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抱擁)-소설, 1971년
은혜 추천 0 조회 98 20.02.18 16:0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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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抱擁)
오승재
T 대학의 강사 유승준은 퍼즐(Puzzle)을 즐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날도 그는 일요일이기 때문에 아침 식사가 끝나자 커다란 상을 서재에 갖다 놓고 이번에 도미한 명 교수가 보내온 천 피스 짜리 퍼즐을 상 위에 쏟아 놓았다. 각양각색의 비스킷 모양의 퍼즐 천 조각이 상 위에 와르르 쏟아졌다. 그는 전부를 짝 맞춰 놓았을 때 나타나는 그림의 원본은 보지도 않고, 불태워버린 뒤 이 제멋대로의 색깔들을 짝 맞춰 전체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도미한 사람마다 부탁해서 이런 그림을 맞춰낸 것이 벌써 이십 짝이 되어간다. 미국에서는 할 일 없는 할아버지들이나 소일 삼아 몇 주일이고 걸려 맞춘다는 그림을 그는 직업처럼 즐겼다. 먼저 하늘과 땅을 색채에 따라 구분하고 땅과 건물, 숲, 강 등 색채에 따라 다시 세분하고 같은 색채일 때는 명도에 따라 구분해 간다. 이렇게 여러 무더기가 우선 나누어지면 한 무더기씩 끌어내어 각 조각의 특성들을 조사하다가 요철(凹凸)과 형태에 따라 다시 나누고 어떻게 배열되었겠는가를 상상한다. 맞춰나가는 재미란 혼돈에서 질서를 찾는 즐거움도 있지만, 색채가 예상외로 변한 부분을 맞출 때의 기쁨이 컸다. 이를테면 인물의 이마 부분까지 얼굴이 나타났는데 이마 일부와 머리카락 모양의 조각이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엉뚱한 갈색 조각이 들어맞는다. 맞추고 보면 모자가 되는 그런 때였다. “많이 맞추셨어요?” 아내가 웃는 얼굴로 차를 끓여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승준이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고 일요일에는 피아노 레슨을 하지 않아 한가했다. 젖먹이는 재워놓고 세 살, 다섯 살짜리는 식모에게 맡겨 두고 온 모양이었다. “당신도 하나 맞춰봐요.” 그는 차를 받아들며 말했다. “아유 전 정신이 어지러워요. 보기만 해두.” 그녀는 이런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 앉아서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들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이 세상도 퍼즐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어지럽게 모여 살지만 잘 조화가 되어 있거든요.” “정말 셋방의 부부들을 보세요. 성격이 그렇게 판이한대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승준은 맞추다 만 그림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곁에 어떤 그림이 어울릴 것 같아요?” “그건 양옥집 현관 아니에요?” 한참 들여다보던 아내가 말했다. “빨간 벽돌에 하얀 문 색깔이 있는 거겠죠?”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이 조각을 찾는데 삼십 분은 더 걸렸을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조각을 맞추었다. “어머 그것은 초록색 아니어요?” “그럴듯한 양옥집이 전개될 것 같은 예상이 뒤집히며 초록색이 나타나거든.” 그녀는 하잘것없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승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아마 이 양옥집은 숲에 가려져 있는 모양이오. 갑자기 피어오른 상상이 배반당하는 기분이지만 맞춰 놓고 보면 역시 그랬군, 하고 즐거운 수긍이 가거든.” 그는 퍼즐에 열중해서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 당신 오늘 김 사장 찾아보기로 했잖아요?” 그녀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돈 때문에 말이지?” 그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미안해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전 아는 친구라곤 여기엔 없잖아요?” “미안하긴. 내 일인데 뭐.” 그는 처음으로 미안해하는 아내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정말 쓸데없는 짓을 시작했군. 