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자국-오영재(1990)우리 가족 이야기
내가 어렸을 때 조선지도를 그려보던 생각이 난다. 학교에서 지리 숙제로 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슨 생각이 나서 한번 그려보자고 했던지 나라의 모양을 난생처음으로 종이 위에 옮겨본 일이 있었다. 명산들과 도시를 표시하고 그것을 철도로 련결시킨 다음 차례로 내려오면서 이름들을 적어놓기 시작했다. 백두산, 금강산, 신의주, 편양, 원산……, 노래로 불리던 산과 강들, 소설책들에 그려지던 도시들이었다. 나는 이제 크면 한 번 가볼 수 있겠는지……, 문득 이 이름들 앞에 생각을 멈추어 본 것은 꿈같은 유년 시절의 한갓 호기심일 뿐 사실, 이 이름들은 자기와 이렇다 할 인연을 가지고 련결된 것이란 없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고 38선이 가로막혀 그 이름들이 이북으로 되어버렸을 때 한 번 가볼 수가 있겠는지 하고 생각했던 그 기대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땅에 나는 들어와 있고 그 40년간 여기서 살며 오늘은 광복 거리의 새집에서 만경봉과 잇닿아 있는 푸른 야산을 서재의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남해 바닷가의 옛 고향과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은 너무도 예상치 않게 이 몸을 여기에 실어다 놓았다.
운명의 전환 사람들이 나에게 나서 자란 고향이 어딘가고 물을 때 잠시 망설이게 되는 것은 어느 고장이라고 딱히 찍어야 좋을지 그 대답이 난감하기 때문이다.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는 아버지가 자주 전근하였던 관계로 우리 가정은 한곳에 정착하여 살지 못했다. 나의 출생지는 전라남도 장성이라고는 하지만 함평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강진에 와서는 중학교에 다녔다. 7남매라는 무거운 가정의 짐을 싣고 달구지 바퀴 자국이 고달픈 생의 굵은 주름처럼 파인 산골 길을 힘겹게 끌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청빈한 교육자의 가정은 나에게 이렇다 할 희망도 포부도 줄 수 없었다, 너무나 씨앗이 자리를 가려, 비옥한 땅을 골라 떨어질 수 없듯이 척박한 땅에 떨어지고 만 나의 생의 씨앗은 삶의 터전도 향방도 미처 잡지 못한 채 소년 시절의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함평군 학교면 월송리의 미처 잡지 못한 채 찍혀진, 나의 나막신 자국과 강진의 탐진강 강가에 찍혀진, 형이 신다가 물려준 헌 고무신 자국이 장차 어디로 뻗어 나가게 될지 그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운명에서의 사변적인 전환이 그렇게도 일찍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1950년 내가 열여섯 살 때 조국 해방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인생의 청년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나는 인민군대에 입대하였고 거창한 전쟁의 밀물은 해변의 작은 모래알과도 같은 이 내 삶을 전혀 다른 대안으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삶의 첫 씨앗이 떨어졌으며 나를 낳아 길러준 부모님들과 나의 어린 시절이 절은 고향 땅은 한 나라를 남과 북으로 부르는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영영 갈 수 없는 곳처럼 되어버렸으며 세계를 크게 둘로 갈라놓고 있는 두 제도의 축소판이 된 이 땅은 사상과 리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이란 핏줄을 잇기를 그처럼 바라건만 오늘까지도 나는 부모·형제들의 생사여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밤중에 평양역에 사변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살아온 50여 평생, 쌓인 추억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군사복무를 마치고 내가 제대되었을 때의 일이다. 제대증을 받아든 나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남들은 부모·형제들이 반기는 제 고향에 가게 되었다고 기뻐들 했지만, 나에게는 불비를 겪으면서도 살아서 돌아오는 아들을 반겨줄 부모도 친척도 단 한 사람 여기 북녘땅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 나는 자기 한생의 끝까지 몸에 붙이고 갈 직업을 선택하여야 할 시각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에야 깨달음이 미치는 것처럼 부닥친 그 순간엔 언제나 현명하지 못한 법이며 더욱이 그때의 나의 경우, 사회생활에 대한 리해와 지식이 너무도 박약했던 관계로 각이한 목적지로 향하는 렬차들이 저만큼 승객들을 부르는 인생의 플랫폼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올라탄 차 칸이 평양시 서구역 건설 뜨레스트 로동자의 배치장을 쥐여준 평양행 렬차였다. 