 소중한 저녁시간을 내어주신데 대해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은혜롭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2년간 목사님으로부터 신앙지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설익고 부족한 저의 신앙을 경솔하게 나타냄으로써 목사님의 마음을 무겁게 해드린 것 같아 마음이 다소 무겁습니다. 지금 저의 부족한 신앙만 보지 마시고, 믿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저의 의지도 함께 보시어 부디 계속 격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어떤 크리스천이 죽은 가족이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고 열흘 이상 장사 지내지 않고 기도만 하다가, 시체 썩는 냄새에 그 이웃이 경찰에 신고하였다.” 잊을 만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기독교 관련 가십의 한 유형입니다. 이를 접한 일반 크리스천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가, 부활하게 말이야!

둘째,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그걸 구분 못하다니 쯧쯧!

우리가 주일마다 외는 사도신경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에서의 몸은 예수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첫 번째 반응은 모순된 것이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반응 또한 불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예수님 이후 죽은 후에 부활한 사람은 없는데(임사체험을 한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우리는 왜 주일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를 앵무새처럼 외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좀 더 래디컬하고 불경한 질문을 드린다면, 죽은 몸이 반드시 살아나야만 합니까? 저는 이것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어 미이라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고대 이집트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어떤 차이점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인간이 죽음을 통해 흙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2. 신화와 팩트Fact

저는 CBMC 모임 시 목사님께서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이 천지창조 등에 대한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스쳐지나가듯 말씀하신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종교가 문화의 한 부분이고, 문화가 주변 지역과의 끊임없는 상호교류와 영향 속에 발전해 나가는 바와 같이, 다수의 학자들은 기독교의 천지창조,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등과 같은 개념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상당히 수긍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정통 기독교 목회자이신 목사님께서, 소위 모세오경의 일부인 창세기 천지창조의 개념을 모세보다 훨씬 후대인 바벨론 유수기간에서 기원을 찾으시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천지창조도,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고대에서 신과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개념은 그 시대 그 지역의 자연관,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자의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를 신화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화의 영역을 침입해 옵니다. 빅뱅이론 등 각종 물리학 이론을 통해 지구 탄생의 경로를 추적해가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20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20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5만 년 전) 유골을 방사성 탄소측정 등을 통해 인류기원을 찾아갑니다. 성경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 이래의 인류역사는 6,000여 년에 불과한데, 현존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최소 5만 년 전에 탄생한 것이 입증된 것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단군이래 우리 역사를 5천 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고조선은 기원전 10세기 경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움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기독교계의 각종 이론은 오히려 이러한 성경기록이 팩트가 아니고 신화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할 뿐입니다.

신화는 인류역사 이전 시대에 대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자가 있던 고대에까지 연장됩니다. 부여 금와왕이나 신라 박혁거세의 난생설화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새 시대를 열어갈 인물은 그 아비의 지위에 의해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므로, 그 아비가 없는,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탄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저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며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고 박해한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학문적으로는 상기 난생설화와 논리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경우 다윗 가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요셉은 예수님의 생부이기도 하고 또한 아니기도 한 모순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목사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내용들은 팩트입니까. 아니면 일부는 팩트고 일부는 신화입니까. 성경내용을 모두 팩트(Fact, 사건,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어차피 유한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은유와 상징이 필요하고 이것을 신화의 형태로 스토리를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지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내고 만나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이런 것들은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면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참 곤혹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불트만식으로 해석하신 정진석 주교님의 말씀에 저는 큰 위안을 얻습니다.

목사님의 지도 말씀 부탁 드립니다.

변철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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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 8 5일 목요일

보낸이 : 장영수

받는이 : 변철환 영사님

 

변 영사님, 메일 감사합니다.

지난 번 식사 모임은 참 즐거웠습니다.

진우, 선우는 다소 지루하지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입니다.

참 즐겁고 흥겨운 자리였고 한편 진지한 고민의 나눔터였습니다.