그런데 이놈의 짓은 시작만 하면 정신을 잃는다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였다. “점심시간에 가야 만나실 거러고 하셨잖아요?”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십일 월 중순의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몇 시에 오셔요?” 아내가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저녁 여섯 시쯤?” “오늘두요?” “참 그렇지 곧 오지, 뭐.” 그는 뒤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그는 버스를 타지 않고 시내를 걸었다. 집이며 길이며 멀리 산과 하늘을 쳐다보면서. 마치 그것이 뜯어 맞추어 놓은 퍼즐처럼 생각되었다. 이 T 시의 집들을 모두 흩어놓고 가장 이상적으로 다시 맞춘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 하고 생각하였다. 역시 현재의 이 모양이 가장 이상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발소, 다방, 목욕탕, 여관들이 꼭 있어야 할 곳에 들어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품팔이하는 사람들의 집들을 몽땅 한 군데에 모아 놓는다면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시키는 사람들이 현재보다 훨씬 불편을 느낄 것이었다. 이 집들을 다 흩어놓고 어떤 조건으로 재배치하면 현재의 상태가 재현될까를 생각하였다. 흩어져 있는 천문학적인 입력조건과 또 원하는 현재 출력조건을 넣어놓고, 최적 해를 찾는 수많은 연산(演算)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을 초월하는 비상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딱 알맞게 퍼즐을 맞추어 살고 있는 것이다. 승준은 김 사장 집으로 가지 않고 시내 한복판에 나와 있었다. 얼마를 더 걸어 다방 ‘무지개’로 들어갔다. 거기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자기 친구 박 사장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월남전을 다녀 왔다는 그 친구는 이 다방의 주인이었다. “아유, 유 선생님. 어서 오세요.” 우량아처럼 살이 찐 미스 남이 벙글벙글 웃으며 맞더니, 엽차를 들고 쫄랑쫄랑 따라와 맞은편 좌석에 덥석 앉았다, “혼자 나오셨어요?” “그래 혼자 나왔는데. 무슨 좋은 일 있나?” “좋은 일은요.” 그녀는 또 벙글벙글 웃었다. 누구를 보나 늘 그렇게 웃는 처녀였다. 승준은 무릎 위로 올라간 그녀의 미니스커트를 보자 생각 나는 게 있어 농을 걸었다. “요즘도 데이트하나?” “데이트요?” “왜 있잖아. 신사라고 추겨 올리던 그 남자 말이야.” “흥, 신사 좋아하시네.” “왜 딱지 맞았어?” “딱지를 맞아요? 딱지를 놓았지.” 그녀는 승준이 내막을 안 듯해 보이자 곧 풀어진 얼굴이 되어 응대했다. “그 작자가 말이에요, 가지구 놀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돈 많은 사장 하나 소개해 줄까 이러잖아요? 글쎄 기가 차서. 이래 봬도 말이에요 나 지조가 있다구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 그러더니 뒤돌아보며 커피? 하고 소리 없이 입 모양만 만들어 보였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떤 지조라는 개념이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박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희망 없는 인생이 있을 수 있겠어요? 이래 봬도 서방님 하나만 잘 걸려들면 거뜬히 다방 하나 차린다구요.” 어떻든 지조나 희망이란 단어가 어처구니없이 단순하게 정의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희망이 돈 있는 사장이요, 지조가 그를 위해 고이 간직한다는 것 아닌가? 도대체 저 종류의 인간이면 퍼즐에서 어느 색채가 될까 하고 승준은 생각했다. 행복? 그는 처음의 아내 정옥을 포옹했던 순간을 생각했다. 무엇이 행복인가 하고 질문했다면 그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 뻐근한 ‘행복’에 취해 있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서 나온 마리아처럼 저에게 일곱 벌의 각각 다른 나이트가운만 사 주세요. 밤마다 다른 색깔로 갈아입으며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겠어요.” “물론 무지갯빛으로 사 주지.” 그러나 승준은 그것마저도 실천 못 했다. 