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나의 문학, 나의 신앙우리 가족 이야기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으로 등단 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모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솔직히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글짓기 시간에 ‘부채가 만들어지기까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담임선생이 나를 부른 뒤 원고용지에 이 글을 옮기게 한 일이 있다. 얼마 뒤 초등학교에 전국적으로 배포되는 신문에 내 글이 컷과 함께 실린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쓰는 재미, 발표되는 기쁨, 인정받는 즐거움을 느꼈었다.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에 당선 되었을 때도 나는 수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 문학개론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즉, ‘문학이 무엇인가?’도 모른 채 글을 써도 된다는 전매특허를 얻은 셈이다. 그 뒤 나는 <백양사 기행>이라는 글을 써서 한국일보에 투고 했는데 퇴짜를 맞았다. 지면은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었다. 만 1년 만에 현대문학에 『해고』라는 단편을 발표하게 되었다. 나는 왜 글이 쓰고 싶은가? 인간에게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의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될 때에 더욱 이 진실을 세상에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소설은 쓰고 싶은 단순한 동기였다. 그러나 내가 발표할 지면을 얻었다 할지라도 독자를 얻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독자는 내 호소에 대한 응답자들이다. 어떻게 독자와 만날 것인가? 독자는 제2의 창조자라는데 생면부지의 내 호소를 듣고 내가 만든 세계에 들어와 줄 리가 없다. 다행히도 당시는 필자와 독자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있었다. 그것이 매달 일간지에 실리는 ‘이 달의 소설’, ‘이 달의 문제작’ 등이었다. 내 첫 작품이 실린 뒤 평론가 백철 선생은 <다시 인간조건에의 실망>이라는 제목으로 내 작품을 평해 주셨다. 끝에는 ‘특히 끝의 죽음 장면에서 먼저 나오는 어머니 이야기와 경찰관을 안내한 우연적인 상치의 허구는 <사르트르>의 『벽』 끝 장면을 연상케 했다’는 과찬을 해 주셨다. 그 뒤로 현대문학, 월간문학, 사상계 등에 투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밤늦게까지 수학 과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중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운명적 소설가는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기독교학교, 교회, 그리고 가정에 얽매어 기독교인으로 살다보니 스케일이 좁아지고 상상의 나래가 내 주변의 체험세계를 넘지 못하게 되었다. 점차 자신의 신변에만 시야가 좁혀진 관조(觀照)에 묻히게 되었다. 따라서 3인칭이면서 1인칭 소설과 같은 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사소설 영향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사회성을 배제하고 오직 작가의 사생활을 다루며 무조건적 자기 폭로로 높은 도덕적, 윤리적 평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보는 부조리를 폭로하여 독자와 함께 고민해 보자는 호소가 들어 있었다. 최근에는 내가 기독교에 심취하게 되면서 ‘교회 생활을 이렇게 해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나의 신앙 부분에서 더 이야기 하려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문제가 생겼다. 지금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재자가 없어지고 높은 담이 생긴 것이다. 작가와 작품은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속도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서면서 SNS외 유튜브에 맛들인 젊은 세대들은 귀에서 이어폰을 뗄 줄 모른다. 그들은 종이 책을 앞에 놓고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들어와 거기서 자신과는 다른, 또는 제2의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재창조하는 독자는 될 수 없게 되었다. 영상매체가 그들을 자극한다. 영화는 몰려온 시청자를 상대로 작가가 의도한대로 청중을 끝까지 끌고 갈 수가 있다. 그러나 종이책은 그런 면에서 무력하다. 하물며 그들이 작가가 창조한 진실 속에서 작가가 호소하는 깊은 고뇌를 나눌 생각이나 할까? 먼저 방어하고,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상으로 움츠려들면 그만이다. 그들은 작가로부터 한 없이 자유롭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끝까지 끌려가지도 않거니와 책을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요즘 세대의 독자는 생각하는 것이나 고통을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생각은 네가 하고 어떻게 하라.’고 말만 하라고 한다.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이것이 정보기술시대에 모든 문학인들이 당면하는 괴로움인 듯하다. 만일 지금도 계속 써야 한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임을 자인하고 소명감을 가지고 돌진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문학’의 변이다.