주신 물음을 받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몸의 부활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날 사건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8:29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녀 중 맏아들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의 현실을 포함한 하나님의 현실을 계시하는 책이므로 우리가 좀처럼 경험하지 못하는 일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부활한 사람이 없다는 물음에 대해서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직까지 우리 눈앞에 부활한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부활이 바로 이곳에서 오늘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의 약속과 다소 다릅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오듯 우리의 부활은 영과 몸의 새로운 변화와 더불어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하는 변화를 겪으리라 믿습니다.

마치 여러 종자()를 뿌렸는데 다양한 작물을 수확하듯이 처음 생각보다는 엄청난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전 15:35-44)

또 시간의 문제도 육체의 한계에 갇힌 우리의 경험과는 달리 영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상황이 될 터인데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 종말에 재림하실 때 살아남은 자와 먼저 죽은 자가 부활하리라 이야기합니다.

오늘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물리적 시간에 매여 있지만 성령이신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시에 서있는 모양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순서대로 일어나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한순간에 모든 사람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리라는 것이지요.

영적 존재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생을 갈구하게 되기에 적극적으로는 미이라, 피라미드와 같은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소극적(?)으로는 흙으로 빚어진 인생이기에 흙으로 돌아가노라 하겠지만 그것이 꼭 인간의 갈망 때문에 만들어진 영생이요, 부활이라기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준비된 인생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이 정교한 우주만물이 우연과 진화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오묘한 질서가 숨어있지 않습니까? 물론 진화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도 먼저 창조가 있고 그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집니다.

 

둘째, 천지창조와 창세기의 사건들은 신화인가? 사실인가?

유대인의 신앙 의식이 시대를 따라 발전해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원래 유대인의 모체를 이루는 히브리 공동체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유월절 사건은 히브리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사건이요, 정치 사회 경제적 사건입니다. 출애굽과 광야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 등 족장들의 신앙 전승이 체계화되어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되고 나중에 바벨론 포로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범우주적인 신앙고백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한 민족의 신앙이 전 우주적인 신앙으로 확대 발전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유대인들의 신앙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나 이미지가 결정되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따라 하나씩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눈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신화 또는 사실로 이분법적으로 보기보다는 사화史話, 역사적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뭔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뜻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을 개인과 공동체가 자기들의 표현방식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표현방법과는 많이 다르지만 어떤 실제를 경험하고 고백하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고고학, 물리학과 성경의 증언이 충돌되지 않고 서로 보완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역사, 과학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앙고백이요 증언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불트만식으로 역사적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도 않고 물을 필요도 없으며 다만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신앙 속에서만 살아있는 것이라는 태도는 아니지요. 그보다는 분명 역사적 사실이 있었으나 오늘 우리의 방식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여러 복음서의 이해를 주목해서 보면 서로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서, 예수님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복음으로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태어나 성장과정을 거치면서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일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신 후 자기 고향 나사렛에 가서 자신에게 이사야 61장의 예언, 즉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고 선포했을 때 고향사람들이 드러낸 반응도 이해가 됩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을 본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또 그러한 동네사람들의 반응에 놀라셨다는 기록(4:16-30 / 6:1-8)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나중에 쓰여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과 고백 모두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박혁거세의 난생설화와 비슷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스토리 속에는 무죄한 자로 오시기 위해 취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사실적으로 믿는 것이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9%가 일치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절묘합니까? 그런 능력을 가지고 만물을 지으시는 하나님께는 동정녀 탄생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부족하고 짧은 글이지만 신앙의 한 걸음을 내딛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편지를 성경에 포함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 분명한 이해와 철저한 헌신,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하는 자세야말로 건강한 신앙이라고 믿고 저도 그렇게 되기를 날마다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한없는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온전한 순종이 지극한 행복이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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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 8 5일 목요일

보낸이 : 변철환

받는이 : 장영수 목사님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한없는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온전한 순종이 지극한 행복이지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명으로 모든 의문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가야 할 큰 방향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느릴 수도 있지만 뚜벅뚜벅 전진하는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목사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변철환 올림

기독교 신앙의 역설

 

작년에 아프간에 갔던 선교 봉사팀이 인질로 붙들리고 또 그것이 온 국민의 염려와 관심과 주목거리가 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기독교 시민운동연합이라는 모임도 결성 되었습니다. 작년 말에 교회 연합회에서 그 대표를 초청해서 강연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허구라는 것이죠. 구약성경은 중동의 히브리인들의 종교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가지고 있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인양 미화한 것이다. 그 좋은 예로 아담은 언제 사람이냐. 궁금하죠. 성경에 나와있는 연대를 역산 한다면 대략 기원전 4,000년경 이런 답이 나오죠. 과연 그러하겠느냐. 그럼, 노아의 홍수는 언제냐. 이것도 계산해 보면 기원전 2,400년경, 그렇다면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죠. 허구라고 하는 것이죠.