셋방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현재 승준의 수입으로는 최저생활도 유지되지 못해 그만그만한 어린애 셋을 두고 경옥은 피아노 레슨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아노 때문에 셋방 얻는 것도 문제였다. 따라서 통째 전세를 얻어 한쪽은 현재 한전의 수금원에게 내주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그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미 유학 장학생 시험을 본 것이 합격이었다. 경옥은 기뻐하였다. 꽉 막힌 궁지에 서광이라도 비쳐든 듯이.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지 해 보겠어요. 당신도 힘을 내세요.” 도대체 국민소득은 15년 사이 거지 같던 상태에서 5배나 늘어 유흥업소는 개나 소나 사장들인데 자기 주변에는 돈이 안 보였다. 승준은 다방 안을 둘러 보았다. 그때 박 사장이 입구 쪽에서 나타났다. 헤어진 지 20년이 지났는데 일 년 전, 승준이 T 시로 옮겨 와서 우연히 노상에서 만났었다. 그는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듯, 호기를 부렸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 보이더니 승준의 앞자리에 와 앉았다. 이때 미스 남이 커피를 가져왔다. “야, 내 것도 하나 가져와.”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로요?” “뭐긴 뭐야, 커피지.” 그녀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살아졌다. “왜 자넨 그 앨 못 잡아먹어 배를 앓지?” “애가 못돼 먹었어. 아주 화냥년이야. 봉급을 나에게 맡기면 고율로 잘 키워줄 텐데 언제나 갖다가 놈팽이에게 빼앗기고 말거든. 난 말이야 도둑놈 같은 부자 돈 길러 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저 애들 걸 돌봐 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거든.” 박 사장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승준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도미 건 어떻게 되었어. 잘 되어가는 거야?” “글쎄 좀 문제가 있어.” “뭔데?” 이때 미스 허가 커피를 들고 와서 얌전히 놓고 갔다. 미스 남은 박 사장 앞에 다시는 나타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스 허는 살결이 대리석같이 흰 예쁘장한 얼굴인데 애수에 잠긴듯한 어린 소녀였다. “돈이 좀 있어야겠어.” “얼마쯤?” “육만 원.” “장학금을 받았다며. 것도 돈을 써야 하나?” “아냐. 왕복 여비를 포함한 풀 스칼라십인데 한국에서 정리하고 떠날 돈이 필요해서.” “언제까진데?” “빠를수록 좋아.” 박 사장은 언짢은 표정을 했다. “그렇담 어제쯤 전화를 줄 일 아냐? 어젠 삼십만 원이 내 수중에 있었거든. 그런데, 좀 쓰고 빌린 돈을 갚아버렸잖아. 하지만 까짓 육만 원쯤 구하려면 안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전혀 알아볼 만한 데가 없나?” “있긴 있어. 김 사장이라고 내가 십여 년 전 가정교사로 있던 곳인데 정말 그 집은 싫어.” “이거 보게. 필요한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해야 해. 자네처럼 체면 생각하다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겠나? 벼룩이 간도 빼 먹는 세상인데 말이야.”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걸. 그래서 집에선 그리로 가겠다고 나선 게 이쪽으로 와 버렸지 뭐.” “원 이런. 자 일어나게. 같이 가세.” 박 사장은 벌떡 일어났다. “아냐 나 혼자 가도 돼.” “그런 미지근한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어. 자, 내가 문전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박 사장은 너무나 활동적이어서 승준의 기분에 거슬렀다. 그러나 그는 승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가 차에 승준을 태웠다. “한 달만 빌리게. 그 뒤론 내가 무이자로 돌려줄 테니. 이래 봬도 말아야. 이 거봉(그의 호)은 돈의 노예가 아닐세.” 그의 말은 언제나 허황한 데가 있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아까 그 커피를 날라온 애 있잖아? 미스 허 말이야. 그 애도 내가 알선해서 십만 원 계를 넣어주었지. 다음 달이면 타게 될 거야.” 문전에서 내리자 그는 승준의 어깨를 '탁' 쳤다. “잘 해 보게 아주 한 장 채워서 빌리게. 나머지는 내가 쓸 테니까.”