밖에서는 늦가을의 찬비가 뿌리고 있었다. 빗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차창 가에 앉아 나는 난생처음으로 가슴을 저미는 고독을 체험하였으며 분렬의 비극이 나의 일신상에 주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반겨줄 사람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는 곳, 어린 시절 조선 지도를 그리며 연필로 그 이름을 적어본 것밖에 없는 평양, 그곳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 어떤 인생행로의 발자국이 그곳으로부터 이제 어디로 찍혀져 갈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나를 싣고 렬차는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함께 렬차에 올랐던 전우들이 도중 역들에서 내렸다. 그들에게는 맨발로 달려 나와 안아줄 감격적인 혈육간의 상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손을 놓지 않고 자기 집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간절히 권할 때마다 그들의 진정이 눈물겨웠고 그렇게 전우들이 내 곁에서 하나둘 사라져 갈 때마다 나는 고독의 심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드디어 홀로 남아버린 나는 한밤중에 평양역에 내렸다.
시인으로서의 첫 길 고향에서 중학교만 다닐 때만 해여도 나는 특별하게 문학에 뜻을 두어 본 적도 없었고 농촌집의 사랑방에 굴러다니는 소설책들을 흥미 삼아 주어 읽은 것밖에 어린 시절부터 문학의 토대를 닦은 것도 없었다. 격렬한 전쟁의 날 『전선문고』로 중대마다 배포되곤 한 박세영, 조기천, 민병균, 김조규 등 시인들의 시들이 나에게 준 충격이 나로 하여금 시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하였고 시를 습작해 보고 싶은 의욕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제대될 때까지 신문과 잡지 등 출판물에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시인이 되리라고는 감히 생각을 못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 독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그런 시인들과 건설장에서 위생기구를 달고 좁은 삐뜨 안에서 난방관을 조립하는 나의 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개인적인 후원도 받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의 로동 생활에 지금 감사를 드리고 있다. 로동의 벗들과 집단은 내가 그토록 아쉽게 떠나온 중대 생활의 향취와 정신적 안정을 이내 다시 재생시켜 주었고 인민의 창조물을 일떠 세우는 벅찬 로동 생활은 나에게 군무 생활에서와는 또 다른 생의 의미와 결렬한 시적 흥분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설날 새벽이면 눈 덮인 홍부동 고개를 넘어와 합숙에 홀로 있는 나를 깨워 집으로 데려가던 작업반의 아바이들, “로동자 시인”이 나왔다고 끼니때마다 남달리 반기며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더 놓아주고 싶어 하던 마음 어진 식당의 어머니들……, 그들이 얼마나 따사로운 손으로 나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고 생의 기쁨을 안껴 주었는지 그들 자신도 다 몰랐을 것이다. 작가 동맹에서는 나에게서 그 어떤 재능의 싹을 보았는지 나를 작가학원에 입학시켜 주었고 이때로부터 나는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전문교육을 받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내가 보호자가 없는 무의무탁생이라고 하여 로동 현장에서 받던 로임보다 더 많은 장학금을 주었고 매해 무상으로 겨울옷과 여름옷을 주었다. 너무도 뜻밖에 차려진 일들로 하여 어리둥절해 하면서 어떻게 날과 달이 흘러가는 줄 모르고 향학열의 불길 속에 몸을 던졌던 그 시절은 또한, 눈물도 헤픈 시절이었다. 장학금과 의복을 받을 때도, 출판물에 실린 내 시를 볼 때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후더워났다. 어느 봄날 학급에서 만경대로 야유회를 갔을 때 몇 잔 술이 주는 흥분으로 자제력을 잃어서인지 나의 눈물은 그만 울음으로 터지고 말았다, 나는 만경봉으로 푸른 잔디에 뒹굴며 두고 온 어머니를 찾으며 아이처럼 울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생활은 고향의 부모들에게 알릴 길이 없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의 울음이었고 이제야 이 북녘땅에서 부모와 형제를 대하여 주고 있는 이 나라 제도에 대해 고마움의 눈물이었다.
