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병든 자를 데려오라[목사님부친 시신기증,장영수목사도 시신기증 예약등록]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10. 28. 00:18

060409 병든 자를 데려오라                                        설교집 Ⅱ<마음을 시원하게> 2-18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11.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4:15-24)

 

며칠 전 뉴스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폐암환자가 수술을 받았는데 그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나와 보니 오른쪽에 암이 있는데 왼쪽 폐를 건드리고 거기서 양성종양을 제거했다. 그래서 다시 오른쪽의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었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습니까? 얼핏 관찰해보니 암 조직이나 종양이나 비슷하게 생겼나 봅니다. 제대로 인수인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아주 큰 사건이지요.

그러나 사실 전 그 뉴스를 보면서 순식간에 제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렇지 않은가? 통계에 의하면 절을 다니다가 교회에 온 사람도 많지만 교회를 다니다가 절에 간 사람도 많아요. 왜 그랬겠습니까? 뭘 제대로 알았어야 했는데 그저 사람이 모이고 일하다가 여러 가지 상황과 갈등과 문제를 가지고 또 떠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생명을 잃는 것 아닙니까?

흔히 기독교 신앙은 현대인의 교양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해요. ‘여러 종교 중에서 그래도 가장 세련된 종교가 아닌가?’ 또는 현대사회 속에서 성공의 지름길 아니냐? 강남에 사는 사람들 50% 이상이 기독교인 걸 봐서도 아마도 현대인이 부를 누리며 이 세상에서 인생의 성취를 누리기 위해서는 종교를 선택한다면, 기독교를 선택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그건 잘못 생각한 것이지요. 신앙은 마치 무슨 심리학 조사라든지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하는 자기 성장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이지요. 하루에 몇 번 웃는다든지 여러 가지 처방을 얘기합니다. 모두가 다 유익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갈 악성 암과 같은 것이지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신앙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박완서씨의 신앙묵상집이 있습니다. 그 글 중에 우리 안의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라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아기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아기 예수를 닮았는지요? 인종이나 피부 빛깔, 성별까지도 초월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덕담이 저절로 나옵니다. 대통령감, 장군감, 재벌감, 박사감 아닌 아기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 이조차도 내 아기가 장차 예수님을 닮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남의 아기는 몰라도 내 아기만은 예수님처럼 살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아기들은 태어날 때, 아기 예수를 닮게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닮은 어른은 참으로 드뭅니다. 있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용의주도하게 죽였으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느니라.”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故김형곤씨가 시신을 기증하는 유언을 남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골수기증, 장기기증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님도 10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시신기증을 하셨습니다. 저도 그것을 지켜보면서 , 나도 해야겠다.’ 저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전면허증 뒤에 이 사람은 시신기증자입니다. 연락처 아주대학병원 몇 번.’ 혹시라도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면 곧바로 연락이 갈 수 있도록. 그러나 사실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회풍토는 아직 미성숙한 것이지요. , 살아있는 사람을 기증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몸을 가지고 쓰겠다는데 사실 주저할 게 뭐가 있습니까?

신문보도에 의하면 간이나 신장을 이식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만 15,300명이랍니다. 누가 그걸 기증하기를 절박하게 기다리는 거예요. 3년 이상 된 사람이 7,000명이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싸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물건이 없어서 중국에 연결해서 중국에서는 매년 사형수들이 15,000명씩 죽어나가니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간이나 신장을 이식하는 사람이 1년에 1,000명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절박합니까? 신장이 고장난 사람은 신장을 갈아줘야 되는 거죠. 그것도 자기하고 맞는 그런 여러 가지 조건을 다 테스트를 해서 합격해야 되는 것이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은 죽어서 그 몸을 내어주신 거예요. 사실은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의도적인 자살을 하셨다고 할 수 있어요.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생명을 내어주시기 위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할 그런 존재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리해서 안 되는 거예요. 부속품만 갈아 끼워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수술해가지고도 안 되는 거예요. 생명과 생명을 맞바꿔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노인대학을 운영하다 보니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니까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시더라고요. 어제도 한 분이 노인대학에 나오셨었는데 병석에 오래 누우셨다가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시한부 인생이에요.

지난 1992년의 종말론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몇 년 전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갔습니까? 결국 마지막 D-day, 마지막 시간이라고 할 때는 막 TV에서 중계를 하고 했습니다만 화면에 비친 그 사람들의 모습은 굉장히 절박했습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을 이식 받아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같이 아주 상황이 절박했어요. 사실 그렇게 빠져들어간 사람들을 비난하고 야단할 것만 것 아닙니다. 어찌 보면 뒤에 물러나 있던 사람들은 넉넉하게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만한 믿음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고 있었을는지도 몰라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상황은 절박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삶의 생각과 자세가 달라질 거예요.

