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독자가 없는 기독교문학-기독교 문학의 방향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2. 13. 17:26

독자가 없는 기독교문학-기독교 문학의 방향|소설, 콩트, 에새이, 칼럼

은혜 | 조회 75 |추천 0 |2019.12.02. 15:41 http://cafe.daum.net/seungjaeoh/J74U/86 

 


요즘은 작가는 많은데 독자가 없다. 독자 없는 작품을 꼭 써야 할까? 독자도 없는데 기독교문학의 방향은 또 어디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

논리학에서 ‘A이면 B이다.’가 참이면 그 대우 ‘B 아니면 A 아니다.’는 참인 명제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은, 문학이다.’가 참이면 문학이 아닌 것은 기독교문학도 아니다.’는 참이다. , 기독교문학을 말하려면 먼저 그것이 승화된 문학 작품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신앙 간증을 쓴 글, 선교를 목적으로 쓴 설교, 성서를 근거로 많은 성구를 인용한 자기주장 등이 문학 작품으로 인정되지 못할 때는 이는 문학이 되지 못하고 기독교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문학이란 호교적이라야 하며 하나님의 지상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정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독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독자를 비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비기독교인은 치를 떨며 읽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면 이것도 잘못이다. 그들은 이미 구원의 방주에 앉아 있으며 그 책은 자기에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담임 목사의 설교만 듣고 그대로 사는데도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목사는 예수와는 반대로 사는 분이라고 말해도, 심지어 이단이라고 말해도 우리가 좋다는데 웬 간섭이야.”라고 설교에 순종하고 천국 가려고 결심한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자가 없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럼 기독교 문학은 무엇인가? 기독교문학의 방향은 어딘가? 를 생각해야 하는데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이 없다. 함께 모색해 보자고 제안할 수밖에 없다. 먼저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문학>,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문학>, 그리고 <기독교문학의 독자> 이런 순서로 이야기하고 기독교문학의 방향을 함께 생각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1.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문학

서상윤이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의 도움으로 1882년 쪽 복음을 한글로 번역하여 입국한 때부터 기독교 문화는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1800년 말까지 많은 미국이나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학교와 병원, 그리고 교회를 세우면서부터 기독교 문화는 서양 문화로서 기존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한국 문화는 유교와 불교였는데 기독교는 안방에 있는 아녀자를 밖으로 불러내 한글을 가르치고 조신한 아녀자가 아니라 전도부인으로 활동하게 했다. 백정이 양반과 한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해서 수직적, 계층적 유교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또 다른 신들은 부정하고 유일신인 하나님 한 분을 주장함으로 기독교 문화는 불교나 토속 종교에 배타적이었다. 심지어 조상숭배나 제사까지 부정해서 유교 문화에는 큰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가난하고 독재정권하에 불안했던 백성들은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와 예수는 가난한 자의 친구이며, 믿는 자에게 복을 주며, 병자를 고쳐 준다며 부흥회 등을 통해 전도가 시작되자 한동안 그들은 광신자가 되었다. 1970년대에 기독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실제 금연, 금주, 근검절약, 새벽기도, 부흥회 등의 광풍으로 생활이 나아지고 정신적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 소득이 점차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 1970년 초기는 새마을 운동 등으로 산업화,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점차 생활이 나아지고 있었다. 기독교 문화가 정착되기까지 있었던 갈등은 김동리의 무녀도에서도 볼 수 있다. 무당 모화로 대변되는 전통문화와 아들 으로 대변되는 기독교 문화는 서로 갈등하며 결국 둘 다 죽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또 임영빈의 목사의 죽음은 폐병으로 10년을 앓다가 하나님 은혜로 살아난 부흥 목사가 꽤 큰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다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 멍석을 깔고 목소리라도 들으려 한다. 목사는 새벽기도에 피까지 토했는데 저녁 집회에는 더 많은 사람을 초청하라고 한다. 통성기도 때 청중들은 소리쳐 울고 바닥에 자빠져 황홀경에 빠진다 이런 사이에 목사는 펑 쓰러진다. 목사는 들려서 밖에 나가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결국, 목사는 순직하고 자기는 소원을 하나님 뜻대로 이루고 간다고 아내에게 말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한다.