마침 김 사장은 집에서 식사하는 중이었다. “선생님, 웬일이세유. 점심 드셨어유?” 부인은 내실에서 점심을 들다 말고 나와 그를 응접실로 인도했다. “먹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그는 용건부터 해결해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십만 원만. 삼 개월간 빌려주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번 방학 동안 책 번역하는 일을 마치면 갚아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뒷부분은 그의 변제능력을 보이기 위해 얼결에 붙인 말이었다. 그러나 생판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학과 주임, 신 박사로부터 ‘상투 꼽은 나라에서의 15년간’이란 1900년대 전후 간의 한국 실정을 쓴 언더우드 부인의 수기를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보류하고 중이었다. 신 박사는 일 년간 시찰 정도로 미국을 다녀온 뒤 국내에서 학위를 받고 영문 사료의 번역에는 거의 빠짐 없이 손을 대고 있는 처지였다. 물론 역자는 모조리 신 박사의 이름이었다. “워디다 쓰시려고 그러세유?” 부인은 좀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 “좀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요” 그녀는 식모를 불러 승준에게 커피를 끓여주고 사과를 깎아 주도록 당부하고 식사를 마치기 위해 내실로 돌아갔다. 부인이 사장에게 뭐라고 설명하는 소리가 TV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와 섞여 들렸다. “뭐 돈?” 사장의 음성이 들려오자 승준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러나 이윽고 잠잠해졌다. 점심이 끝났는지 부인이 이내 나타났다. “선생님,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유.” 그리고는 금전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차용증을 하나 써 달라고 했다. 그는 차용증을 쓰고 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응접실을 돌아보았다. 응접실이라기보다는 큰 홀이었다. 응접세트는 한쪽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고 그 곁에 큰 냉장고가 있고, 냉장고 옆에는 전축과 턴테이블이 있고 그 옆에 디스크가 꽂혀 있었다. 넓은 홀 쪽엔 피아노가 놓여 있고 위쪽 벽엔 전형적인 커다란 호랑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는 집에서 맞추다 말고 온 퍼즐을 생각하고 또 이 응접실의 기물 배치에 약간 심란한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 부인이 말을 했다. “선생님, 춤출 줄 아세유?” “모릅니다. 사모님께서는?” “지금 배우는 중이에요.” 그녀는 미소해 보였다. “사장님께서도?” “그분은 아예 그런데 관심이 없는 분이에유. 그래 이번에 이 전축을 샀지 뭐예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번 하려고유. 선생님두 오세유.” 하며 그녀는 턴테이블 앞으로 가서 디스크를 한 장 뽑아 걸었다. 경음악이었다. 약간 목쉰듯한 색소폰의 굵은 바리톤 음이 응접실을 가뜩 매웠다. “블루스군요.” “선생님두 춤출지 아시는구먼.” 부인은 젊음의 매력이 가신 얼굴로 눈웃음치며 말했다. “모릅니다. 음악이 그렇다는 거죠.” “전 지금도 음악 구별을 못해유. 리드하는 대로 따라다니기만 하니까유. 그렇지만 블루스 하나는 알아유. 그때는 홀에서 불은 컴컴하게 줄이거든요.” 가난하던 사람들이 좀 돈이 생기니까 이곳저곳에 댄스 홀을 만들고 남녀가 모두 춤바람이 나서 난리였다. 도대체 돈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승준은 초조해졌다. 이때 벨이 울리고 식모가 나가 문을 열자 누군가가 자전거를 끌고 힘없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승준은 그가 곧 자기 셋집에 사는 한전 수금원 박 씨임을 알 수 있었다. 승준은 곧 일어나 현관을 등지고 피아노 앞에 있는 벽화에 눈을 돌렸다. “오늘 돈 없어유.” “그럼 언제쯤 들릴까요?” 박 씨의 공손한 말씨가 들려 왔다. “언제든 오세유. 오늘 말고.” “그런데 사모님.” 박 씨의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화장품 한 가지 안 쓰겠습니까?” “뭔데유.” “여러 가지 있지요.” 승준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박 씨가 가방을 열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유 난 뭐라고. 국산 아니에유? 일 없어유.” “죄송합니다.” 승준이 뒤돌아보니 박 씨는 자전거 핸들에 가방을 매달고 풀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선생님, 남자 화장품 장수도 봤어유? 정말 요즘에는 별사람이 다 귀찮게 해서 못 살겠어유.” “그 사람 부인이 화장품 장수인데 만삭이 돼서 걸어 다닐 수 없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그 사람을 아세유?” “저의 집에 세 들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이때 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보고 문 열어주어라.” 이번에는 사장 아들과 하얀 장갑을 낀 운전수가 들어왔다. 그는 승준이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졸업 전 그만두고 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꾸벅 인사를 하더니 식모를 불러 빨리 밥을 차리라고 고함을 치고 턴테이블 곁으로 가서 이번에는 재즈 음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담뱃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담배 피울 줄 아느냐고 묻고 한 가치 피워 물었다. 부인이 내실로 살아진 뒤 얼마쯤 멍청히 앉아 있더니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대학교수는 봉급이 얼마쯤 돼요?” “살만치 받지.”