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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세상의 저녁] ‘토리노의 말’을 응시하라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25. 04:26

[정찬의 세상의 저녁] ‘토리노의 말’을 응시하라

등록 :2020-04-23 18:20수정 :2020-04-24 13:45

 

정찬 ㅣ 소설가

 

‘토리노의 말’은 니체가 1889년 1월 토리노의 거리를 걷다가 마부의 모진 채찍질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말을 끌어안고 울었고, 그 후 정신착란 속에서 10년을 살다 운명했다는 짧은 이야기다. 이 짧은 이야기가 예술가들에게 매혹적이었던 것은 이야기에 내재된 깊은 상징 때문이다. 상징은 그 깊이만큼 풍요로운 해석과 창조를 낳는다. 마부의 채찍에도 움직이지 않는 말의 모습이 니체의 눈에는 노예 노동을 거부함으로써 타락한 일상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으로 보였고, 그 선택으로 말이 견뎌야 했던 채찍질의 고통에 자신의 실존적 상황이 투영되었기 때문에 니체가 울었다는 것이다. 말의 고통에서 생명체의 근원적 절망을 니체가 보았기 때문에 울었다는 해석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를 잇는 이 시대 유일한 시네아스트’로 수식되는 헝가리 영화감독 벨러 터르는 ‘토리노의 말’ 이야기에서 묵시록적 세계를 이끌어낸 영화 <토리노의 말>을 만들었다. ‘토리노의 말’ 이야기가 영화 <토리노의 말>을 낳은 것이다. 영화는 ‘토리노의 말’에 대한 내레이션에 이어 벌판의 외딴집에서 딸과 함께 사는 마부가 마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 첫날부터 6일째 되는 날까지의 시간 속에서 붕괴되어가는 세계를 냉혹하게 묘사한다. 영화 속 6일은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룬’ 창세기의 6일을 역으로 배열한 시간이다.

 

붕괴의 조짐은 마부가 58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들어온 나무좀 갉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데에서 나타난다. 다음 날 아침 말이 마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날 마을 남자가 찾아와 술을 청하면서 마부에게 파멸을 낳는 인간 본성과 함께 세계의 종말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마부는 흘려듣는다. 셋째 날, 말은 음식을 거부하고 집시들이 물을 찾아 마부의 집으로 들이닥쳐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린다. 마부의 딸은 집시 노인에게 한권의 책을 받는데 “아침은 곧 밤으로 바뀔 것이나 밤은 머지않아 끝나리라”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이다. 다음 날 우물이 바짝 말라 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마부는 딸과 함께 말을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지만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마부가 돌아온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다섯째 날은 기름에 불이 안 붙는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마지막 여섯째 날 마부는 생감자 껍질을 벗겨 씹고, 딸은 말이 그러했듯이 먹는 것을 거부한다. “먹어, 먹어야만 해” 하고 말하던 마부도 마침내 먹기를 포기한다. 영화는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침묵과 어둠에 정물처럼 잠겨 들면서 끝난다. 벨러 터르는 <토리노의 말>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이 어둡고 느리고 장중한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집시 노인이 마부의 딸에게 건넨 책의 첫 문장 때문이다. 영상이 아닌 바짝 마른 언어로 보여준 것이다.

 

‘토리노의 말’을 휘감고 있는 상징에서 코로나19로 뒤덮인 지금의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을까? ‘토리노의 말’을 지구라는 생명체, 혹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상징으로 본다면 해석의 문이 열린다. 코로나19 이후 서울의 공기가 깨끗해졌음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중국의 대기 환경도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음이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된다. 스탠퍼드대 지구시스템과학부 마셜 버크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한 미세입자 배출 감소가 중국에서 두달 동안 4천명의 어린이와 7만3천명의 노인 생명을 구했다는 시뮬레이션 예측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기간 바이러스 감염 사망자보다 20배 많은 수치다. 사람 출입을 금지한 인도의 해변에서는 바다거북 80만마리가 산란을 하러 몰려들어 생명체의 아름다운 윤무가 이루어졌다. 미국 북동부는 도시 봉쇄로 대기오염이 30% 감소되었고, 배가 사라진 베네치아의 바다는 에메랄드빛이 더 짙어졌다. 전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를 차지한 항공편의 감소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반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항공기와 충돌해 수없이 죽어가는 새들의 생명 공간이 확장되었다.

 

니체가 ‘토리노의 말’을 껴안고 울었던 것은 상처투성이의 말이 자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류는 더 늦기 전에 ‘토리노의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응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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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1776.html#csidx5b40933d9619e4388da24643c613a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