그러나 위 작품에서 보여준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기독교의 부흥이 아니라 결국, 우상을 배격하던 기독교가 토속 종교인 무속신앙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문화의 확산과 뿌리내리기가 아니라 토속신앙과 영합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문화가 우리나라에 제대로 정착했다면 온 국민이 기독교 가치관을 공유하며, 삶에 변화가 생기며, 이에 따라 놀이 문화가 생기고, 함께 즐기는 축제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한때는 독립투사나 선각자들이 이 문화 요람에서 활력을 찾기도 했다. 당시 교회는 2%였는데 독립투사는 30%가 기독교인 출신이었던 갓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서양 종교라고 배척받는 상황에서 기독교 문화는 세상으로 나와 다른 문화를 포용해서 상생하지 못하고 교회에 갇히거나 기독교 율법 속에 갇혀버렸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도 기독교 문화의 축제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묻혀 불교와 유교만큼도 그 문화는 생활화되지 못하고 있다.

황금찬 선생은 2005년 기독교 문인 협회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기독교문학과 신앙 문학>을 주제로 말하면서 지금 기독교문학이란 말이 있고 또 활동하는 시인, 작가들이 있는 나라는 이 세 나라(한국, 일본, 대만)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는 불교문학, 유교문학이란 명칭이 없다. 한용운 선생이 쓴 시도 북교문학이라고 차별하지 않는다. 유교와 불교는 이미 우리나라에 생활화되고 있는 문화기 때문이다. 서구에 기독교문학이란 명칭이 없는 것도 그들의 문화는 이미 기독교 문화가 생활화되어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이 생기를 얻으려면 먼저 기독교 문화가 토착화되어야 한다.

 

2.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문학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세상을 보는 관점, 혹은 지각의 틀,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 삶에 대한 시각을 말한다. 그럼,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상식적인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탐욕스러운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나서 내 안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말한다. 무로부터 유를,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말한다. 세상 창조를 믿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아담)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cultivate) 하시니라(3:13).”라고 말한 문화명령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가난한 자, 병든 자, 핍박받는 자에게 먼저 가야 한다. 불의를 용서하는 자비가 있어야 한다. 또한, 신판 주 하나님과 천국의 소망으로 인내하며 극복하며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목표를 찾는 사람이라야 한다. 또한, 기독교 문화로 세상을 바꾸는 자라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유일하지 않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자기 안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세계이기에 기독교 세계관은 각각의 지문만큼 다양하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생 개개인의 삶의 지표이다. 그런데 육체를 가진 누가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 세상의 가치를 따라 그대로 살 수 있는가? 권세, 명예, 탐욕, 등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어디 있는가?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인 개개인이 이 세상과 몸부림치며 갈등하고 사는 고뇌 속에 있을 뿐이다.

소설가 한길언 교수는 기독교문학의 특성을 6가지로 간추렸는데 그중에 기독교문학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 기독교 문학 작품에 기독교 세계관이 암암리에 드러나 있지 않으면 기독교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기독교 문화라는 토양에서 피어난 꽃이 기독교문학인데 그 꽃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향기가 풍겨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분들은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인이 갖는 시각이기 때문에 기독교문학은 기독교인이 쓴 글이라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모든 기독교인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그것을 삶의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고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성수주일(聖守主日)하고, 십일조 잘 내고, 날마다 감사 생활을 하고 있으면 죽어 천국에 가는 것 아니냐고 안일하게 말하는 분들을 숱해 보았다. 그들은 예수처럼 살겠다고 날마다 입으로는 외치는데 막상 예수가 그들 곁에 살면 많이 불편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다. 한편 교회에서 강요하는 종의 멍에를 메기 싫어 교회를 기피하는 가나안(안 나가) 교인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이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삶으로 천국을 확장하고 그 속에 안식하고자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쓴 글만이 기독교문학이라는 주장은 누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기독교인인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기독교문학의 독자

