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천재와 바보와의 차이-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5. 04:11

제 1111 회 풀어 쓰는 다산이야기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천재와 바보와의 차이-

머리가 영특하여 뛰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을 ‘상지(上知)’라 말하고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하우(下愚)’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은 공자(孔子)였습니다. 『논어』 「양화(陽貨)」편에,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성은 서로 멀다(性相近 習相遠), 오직 상지와 하우는 서로 옮기지 못한다.(惟上智與下愚不移)”라는 공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경문(經文)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 사람이 다산이었습니다.

“경전의 뜻이 밝혀진 뒤라야 도체(道體)가 나타나고 그 도(道)를 얻은 뒤라야 심술(心術)이 비로소 바르게 된다.(經旨明而後 道體顯 得其道而後 心術始正)”고 제자 정수칠(丁修七)에게 준 글에서 말했습니다. 경전의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다산의 글이 또 있습니다. “폐법·학정이 행해지는 일은 모두 경전의 뜻이 밝혀지지 못한 것에서 연유된다. 그래서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경전의 뜻을 밝히는 일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弊法虐政之作 皆由於經旨不明 臣故曰 治國之要 莫先於明經也: 『경세유표』 권10, P.310)

위의 글을 통해서 다산은 말합니다. 경전의 뜻을 올바르게 밝히느냐, 잘못 해석하느냐는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 통치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이야 차이가 없으나 습관은 차이가 있다면서, 상지[천재]와 하우[바보]는 옮겨지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상지는 본래부터 상지이고, 하우는 본래부터 하우여서 하우에서 상지로 옮겨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해석하여, 한유(韓愈)라는 대문장가도 인간의 성품에는 상품·중품·하품의 세 등급이 있어 애초에 불평등하게 태어나, 신분의 차이는 하늘이 정해주었다는 결정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동양의 중세는 대체로 이런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여 본질적으로 불평등 사회가 존속했다는 것이 다산의 주장이었습니다.

다산은 말합니다. “상지와 하우는 성품의 명칭이 아니다. 착함[善]을 지키려는[守] 사람은 비록 악(惡)과 더불어 서로 어울리더라도 습관이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상지라 하고, 악에 안주[安]해버리는 사람은 선과 더불어 친숙하게 지내도 습관이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하우라고 한다. 만약 인간의 성품에 본래부터 옮겨지지 않는 품(品)이 있다면 주공(周公)이 ‘성인이라도 반성하고 사색함이 없다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반성하고 사색한다면 성인이 될 수 있다(書經.多方)’라고 한 말은 성(性)을 알지 못하고 한 말이 되어버린다.”(자찬묘지명)라고 했습니다.

수선(守善)과 안악(安惡)의 논리를 인용하여 선을 지키는 행위자와 악에 안주해버리는 사람을 상지와 하우라고 말하여 성품은 같으나 습관을 바꾸지 못해서, 상지와 하우로 나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경전을 새롭고 바르게 해석합니다. 불평등한 상지와 하우의 품성은 생득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본래 같은 성품이지만 행위가 있고[守] 없음[安]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다고 하여 유위(有爲)의 철학(행동하는데 따라 성품의 변화와 옮김이 가능하다는 행동철학)을 마련함으로써 결정론적인 중세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는 경전해석을 이끌어 냈습니다.

더 부연합니다. 옮겨지지 않음[不移]에 대한 해석도 착함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 악한 사람과 아무리 어울려도 악에 더럽혀지지 않고, 착한 사람과 아무리 어울려도 악에 안주해버리고는 착함에 적셔지지 않음을 뜻한다고 하여 자주권을 지닌 인간 행위의 의욕 여하라는 탁월한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경전해석을 위해, 다산이 232권이 넘는 방대한 경학연구서를 저술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과 국가가 올바로 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이룩한 작업이었습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