세월도 못 실어가는 것 남해 바닷가에 떨어졌던 한 생명의 씨앗이 여기서 그 뿌리를 깊이 내리는 세월의 년륜을 감기 시작하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렇게 나는 분렬로 하여 가정을 잃었던 홀몸이 새 가정의 호주로 되었다. 그리도 사무치게 가슴에 맺혀 있던 사연도 세월이 흘러가고 생활 처지가 달라지면 가끔 잊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만하면 때 없이 두고 온 혈륙들에 대한 생각으로 목이 메이게 되는 일들이 닥쳐오곤 하였다. 국가에서 주는 표창들, 돌려지는 온갖 배려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자식의 마음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은 어머니의 품이 아니었는가. 어머니처럼 자식의 기쁨을 그 어떤 사심도 없이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세상에 또 있으며 자식의 괴로움을 어머니처럼 몇 배로 하여 가슴을 태우는 사람 또 있으랴. 50년 그 여름 탱자나무 울타리 곁에서 어머니와 헤어지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나는 어머니와 마치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척 집에나 다녀올 듯이 헤어졌다. 어머니도 나도 한두 달이면 내가 돌아와 학교에서의 공부를 계속하게 되리라고 여겼었다. 어머니 등 뒤의 70이 넘은 할머니만이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훔치고 계셨다. 애지중지 키운 손자를 이제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은 그 어떤 예감에서였는지 아니면 리별의 감정이 맹목적으로 불러일으켜 주는 늙은이의 헤픈 눈물이었는지……. 어머니를 나는 그 후 다시 한번 뵈올 기회가 있었다. 강진을 떠나 장흥군의 대화국민학교에서 의용군 훈련을 받고 있을 때 한 살짜리 막냇동생 영숙이를 업고 나를 면회하러 왔었다. 아침부터 떠나 70리 초행길을 8월의 폭염 아래 병약한 몸으로 온종일 걸어 해 질 무렵에야 훈련소의 정문에 이르렀었다. 단 몇 분 밖에 면회시간을 허용하지 않은 훈련소의 규률이었지만 보초 장에게 고생스레 걸어온 길을 상기시키면서 어머니가 사정을 했던 들 우리의 만남은 더 연장될 수 있었고 잠시 앉아 다리 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에게 구차한 소리를 할 줄 몰랐다. 성한 너를 보았으니 이젠 마음이 놓이고 잠이 올 것 같다고 하시면서 선 채로 돌아서시었다.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먼지 낀 신작로로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어머니의 흰 저고리를 학교 마당 가 한 그루 은행나무 밑에서 바라보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생각해 보면 다심한 그 사랑에 오히려 짜증만을 내던 집에서의 그 버릇대로 나는 집을 멀리 떠나가 있는 이 마당에까지 온몸으로 기울여주는 그 사랑을 몰라 주는 이 불효자식에게 그 어떤 섭섭함도 원망도 없이 웃으며 떠나간 어머니가 어쩐지 측은하게만 여겨졌다. 변변히 잡수도 못하고 걸어왔을 그 걸음, 날은 어두워지는데 밤길 70리를 이제 어떻게 가시려는 가. 이 생각은 그날에 비로소 자식으로서 어머니에게 비춰보는 첫 감정이었고 어머니를 위하여 흘려보는 첫 눈물이었다. 어머니를 만나본 그 짧은 순간이나마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눈물을 보여주며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나에겐 가장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순정을 기울여 고백했더라면 밤길 70리를 돌아가는 그 마음이 얼마나 즐거웠으랴. 아 그랬던들 어머니와 생리별을 당한 지 40년을 헤어져 살고 있는 지금, 이내 마음도 이렇게까지는 아프고 괴롭지 않으리라. 생일날 아 참이면 나는 안해와 아이들의 축배를 받는다. 그 술잔을 들여다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지만 그런 날 아침이면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시루떡을 내 상 위에 따로 놓아주던 어머니……. 