예수님은 말하지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부자가 말합니다. “이제 내 영혼아, 몇 년간 먹을 것을 창고에 가득 쌓아두었으니 이제는 먹고 쉬고 마시고 즐기자.” 그날 밤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불러간다면 네가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수리하거나 수술하는 게 아니에요. 그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는 사건이 필요했다. 그것은 곧 나를 위한 사건이요, 내가 죽고 다시 거듭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왕으로 오신 주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맞이했다 해서 종려주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새사람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진정한 변화는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변화의 중심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 삼성SDI-옛 삼성전관이라고 하는 회사죠. CEO를 지냈던 손욱이라고 하는 사장이 쓴 책입니다. 그는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경영품질제도인 ‘6 시그마를 도입해서 크게 성공시킨 그런 성공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잭웰치라고 하는 이름을 얻고 있습니다.

이분이 삼성에서 인사발령이 나서 이 회사의 사장이 됐어요. 다른 사람들이 참 출세했다고 축하를 합니다. 모두들 그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 회사를 맡고 나서 경쟁하는 일본, 대만 업체와 그 여러 가지 소비자시장을 다 조사한 결과는 겉에서 본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이죠. 문제가 심각했다는 거죠. 아직은 자그마한 수익을 내고 있지만 더 이상 가다가는 일본과 대만 사이에 끼여서 완전히 추락할 수밖에 없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대로 회사를 다 털어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요. 지금 회사의 분위기는 이제 막 내리막을 들어선 거예요. 큰일 난 거죠.

그런데 임원들을 비롯해서 전 직원들은 전혀 위기의식이 없어요. 급히 임원들을 소집해서 지금 회사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러자 총론에 있어서는 다 같이 위기라고 하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각론에 있어서는 다 제각각 이에요. 그 때 이분이 느낍니다. ‘, 위기는 우리 안에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아갈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맘과 생각과 그 모든 것이 모아지지 않고 있구나.’ 그러면서 한 순간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이분이 한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소망을 얻습니다. 일본사람들은 그런 회사를 보면 말하기를 보석이 깔려 있는 산이다.’ 왜 그러냐? 보통회사들은 이미 다 완벽한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손댈 데가 없어서 더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렵지만, 역발상으로 생각해보면 이 회사는 문제가 많으므로 그런 문제들을 손대어 고치기만 하면 그것은 곧 다시 새로운 이윤이 되고, 회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이분은 소망을 가져요. 그러면서 변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제 변화를 시도하는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변화를 안다는 것과 구체적으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다르죠. 사실 예수 믿는 것 중에 제일 어려운 부분은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모르는 게 문제의 시작이긴 하지만 교회 한 3년 정신 차리고 다니면 알만한 건 다 알아요. 실천이 문제죠. 사실 고난주간입니다만 공교롭게 내일은 공휴일이에요. 마호멧 생일이에요. 그러니 누가 그러더라고요. 아주 모처럼의 황금연휴라 놀러 간다고. 그렇게 되면 어떡합니까?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거기에 몸을 담고 실천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변화의 문제는 회사를 변화시키려고 해도 CEO의 임기가 대체로 짧은 거죠. 이분도 관례상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년이다. 3년 안에 변화의 틀을 완전히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한 교회에 오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고 성장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통계적으로 보면 성장하는 교회의 첫 번째 공통점은 목사가 오래 교회를 지키는 거예요. 자주 바뀔 때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이분이 자기의 모든 환경을 놓고 전문컨설팅 업체를 초빙해서 같이 의논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놓습니다. 소위 빅뱅 전략입니다. 이게 뭐 부분부분을 고쳐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시스템 전체를 고쳐야 되는 거예요. ‘빅뱅이라고 하는 거죠.

신앙에 있어서 근본은 우리끼리 재미있게 우리끼리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아가자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가정에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으는 교회가 아니고 흩어져 나아가는 교회. 그래서 제가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자카르타의 3만 명 모두는 지금 당장 교회를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관계없이 다 우리 식구입니다. 다 우리 가족입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 귀에 복음이 들려야 하고 언젠가는 그 사람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하고 언젠가는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오는 것 가지고는 도저히 다 안 되는 거죠. 한국인의 인적 네트워크는 3.5명이라고 해요. 더구나 자카르타 같이 좁은 데서는 그저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면 모든 사람을 다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는 여러분이에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받은 바 은혜를 가지고 여러분의 입술로 여러분의 고백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해내야 하는 것이죠.