두 번째,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을 지적합니다. 교리에 관한 문제죠. 다른 종교, 다른 문화를 우상숭배라고 얘기하고 사단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 것과 또 역사 속의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과거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나왔던 수많은 선교 활동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불상이나 단군상이나 장승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합니다.

세 번째로는 기독교의 도덕성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일부라도 이미 거대한 기업이 되었다는 거죠. 그리고 강단에서 나가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영합해서 세상에서의 물질 축복만을 강조하는 것과 교회가 커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는 성장 지상주의, 또 거대한 건축물과 그것을 위한 헌금 강요, 그 중심에 서 있는 목회자들의 부패와 타락의 현실, 이것은 천민 자본주의다. 기독교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것이죠.

이렇게 결론을 내려요. 기독교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왜 그러냐. 그것은 원초적으로 허구이기 때문이다. 개혁 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건 종교 사기극이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이고 헛된 교리다. 오늘날 기독교는 목사들의 생계수단이요, 성공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렇게 비판합니다.

아마 여러분 마음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실 거예요.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가지 대목에 대해서 하나하나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연 구약 성경은 허구인가.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러분, 성경에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과학적인 내용도 있어요. 그렇지만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에요. 과학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만났노라고 고백하는 간증집 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내가 만난 하나님이에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을 만나주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을 통해서 기록이 되었어요. 그래서 오류가 있어요. 연대와 이름이 틀리기도 하구요, 같은 내용이 중복돼서 나오는 본문을 비교해 보면 많은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또 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본으로 계속 복사될 때, 빠뜨리기도 하고 중복해서 넣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기에 오류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목적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는 구원을 고백하는 책이기에 내가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연대가 조금 틀리고 숫자가 좀 틀렸다고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남자분들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마는 제가 평생 저희 아버님에게 편지를 딱 한 번 받아 봤습니다. 군대 갔을 때. 모처럼 어머님의 성화에 아들에게 편지를 쓰셨겠죠. 편지를 받아 봤는데 옛날 분이어서 그랬나요, 맞춤법이 많이 틀려요.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성경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고 하는 고백이에요. 맞춤법은 틀릴 수 있어요. 연대는 틀릴 수 있어요. 혹 이름은 틀릴 수 있어요.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마음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경 창세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계사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어요. 특별히 창세기 천지창조나, 아담의 이야기나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모세의 출애굽 사건은 대체로 기원전 1,200년 경 당시 이집트  왕의 이름과 서로 연결해서 흔적을 찾아냅니다. 거기까지는 세계사의 역사와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사건부터는 정확한 고증과 연대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들의 신앙고백과 전승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의 천지장조의 예를 들면 칠일간 창조했다, 그 칠일을 정말로 칠일로 해석할 것이냐.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연대 중에는 세계사와 일치하는 부분까지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의미를 담아서 설명하는 거예요.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결정적인 오류는 성경에 나와있는 연대를 오늘의 시간 계산방식대로 계산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많은 오류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HOW라고 하는 물음보다 WHY 왜 이것을 말씀하셨는가, 왜 이 사건을 일으키셨는가 하는 그 의미를 찾아야 되는 거죠. 성경에서 의도하는 것은 그 역사적 연대를 정확하게 밝히려고 하는데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이런 사건을 일으키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하는 거죠.