비록 기나긴 세월을 헤어져 살아오지만, 어머니는 어느 한 해도 빠짐없이 내 생일을 잊지 않고 내가 없는 나의 형제들-승재 형님과 동생들인 형재, 근재, 홍이(창재), 필숙이, 영숙이를 한 두리상에다 불러놓고 없는 내 자리까지 시루떡을 놓아주며 “오늘이 영재 생일이다.”하시며 눈물을 지으시리. 그러나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 그대로 나는 지금 어머니의 생일이 봄인지 가을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자기의 생일을 상기시킨 적이 없었으니 어찌 어머니의 생일을 쇠 본 기억인들 있을 수 있으랴. 어머니의 생일을 알고 있다면 비록 곁에 계시지 않아도 어머니가 저 남쪽 땅에서 그렇게 하고 계실 그것처럼 나도 생일상을 차려 놓고 “애들아, 오늘이 너의 할머니 생신날이다.”라고 말해 줄 수 있으련만 그 생일을 어디다 물어보며 대줄 사람 또한 어디 있으랴. 어머니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은 제가 제 자식을 키워보며 나이 드는 세월만이 이렇듯 때늦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인가. 생각도 많은 섣달 그믐날 밤을 보내고 새해의 아침을 맞을 때면 나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남쪽 하늘을 향해 세배를 시키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배받으십시오.” “통일되는 그날까지 오래오래 살아 계십시오.” 남쪽으로 끝없이 열린 허공간을 대고 단 한 번 본적도 없고 애무에 넘친 그 무릎 위에 다른 집 애들처럼 앉아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며 안해의 두 눈에도 소리 없이 더운 이슬이 맺힌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 한 살을 더하게 될 부모님들의 년세를 헤아려 본다. 우리가 헤어질 때 아버지의 년세는 마흔여섯이었고 어머니의 년세는 살 흔 일곱이었다. 그 나이에 갈라져 산 세워 40년을 합쳐보며 그 어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찢는 것 같은 모진 아픔을 느낀다. 어떻게 지금껏 살아 계시리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세월은 내 가슴을 피가 흐르도록 찢어발기며 또 한 해를 보낸다. 이 세상에 이런 아픔을 누를 그런 기쁨, 그런 행복이 있을 것인가. 있어야 할 것이 없어 그것으로 하여 언제나 비어 있는 마음의 이 공허를 그 어떤 행복이 황금의 소나기처럼 쏟아진대도 과연 메꿀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그 아픔을 더해 줄 따름이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지금은 여든여섯이 되고 일흔일곱이 되셨을 부모님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어떤 상상력과 령감이 기적처럼 내 머리에 번개 친다 한들 40년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변해버린 부모님들의 얼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내 눈앞에 지금의 나이보다 거의 10년 아래인 아버지 모습, 거의 20년 아래인 젊은 어머니 모습만이 그 모질고 무정한 세월도 실어 가지 못하고 그날처럼 사랑에 젖은 눈매로 나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까지는 직업적인 창작의 길에 들어선 지도 어언간 30년이라는 세월이 된다. 이제는 내 나이도 50대의 고갯마루 위에 올라섰다. 갓 태어난 첫딸 혜심이를 병원에 안고 광장을 가로질러온 그때가 어제만 같은데 지금은 벌써 평양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식료기사로 일하고 있다. 맏아들이 설약이도 평양연극영화대학 창작학부를 졸업하고 한 중앙기관의 지도원으로 사업하고 있다. 둘째 아들 설림이는 인민군대에 나가 있고 막내딸인 은하는 평양 사범대학을 지금 다니고 있다. 저녁이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요즈음에 쓴 시들에 대한 의견도 서로 나누고 저마다 자기의 전망과 목표를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화목하고 단란한 나의 집, 독립적으로 떼어놓고 본다면 나는 남 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고 나 개인을 놓고 볼 때에도 별로 창작에 이렇다 하게 세운 공로는 없지만 수많은 높은 훈장과 함께 공화국의 최고상인 ‘김일성상’을 수여 받는 무상의 영광까지 지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기서 마련한 가정을 단 한 번도 옹군가정(?)