기전여중·고교 교사시절 세례 받다 여기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1960년까지 나는 당시 유행했던 사르트르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실존은 본질을 선행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에게 참(眞)인 명제였다. ‘모든 피조물은 목적이 있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간은 목적 전에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그래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 책임 하에 내가 길을 찾아 걸어가야 한다. 신이 목적이 있어 인간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거기다 나는 수학을 하는 과학도였다. ‘2+2=4’는 만인이 인정하는 객관적으로 참인 명제(命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참이다.’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과학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명제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한때 조선대학교 부속 중학교에서 글짓기 강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학교는 재정이 매우 열악하였다. 얼마 되지 않은 강사료를 3개월이나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사회는 어수선했고 교사들은 가정방문으로 대통령 후보 선호도에 대한 여론조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교사들은 국·영·수 부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판매하고, 다방이나 술집에서는 큰소리로 시국비평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정말 짜증나는 때였다. 그때 나는 전주의 기전여중·고에서 교사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이제는 국어가 아닌 수학을 가르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가뜩이나 그곳은 미국인이 교장이어서 나라에서 간섭이 심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원 서류에 세례증이 있어야 했다. ‘나는 재수가 없는 놈.’이라고 술만 마시고 있는데 한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걱정 말라고 했다. 며칠 후 그는 세례증을 하나 만들어왔다. 그것으로 나는 미션학교에 취직을 하였다. 행복은 잠깐이었고 고난과 회한이 시작되었다. 아침 경건회 시간마다 기도를 해야 했고, 교회에서는 인재가 왔다고 중등부 교사가 되어야 했고, 끝내는 성가대원까지 동원되었다. 나는 일 년 뒤 크리스마스 때 그 성가대장이 속한 교회의 목사 사택에 가서 나 혼자서 골방에서 죄를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다. 그 때가 나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주의 미션학교에서의 3년간은 내가 살았던 세상과는 완전히 격리된 삶이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친구도 부모 친척도 없는 곳에서 아침 경건회를 위해 모범 기도문을 외우고, 교회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구약 성경을 독파하고, 성가대 베이스 파트를 맡아 다른 파트의 음정을 들어가며 제대로 합창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떤 외부에서 온 큰 힘이 나를 그곳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과학에서는 모든 물질계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 가는 것(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은 바뀔 수 없는 진리였다. 그런데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생명력을 나는 기독교에서 느꼈다. 기독교에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안방에서 자기 이름도 없이 두문불출 갇혀 살던 여성이 푸른 눈의 선교사를 만나자 장님 같던 눈이 뜨이고, 숙식할 쌀을 들고 집을 나와 성경을 배우고 전도부인으로 마을마다 가정집을 찾아가며 말씀을 전했다. 백정이 양반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종이 먼저 장로가 되어 주인을 계도했다. 기독교 학교에서 글을 배우던 청년이 개화해서 외국에서 학문을 익히고 돌아와 3·1운동을 주도하며, 해방이 된 뒤는 공산권과 사회주의 국가에 밀리지 않고 자유대한민국을 세웠다. 이것은 혁명적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 아니라 감소하는 방향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명제를 참이라고 믿고 생명까지도 바치는 세계가 있다. 이것은 과학이 말하는 세계를 초월하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계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다른가? 방황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그 속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는 일이었다. 누가 기독교인인가? 분명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그의 삶의 모든 면에서 이 세계관이 베어나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럼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기독교의 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세상과 다른 색깔로 보이기 시작한 세상을 보고 그것이 기독교 세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주관을 버리지 못한 색 안경의 착시현상이다. 내가 내 속에서 생기는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음란, 호색 등을 다 죽이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나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내 주관을 떠난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보는 일이다. 먼저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가 된 자, 병든 자… 들을 예수처럼 보게 되면 그런 사람을 기독교 세계관을 가졌다고 말한다. 세계관을 가지면 그것이 기독교인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서 하늘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죄로 혼돈해진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한 질서의 세계로 회복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이 다스리는 백성들의 모임을 확장하여 예수님이 재림할 때 육신을 벗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닦고 나가야 한다.
오늘의 교회를 걱정하는 ‘답답한 심정’이 나의 신앙 나는 1972년부터 3년간 집사(執事)로 2, 3, 4대 대전노회 평신도연합회(선교회) 회장을 한 일이 있다. 당시는 전국에 평신도회가 조직되지 않아 평신도회 조직을 하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밤 집회를 하고 다녔다. 그 때는 회장이 권력도 명예도 없고 고생만 하는 것이어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3대나 계속했던 것이다. 사실은 회장이 되려면 적어도 장로라야 한다는 것 때문에 초대회장은 내 집 가까이에 사는 장로를 추대하고 내가 실무를 담당했다. 평신도회란 교회 안에서 잠자고 있는 무한한 인적자원을 동원해서 그들이 제사장이 되어 가정, 직장, 사회를 성령의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교회마다 목사의 반대가 심하였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성경말씀으로 평신도가 세상에서 제사장 노릇을 해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것인데 목사는 “평신도가 다 제사장이면 나는 무엇이냐? 이것은 목사에 대한 반역이다.”라고 반대하는 것이었다. 신학교에서는 ‘평신도학’을 개설하고, 또 ‘평신도훈련원’이라는 것을 만들어 신학생, 교역자, 장로들을 많이 계몽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또 ‘여 평신도회’는 끝까지 만들지 못했다. 여 신도들은 그러지 않아도 교회에서 전도를 잘 하고 있는데 웬 평신도회냐며 끝까지 평신도회의 조직을 반대했고, 지금도 여신도는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를 고집하고 있다. 남자 쪽은 ‘평신도회’를 받아 드렸으나 지금은 그 명칭을 남선교회로 고쳤다. 어떻든 그들은 ‘평신도회’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에 방어벽을 쌓고 세상에 나가 전도해서 교인을 교회로 데려오는 일에 열중했으며 성령의 능력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진취적 길로는 나가지 못했다. 이것이 천국을 확장하는 기독교인가 하고 많이 생각했다. ‘기독교’ 하면 교회를 생각한다. ‘교회’하면 그에 속한 교인과 목사, 또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 장로와 권사를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지고 이 지상에 와서 그는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고 자기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사명을 다하고 돌아가셨다. 승천하면서 자기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은 “너희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나처럼 십자가를 지고 본을 보이는 삶을 살다가 천국을 확장하고 내게로 오라. 천국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준 사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기독교는 세상으로 나가는 열린 길을 거부하고 세상사람 불러 교인 수 획장에만 힘을 쓰는 ‘성 쌓기 운동’만 하고 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유대교처럼 율법에 갇혀 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오직 전도해서 교인을 교회에 유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참 기독교는 세상을 개혁하는 힘이 있다. 성령의 폭발로 기적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는 제도 속에 갇히고, 교파는 늘고 교파마다 신학교를 만들고 거기서 길러진 교파별 신학생들은 꼭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다투고 있다. 공급 과잉이 된 신학생은 예수처럼 세상에 나가 살면 안 되고, 꼭 교회를 세워 목사가 되어야만 하는가? 이것을 보고 있는 내 답답한 심정이 현재 ‘나의 신앙’이다. 2019년 <창조문예 11월호에 실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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