작가가 창작해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자기 분신과 같은 생명체다. 일단 생명체가 탄생하면 작품은 작가를 떠나고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어떻게 작품의 생명은 유지되는가? 공감을 얻은 독자를 통해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말이 목까지 차오르고, 파수꾼의 다급한 위기감으로 말을 토해냈는데 막상 독자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날에는 독자가 없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간한 <문예연감 2017>에 의하면 2016년 문예지 수는 670종이라고 한다. 이 문학잡지사가 그 한 해에 펴낸 잡지는 1800 여권, 그 속에 수록된 문학 작품은 14만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1919창조가 발행된 이래 100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문예지가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이 작품들의 독자는 몇이나 될까? 안타깝게도 문학 수업을 받는 문예창작과 학생들조차 안 본다는 말이 있다. 사실 문화예술위원회가 연 9억여 원을 지원하는 51개 문예지도 정기 독자를 빼고, 유통을 통해 서점에서 팔리는 책은 200권이 되지 못한다니 거의 독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 이 많은 잡지사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월간조선 20185월호에 실린 글(진퇴 기로에 놓인 문예지 시장)에 의하면 재정난으로 등단 장사를 하는 잡지사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치어까지 싹쓸이해서, 등단시킬 문인도 씨가 말랐다고 한다. 이렇게 작가는 몸통이 커졌는데 독자는 없어 세상에 나온 새 생명은 <베이비박스>에 넣어 보육원에 버려지는 실정이 되었다. 실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독자는 개성적이며, 직관적이고, 영상매체에 길들어 종이책을 싫어한다. 1시간 이내에 읽을 수 있는 짧은 내용의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을 선호한다. 그런데 필자를 포함한 한국의 많은 작가는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회원 끼리끼리 읽자고 자기네 문학 모임의 기관지에 마구 작품을 양산한다. 지금 독자들은 작품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사이버 공간에 떠다니는 매체를 통해 공유하려 하고 있다. 서가에 책을 꽂아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작가는 출판사를 통해 자기가 쓴 글들을 모아 단행본을 내려고 한다. 그러나 출판사는 사명을 가지고 어떤 작가를 끝까지 길러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 책을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는 나름대로 사활 작전을 펴고 있다. 한국 출판 저작권 연구소가 2018년에 낸 통계에 의하면 주요 단행본 출판사 25곳 중 매출은 있는데 영업이익 적자를 내고 있는 곳은 4곳이었다. 여기에 군소 출판사는 말할 나위가 없다.

외국의 어떤 서점은 시리즈로 1시간 이내에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매주 연속물로 내는 출판사도 있다고 한다. 이런 전략 없이는 앞으로 출판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다. 또 홍수처럼 흘러들어오는 책들을 큐레이트(수집, 분류, 구조화)해서 독자들에게 맞춤형 책을 소개하는 일을 하는 출판사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출판사가 생긴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끝으로 필자의 일화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필자는 문학 작품은 아니었지만, 기독교 간증집을 10여 년 전에 낸 적이 있는 출판사가 있다. 얼마 전 그 출판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책이 남은 것이 있는데 폐지로 버려지게 되었으니 필요하면 싼값으로 가져가라는 연락을 해왔다. 성의껏 샀는데 그 책을 받아 보면서 내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을 보는 느낌이었다. 결국, 필자는 독자 없는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파수꾼이라고 생각하고 목에까지 차오른 소리를 내어 외쳤는데 광야의 소리에 그쳤던 것이다. 지인에게 독자 없는 글을 써야 할까? 하고 물었더니 화가가 봐주는 사람 없다고 그림을 포기하겠는가, 음악가가 청중이 없다고 노래를 그만두겠는가 라고 말하며, 독자가 없다고 글 쓰는 것을 그만둘 셈이냐고 말했다. 좁은 소견으로는 기독교 문학을 계속하겠다면 기독교라는 접두어를 빼고, 문학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의 향기를 풍기며, 기독교 문화를 확장하는 데 일익을 감당하겠다는 소명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제 39회 문학사랑방에서 -2019.11.29, 대전 반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