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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황현산 보내고 1년 뒤···사흘 만에 쏟아진 44편의 시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 25. 02:44

허수경·황현산 보내고 1년 뒤···사흘 만에 쏟아진 44편의 시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김민정 시인이 지난달 등단 20주년을 맞아 네 번재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펴냈다. 강윤중 기자

김민정 시인이 지난달 등단 20주년을 맞아 네 번재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펴냈다. 강윤중 기자

김민정 시인(44)을 부를 때면 멈칫하게 된다. 대표님, 시인님, 아니면 업계 ‘표준 호칭’인 선생님으로 불러야할까. 편집자로, 문학동네 계열사 난다의 대표로 지금까지 500권이 넘는 책을 펴낸 그를 그동안은 ‘대표’로 부를 일이 많았다. 지난해 시집을 쓰기 전 새로 발표한 시가 없었다. ‘대표’로서 허수경 시인,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키고, 그들의 유고집을 펴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민정 시인’이라 불러 마땅하다. 등단 20년을 맞아 지난달 네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지난 20일 전화통화로 그를 만났다.

“지난해에 허수경 시인과 황현산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1년이 됐어요. 1년이 너무 슬프고 힘들었어요. 정신을 차리려 하니 그동안 죽은 사람 산 사람이 뒤섞인 채 살고 있더라고요. 수경 언니가 마지막으로 한 ‘너 시써야 한다’고 한 말이 떠올랐어요. 정작 나한테 한 당부는 지키지 않았더라고요. 잘 살고 싶었어요. 사흘 만에 중편소설 쓰듯 250매 정도를 쭉 달아 썼어요.”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펴낸 후 3년 동안 틈틈이 했던 메모가 지난해 11월 사흘 동안 시의 형태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제목을 붙여 마흔 네 개의 시로 만들었다. “순대를 길게 삶아서 칼질을 한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길게 이어진 시들은 마치 한 편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허수경 시인, 황현산 문학평론가에 대한 애틋한 슬픔이 담긴 이야기부터 절친한 박준 시인까지 시인을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수경의 점 점 점’)는 허수경 시인의 말을 듣고 “대낮에 막걸리 몇 통을 비울 수밖에” 없고, 박준 시인이 양파를 나눠주면서 건넨 말 “누나 이 중에 한 개의 무름이 있어요”(‘준이의 양파’)가 한 편의 시로 탄생했다. 김민정은 “이번 시집의 키워드는 ‘사람의 말’이다. 남의 말을 예민하게 붙잡고 살았다”며 “내 옛날까지 다 헤집어지더라. 있다가 없던 사람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의 44년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시집의 제목은 역시 김민정이다. 직설적이고 거친 언어로 시단에 충격을 던지며 등장한 김민정은 2000년대 ‘미래파’의 대표 시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번 시집의 제목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도 예사롭지 않다. 출발은 지난해 문학동네 100호 특집에 수록한 에세이 ‘너의 거기는 크고 나의 여기는 작아서 우리는 매일같이 헤어지는 중이라지’였다.

“사라진 선생님과 친구들 간 곳을 알 수 없고 몰라서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있어서 ‘작다’라고 표현했어요. 살아있는 중엔 이들과 헤어지는 중이라는 마음으로 붙들고 살고 싶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안 맞으면 너무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잘 물러나고 잘 놓고 뒤로 돌아서는 것도 어른의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집 제목은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로 반대가 됐다. 김민정은 “시와 산문을 쓸 때 태도가 다르다. 시를 쓸 때는 내가 적극적으로 칼자루를 쥐고 가는 거여서 감히 ‘내가 크다’가 되더라”고 말했다. 

김민정 시인. 강윤중 기자

김민정 시인. 강윤중 기자

여성으로서의 삶을 직설적이고 도발적 언어로 내뿜었던 김민정은 이번 시집에서도 거침이 없다. 시선은 더 넓어졌다. 안동 김씨 ‘종친’들이 “우리 집에서 우리 엄마가 차린 술상들/ 받아 처먹으면서 씨부리던 말들…네 각시라도 대신 나가 아들을 낳아 오든가”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소갈비를 재고 민어살을 떠야했던 어머니 삶을 이야기하고, 내몽골 출신 여성 마사지 노동자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육상을 했어요. 운동을 하는 여자 아이들은 코치의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저는 당하면 이야기를 잘 했어요. 제가 구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고발의 목소리를 내면 어른들이 얼굴이 빨개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글이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제 나이대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발했던 것 같아요.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다시 보니 스무살 여성이 섬약해서 낼 수밖에 없었던 목소리가 있었더라고요.” 

김민정은 2016년 터져나온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해서도 말을 이었다. 김민정은 “20년 넘게 문단 언저리에 있으면서 저 역시도 반성했다. 법에 무지했다는 것에 크게 얻어맞았다. 앎으로 이길 수 있었고 앎으로 달라질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문단은 가진 것이 없어서 밑바닥까지 다 훑어졌다. 처음엔 흙탕물이었지만 그렇기에 정화작용이 빨랐던 것 같고 지금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좀더 유연한 힘을 가진 건강한 목소리의 여성으로 아름다워지겠다는 게 최종의 꿈”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김민정은 사랑받는 시인이자 베테랑 편집자다. 시인으로서 생목으로 뽑아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편집자로서는 예민한 판단력과 강한 추진력을 보여준다.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도 없겠지만> 등이 그의 손에서 탄생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근에는 문학동네 강태형 전 대표가 필명 ‘강형’으로 투고한 소설 <온전한 고독>을 펴냈다.

“처음엔 자기가 아는 사람이라며 익명으로 원고를 보여줬어요. 소설을 보니 강 전 대표님이 쓴 거 같더라고요. 출판사 전 대표란 타이틀을 빼고 그냥 소설로 선보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강 전 대표가 시인이면서 편집자로 저와 매우 닯았어요. 베테랑 편집자였던 대표님이 소설을 두고 저와 피튀기게 싸웠죠. 그런데 편집자인 제 말을 받아들이더라고요.” 

시인이자 편집자인 김민정의 삶은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과 같다. 그는 “편집자로서 강하고 적극적이지만, 시인으로서의 저는 얼굴이 빨개진다. 시를 쓸 때는 죽고 싶은데, 나를 살게 하는 건 책이다. 끊임없이 시소를 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밤새 이야기를 들려주듯 술술 이어지는 시들은 때론 슬프고, 때론 거침없고, 때론 웃기고, 때론 눈물난다. ‘시인 김민정’의 시간이 돌아왔다.

허수경·황현산 보내고 1년 뒤···사흘 만에 쏟아진 44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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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1241350001&code=960205#csidxe6d92f427847d13a6b44cac671c0a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