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혈육이 갈라져 있는 분렬된 땅에서 나의 가정도 역시 분렬된 가정인 것이다. 아이들도 이제는 다 커서 내가 이날까지 가슴에 지니고 살아온 그 아픔을 서서히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륙감으로 느낄 때마다 생각이 깊어진다. 그 어떤 표상도 없는 아버지의 고향이며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혈육들이지만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제13차 청년 학생축전이 있은 후 진행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하여 쓴 시의 초고를 본 아이들은 20대, 30대에 쓴 시들보다 조국 통일을 갈망하는 시인의 절절한 감정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 비판은 나로 하여금 분단 조국의 제2대로서 민족 숙원의 무거운 짐을 자기들의 어깨로 스스로 걸머지려는 자각을 다시금 보게 하며 결코 그렇게 되지 말기를 굳이 바랐건만 그것이 엄연한 사실로 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을 다시금 통감하게 한다. 25년 전 내가 쓴 어느 시에서 경상도가 고향인 친구의 어머니가 고향에 두고 온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지 못하고 운명한 사실을 말하면서 이런 기막힌 불행이 우리 세대에는 절대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며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토로했었다. 그러나 설마 그렇게까지 료원하랴. 생각했던 통일은 내 머리가 백발로 되어가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오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고 우리 세대에 기어이 벗어버려야 할 통일의 짐을 아직도 진 채 내 삶의 발자국은 80년대도 다 보내고 현세기의 마지막 연대인 90년대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다. 1995년 조국이 분렬된 반세기가 된다. 우리는 절대로 이 90년대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되며 또 넘길 수도 없다. 그날에 나의 발자국은 내 어린 시절 찍힌 함평 땅 월송리의 골목길과 탐진강 강가와 다도해의 모래불에 찍혀져야 한다. 나는 그날을 믿으며 통일을 념원하는 온 민족이 단합된 힘으로 그날을 기어이 찾고야 말 것을 굳게 믿으며 몇 해 전 소련에서는 가족 휴양을 보내던 그 나날 흑해의 모래불 위에서 쓴 ‘나아 발자국’이라는 한 편의 시를 수기의 마지막에 적어본다.
모애불에 찍혀진 발자국을 본다 한 생의 행로가 이어져 오는 나의 발자국
어린 날에 맨발로 내 고향 남해의 기슭에 찍혀졌고 락동강의 불타는 모래불을 거쳐 비 내리던 전호에도 새겨져 있는 나의 발자국
영예의 연단에도 올라서 보았고 발밑에 천 길 나락이 아찔한 위험한 삶의 벼랄 끝에 놓이기도 했던 발자국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흐느끼며 오십여 년 살아온 세월 내 안 가본 길이 없는 그 발자국 어찌 알았으랴 오늘은 이 흑해의 모래 위에 찍혀질 줄을
하나 흑해여, 알아다오 너를 찾아 모여드는 수많은 휴양객의 발자국과 결코 섞여질 수 없는 이 내 자국임을
나의 발자국 지워질 수 없게 찍혀져야 할 그런 땅 그런 모래불이 나에겐 따로 있나니
위대하고 영광이 찬 빛발을 안고 내 어린 시절의 작은 자국 위에 큰 자국을 덧놓아야 할 그곳은 내 고향의 바닷가 통일된 남해의 모래사장이어라.
오영재: 1935년 전남 장성군 출생, 강진에서 성장. 평양 작가학원 졸업. 시집 『행복한 땅에서』, 서사시 『대동강』, 『철의 서사시』 외 수백편. ‘김일성 상’ 수상 계관 시인. 이 글은 1990년 통일예술 창간호, 도서출판 광주에 실린 글이다. 혹 남한의 가족이 이 글을 읽고 자기 생사를 알아주기를 바라서 쓴 글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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