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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자살은 없다 / 신영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2. 13. 16:56

[세상읽기] 자살은 없다 / 신영전

등록 :2019-12-11 18:16수정 :2019-12-12 15:32

 

신영전 ㅣ 한양대 의대 교수

“자살은 없다. 타살이 있을 뿐이다.” 트리올레의 이 말에는 각주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살을 받아들인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존중이 그를 죽음으로 몬 이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살아 있는 자는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 죽음은 늘 아픔과 친하고 꽃은 무리지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말하기로 했다. 그 죽음의 가해자를 찾아 고발하기 위해서다.

먼저 간 이들은 누구인가? 가해자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떠나간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보다 간절하게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었던 자들이다. 그렇기에 네크라소프의 독백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 불의하고 추악한 세상을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무관심과 무감각이라는 병에 감염되어 이미 죽은 자다.” 먼저 떠난 이들은 이 병에 ‘감염되지 않아 아파했던 자’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돌을 향해 다시 산을 내려오는 시지프의 뒷모습에서 영웅을 보았던 카뮈는 자살이 패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당한 신의 요구에 대해 죽음이 때론 ‘진정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엔 그는 너무 젊었다. 정복자 카이사르 앞에서 죽음을 택한 로마의 정치가 카토는 분명 카뮈보다 ‘현명하고 용감한 자’였다.

그들은 카나리아다. 광부들은 갱도 안에 스며드는 유독 가스로 인해 죽을까 봐 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새장에 넣어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먼저 떠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위험을 먼저 감지하고 ‘자기 몸을 바쳐 미리 알린 이들’이다. 살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음에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이 역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이지만 또한 살해된 자다.

가만히 생각하면, 매일 자기 시간을 스스로 삼키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으랴. 그렇기에 그들 속에는 늘 ‘우리’도 있다. 죽음을 비난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이란 말 뒤에 숨는 이들을 경계하라. 그중에 가해자가 있다. 죽기 전에 우울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 먼저 떠난 것이 우울증 때문이라고 하는 이들 또한 가해자다. 40분마다 1명, 하루 38명, 한해에 1만4천명이 자살하는 나라, 14년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죽음에 내몰리는데도 우울증 상담 외에는 제대로 된 대책 하나 못 만드는 정부가 가해자다. 2014년 ‘송파구 세 모녀 사건’ 이후에도 아무런 대책을 만들지 못해 얼마 전 ‘성북구 네 모녀 사건’을 만들어 낸 그 정부 말이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결식·수면·운동부족 아동의 40.3%가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대학을 못 가면 살 가치가 없다”고 내뱉은 부모와 선생이다. 한때 가장 소중했던 사랑의 순간을 야시장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 자와 그를 풀어주고 상처받은 이를 다시 능욕한 자다. 늙는 것이 ‘죄’고 질병과 장애를 ‘부담’이라 부르는 자다. 암에 걸린 것도 힘든데 집을 팔아 치료비로 수천만원을 마련해야 하는 의료제도를 계속 고집하는 자이고, 병력, 인종, 피부색, 성적 지향 등이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가해자다.

또 다른 가해자는 민생을 외면한 채 금배지 달기에만 혈안이 된 국회의원들이다. 사회안전망 확충을 이야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도덕적 해이’를 외치는 이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약한 자들 앞에선 신속하고 강하면서, 권력자와 동료에겐 한없이 느려터지고 부드러운 검찰이다. 자기는 시급 100만원을 받으면서 시급 1만원에 펄쩍 뛰는 기업인들, 2009년 쌍용자동차의 폭압적 해고로 30명이 ‘타살’을 선택하게 만든 사장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더 이상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지 않고 부자와 힘 있는 자의 편이 되어 버린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가장 악독한 가해자다. 이들을 잡아야 죽음이 멈춘다.

그러나 이 모든 가해자에게는 공범이 있다. 그런 정치인, 기업인,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 자, 이런 폭력에 “나는 몰랐다”고 말하는 자, 쉽게 잊는 자, 무엇보다 아파하지 않는 자가 공범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떠나간 이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되 이미 몸과 마음이 굳어버린 이들을 위해 더욱 슬퍼하라. 얼마나 더 많은 카나리아가 울어야 봄이 올까? 그래서인가?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 ‘자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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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0465.html#csidxc73f76c5df5c130890178ea8725d4f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