20세기에 으뜸가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해석을 빌린다면 창세기의 사건은 사화(史話)라고 얘기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돌아 옵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자기 나름의 왕국을 건설했어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건설했어요. 그것을 자랑했어요. 뽐냈어요. 그러나 그렇게 자기 만족에 빠질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기 시작했어요.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지고 그들은 다 포로로 끌려갑니다. 바벨론이라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에 붙들려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해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우리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앙 고백을 새롭게 가지게 돼요. 창세기 천지창조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 강 사이에서 늘 홍수의 위협 속에 살던 바벨론이지요. 그들의 창조 신화, 다신교 사회의 신들끼리의 전쟁, 해와 달과 별을 신으로 모시는 그들의 신앙을 거부하면서 해와 달과 별을 말씀으로 만드신 하나님, 원초적인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신이 될 수 없는 그런 신앙고백을 하는 거죠. 특별히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물을 나누지 않습니까. 궁창을 만들어 물을 나누고, 물을 모아서 바다라고 하는 것은 늘 홍수에 시달렸던 바벨론 사람들의 염려와 근심을 넘어서서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물론 성경의 기록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 것이죠. 그건 뭐예요. 인간의 오류를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속에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만남이 있다고 하는 고백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에요.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경 안에는 오묘한 일이 있어요. 우리의 이성으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사건이 있어요. 그거는 하나님 손 안에 있는 거예요. 그거는 인간들이 노력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고 밝혀지겠죠. 그러나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 다 밝혀질 수는 없을 겁니다. 성경에 있는 신비한 일들을 우리가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채로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오묘한 일은 하나님 손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낸 일이 있어요. 그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어요. 그 말씀들은 의심할 바 없어요. 말씀을 받아 들여서 순종하고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두 번째는 흔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렇게 전도하죠. 표현은 거칠어요. 그리고 독단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다면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 교리적인 문제예요. 요한복음 5 39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은 곧 나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드셨어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어요. 첫째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어요. 그런데 둘째가 좀 망나니였어요.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에게 나눠줄 유산을 미리 나눠 주십시오.’ 그런데 아버지가 아무 말하지 아니하고 한 몫을 나눠줍니다. 그걸 가지고 아버지와는 연락도 되지 않는 먼 나라로 가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 다 털어 먹고 거지가 돼서 돼지 치는 자가 되고 고생을 하다가 다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오면서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용서를 빌리라.’ 그리고 이제는 내가 아들이 아니라 그저 나를 아버지 집의 수많은 품꾼 중 하나로 써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리라하고 돌아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저 멀리 희미한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반갑게 뛰어 나옵니다. 아들이 나갔던 그 날부터 기다렸던 거죠. 그 아들을 끌어 안습니다. 목욕을 시킵니다. 새 옷을 입힙니다. 새 신을 신깁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웁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으래요. 잔치하는 거예요. 돌아온 탕자예요. 그런데 이 풍악이 울릴 때 밭에 나가 일하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이 소리를 듣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종에게 묻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는데 아버지가 너무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만 꼭지가 돌았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아버지에게 가서 따집니다. ‘아버지 재산을 절반이나 가지고 나가서 창녀와 다 털어 먹은 저 놈이 돌아 왔는데 벌을 주지 아니하고 어찌 저 놈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까. 이 날까지 나는 열심히 일했건만 아버지 밑에서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하나 잡지 않으시더니 어떻게 저런 못된 놈을 위하여 이런 사랑을 베풉니까. 이거 너무 불공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는 돌아온 탕자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집에 남아 있는 큰 아들 탕자를 얘기하는 거예요. 큰 아들도 탕자에요. 둘째는 밖에 나가서 길 헤매다가 털어먹고 온 탕자지만 그보다 더 큰 탕자는 집 안에 있었던 탕자에요. 그게 뭐예요. 율법주의자를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이만큼 내 동생과는 근본이 다르다. 이만큼 성실하고 이만큼 열심히 노력하노라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됐어요. 나는 다르다. 그러나 여러분, 아버지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너나 네 동생이나 내가 생명으로 너를 낳았노라. 예수님의 의도는 율법주의자야말로 천국 문을 가로막는 사람이다 라고 말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 받는 것 아니에요.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 그 생명을 내어 놓으시는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러므로 구원은 생명이에요. 그래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도를 닦고 마음을 비우고 수련을 하고 심지어는 고행을 하고 금식을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거예요. 큰 아들과 같은 거예요. 그러나 원초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해요.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어요. 인간의 모습과 행위로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그걸 아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어요. 그러기에 예수만 믿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거는 생명의 사건이기 때문이에요. 그걸 놓쳐서는 안돼요.