또 하나 일십백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물건을 만들죠. 기획단계에서 잘못된 것은 1달러면 고칠 수 있다. 실행단계에서 잘못된 것은 10달러가 들어간다. 그러나 물건이 나온 다음에 고객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하면 그때는 100달러로 메꿔야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죠. 오늘 우리가 온전히 예배 드리고 정말 나 하나가 올바로 변화되면 내 아내가 행복해지고 내 자녀가 행복해지고 내 직장이 행복해지고 걸음걸음마다 행복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변화는 늘 나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저도 늘 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의 변화는 그저 저부터 시작입니다. 우리가 좀 일이 잘 안되면 괜히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야단하게 되잖아요. 부질없는 짓이다. 은혜 받으려고 나온 사람 뭐 하러 야단하나. 하나님이 오늘 내게 주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잘 간직하고 그것을 붙드는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이죠.

또 이 회사를 운영하는데 건의가 들어왔어요. 폐수처리시설을 두 배로 늘려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전문가를 불렀어요. 다시 한번 파악했어요. 그가 내놨습니다. ‘사장님, 제가 다 확인해보니까 폐수를 줄이면 됩니다. 시설을 늘리자고 할 게 아니라 폐수를 줄이면 됩니다.’ 사실은 우리 신앙은 많은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화려한 성전 안에서도 어두운 생각, 메마른 심령이 있어요. 정작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거예요.

또 규칙대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와서 일을 하던지 그 규칙을 따라가면 완벽한 품질의 물건이 만들어집니다. 제가 며칠 전에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있었어요. 금요일 구역예배를 갔습니다. 좀 멀어요. BSD에 사시는 분 집으로 갔어요. 11시 반까지 구역식구들이 모여야 되죠. 그 구역은 넓어가지고 사방에서 와야 되는데 제거 그곳에 딱 도착하는데 그 정문 앞에 차가 나란히 서있는데 다 우리 교회 차예요. 그리고 그 집 앞 차들이 정확하게 11 29분에 나란히 쫙 섰어요. 그렇지요. 시간을 지켜야 되요. 사실은요 남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남을 기다리게 합니까? , 남의 아까운 시간을 내가 임의로 빼앗습니까? 서로 시간을 지켜줘야 되는 거예요. 시작도 같이하고, 끝내기도 같이하고,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정확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그래서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식구들이 시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지키라고 해요. 그러니 들어가는 걸음부터 은혜가 되잖아요. 서로가 좋잖아요.

이 회사에서 개혁을 마치고 초일류 회사가 됐잖아요.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해요. 천지개벽할 일을 천차만별의 사람이 모여서 천방지축 천신만고 끝에 천우신조로 해냈다.” 똑똑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표현한 걸 보니까. 그러면서 혁신이 이렇게 어렵고 일이 이렇게 엄청난 것을 알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는가를 알았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매여 산다면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는가를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 결혼잔치에요. 주인이 초청을 했는데, 소를 사서 못 갑니다. 밭에 나가봐야 되니 못 갑니다. 나 장가들었으니 못 갑니다. 물론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나 보세요. 자기성취와 자기계산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복음 되지 않아요. 그래서 종에게 말합니다. 거리와 저 울타리로 나가서 저는 자, 병든 자, 눈먼 자, 이런 자들을 데려오라. 무슨 뜻입니까? 잔치에 초대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그 사람들에게 뜻밖의 초청이에요.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서 그 잔치를 누리고 먹고 마시고 기뻐했다는 거예요. 은혜를 은혜로 받을 줄 아는 자들이에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가 이만큼 이루었습니다 라고 하는 이런 자랑스러운 성취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멍들어 있는 죄와 수치와 연약함에 매여있는 너의 내면을 가지고 나오라. 사람은 속이 건강해야 되잖아요. 제가 며칠 전에 어떤 현지 분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래요. 그런데 입고 다니는 것은 꼭 가난뱅이 수준을 겨우 벗어났어요. 털털한데 엄청난 부자라는 거예요. 제가 그랬어요. “넥타이 매고 다니는 사람이 가난하구나.” 완전히 거꾸로 됐어요. 여러분, 죄와 수치와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고치시는 거예요.

사울은 학문을 하고 종교적인 열심이 있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스데반을 만나는 순간에 그는 흔들렸습니다. ?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했어요. 그러나 자기는 분노와 살기가 등등했어요. 누가 이기고 누가 진 겁니까? 도대체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다니, 이미 사울은 거기서 무너진 겁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비밀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날마다 죽노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나는 이제 날마다 죽노라. 나의 허물 많은 부질없는 옛사람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생명으로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사실 이건 우리의 믿음을 넘어선, 넘쳐나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 많이 들리죠? 그러나 지구 돌아가는 소리는 우리 귀가 감지할 수 없습니다. 너무 소리가 커서.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소리도 못 들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조절해놓으셨어요. 너무 큰 사랑이기에 우리의 자그마한 자기계산으로는 자기믿음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는 생명의 은총이 내게 있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너의 연약한 그 자리에 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다.’ 이런 은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맞이하는 첫날 종려주일입니다. 참으로 고난의 깊은 의미, 그 피 흘리심의 진정한 생명력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깨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부활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