그래서 사단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할 때에 시험하지 않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보라인간이 가장 매이는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이니까. 그럴 때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한번 뛰어 내려 보아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적을 보고 당신을 높이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때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께 우리는 순종할 뿐이지 하나님을 내 멋대로 시험해서 안 되는 것이지요. 또 온 천하를 줄 터이니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라고 말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 오직 우리의 예배와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간혹 우리 주위에 무당을 비롯해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봐요. 그게 우리의 영적 현실이에요. 그러나 더 무서운 사단의 역사가 있어요. 예수님이 받으셨던 시험 가운데 나타나 있어요. 멀쩡하게 공부했습니다. 자기 의지도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목적이 빗나갔어요. 하나님이 지은 인생이건만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그저 떡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말씀 속에 있건만 알지 못하게 해요. 속이는 역사죠.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를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도덕성이에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돼요. 의롭게 살아야 돼요. 거룩하게 살아야 돼요. 깨끗하게 살아야 돼요. 그래서 교회의 도덕성에 대해서 비난하는 모든 비난은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돼요. 그 사람들의 비난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에요.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부분에는 뼈를 깎는 회개를 하면서 받아들여야 해요. 상식을 지켜야 해요.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식구들은 시간을 잘 지켜요. 남의 시간을 빼앗는 거는 남의 목숨을 빼앗는 거잖아요. 사람을 한 시간씩 기다리게 하면 어떻게 해요. 더구나 공적인 약속들은 철저하게 지켜야죠. 그래서 예배도 시작도 지키고 끝도 지켜야죠. 또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돼요. 사실은 우리보다 더 성실하고 진지한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좋은 것은 다 배워야 해요. 존중해야 돼요.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가기 위해서 직분대로 각자 최선을 다해야 돼요. 목사도 월권하지 말고 직분에 맞는 일을 하면 돼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게 목사의 일이에요. 교회가 하는 구제와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은 장로와 집사와 권사, 많은 분들이 역할대로 은사대로 나누어서 하면 되는 것이죠.

이제 상식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상식을 넘어서서 거룩한 낭비가 필요해요. 많은 수고가 필요해요.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데 한 두 마디 말로 되는 거 아니에요. 기도가 있어야 되고 섬김이 있어야 되는 거죠.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요. 남편 없이 아이를 홀로 기르는 어느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구겨진 4달러를 들고는 아기 분유를 사러 왔어요. ‘하나 주세요.’ 했는데 그만 그게 7달러 60센트에요. 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힘없이 돌아섭니다. 주인이 그것을 제자리에 올려놓다가 슬쩍 떨어뜨렸어요. 분유 통이 떨어 졌어요. 한쪽이 찌그러졌어요. 그때 주인이 말합니다. ‘이런 거는 반값이에요.’ 그리고 4달러를 받고 오히려 거스름돈을 20센트 내줍니다. 아이 엄마는 자존심에 상처 받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분유를 한 통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 가게 아저씨는 3달러 80센트로 천국을 샀다는 거예요.

여러분, 베풀어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좀 손해 볼 줄 알아야 해요. 거룩한 낭비에요. 성경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됩니다. ‘敬天愛人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한마디에 말씀의 모든 뜻이 다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나누고 베푸는 삶.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셨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 자손의 몫이다.’ 우리가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게 건강한 신앙이에요.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에요. 창세기가 어떻게 됐느냐 아는 것도 필요하죠. 우리는 이성적 존재니까. 그러나 공부해도 모르는 부분은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에요. 나중에 천국 가서 하나님께 직접 물어 보세요. 그리고 오늘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말씀,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     2008 1 27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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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회개>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표준새번역 구약 욥기 42 : 1-6)

 

 

<헌신의 잠언>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주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잠언 30 :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