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서 승준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보수의 과다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가는 사회가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돈을 빌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자기가 한전 수금원인 박 씨만큼 비참해서 그냥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었다. 사장의 아들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후에 사장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내실에서 나왔다. “그만 꼬박 잠아 들어 버렸구먼. 아이구 선생님 미안해요.” 그는 소파에 앉자 또 한 번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식사하는 아들을 큰 소리로 불러 회사에 가서 십만 원을 내주라고 했다. 녀석은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회사로 가더니 먼저 2층으로 바삐 올라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금고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내가 들어가기도 전에 “선생님, 던질게요.” 하더니 종이 뭉치를 홱 던졌다. 얼결에 받은 승준은 그 무례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돈뭉치를 들고 ‘잘살아 보세’를 외친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누가 가르칠 것인가? 독재 정권은 생각하는 기능을 빼앗고 대신 환락을 쥐여 주었다. 그 끝은 어디인가? 녀석은 자기의 의무를 끝냈는지 빨리 1층으로 사라졌다. 승준은 4만 원을 박 사장에게 전해 주고 집에 돌아왔으나 종일 기분이 뒤틀렸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경옥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승준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소. 다만 빚을 내서까지 그놈의 나라에 갈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오.” “힘을 내세요. 얼마나 어려운 장학금인데. 집안일까지 걱정하고 떠나게 해서 미안해요. 사실 그 돈 없어도 어떻게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래, 힘을 내야지. 인생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잖아? 정신이 물질을 이기는 시대가 오고 말 거야.) 그는 서재로 들어가 심란한 생각을 퍼즐로 달랬다. 분류해 놓은 새로운 색채에서 못생긴 젖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는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는 지저분한 젖소와 같다는 말을 한 기사를 생각해 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젖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젖을 빨려 모여든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비행기 표, 여권, 비자, 문교부의 반공교육까지 마치고 출발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우체부가 등기우편을 하나 가지고 왔다. 장학회에서 온 등기였다. 출국을 앞두고 같은 장학금으로 다녀온 동문과 오리엔테이션을 겸해 간담회를 하고자 하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우체부는 편지를 다 읽기까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내와 어린애들이 현관으로 나왔다. “선생님, 교육보험 하나 들어주시지요.” 승준은 애원하고 있는 듯한 우체부의 표정을 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선생님은 대학교수시지요. 그럼 생명보험이라도 하나.” 그는 얼마 전 돈을 구걸하고 다녔던 자신을 생각하며 정말 죄송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좋습니다.” 우체부는 싹 돌아서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자기가 돈을 구걸하러 갔을 때 돌아서 버리고 싶던 그 심정으로 돌아서는 것일까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굴욕을 참으며 연명하고 싶으랴. 더러운 젖소라고 피하면서도 그 젖을 빨러 오는 군상들이 누런 퍼즐 무더기가 되어 쌓아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도미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기 능력의 한도를 알아버린 아내가 걸고 있는 마지막 기대가 어떤 결실을 가져올 것인가에 전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독일에 진출한 광부와 간호부들이 벌어드린 돈, 월남에 파병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모은 돈, 한일협정 보상금 등이 지금의 급격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는데 자기는 유학에서 돌아오면 무엇을 가지고 금의환향하리라고 아내는 기대하는 것일까? 물론 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거기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으로 혹 삶의 질을 향상하는 무엇인가를 안고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내는 돈 말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할까? 그는 저녁때에 ‘무지개’를 들렸다. 친구 박 사장에게 빌려준 돈 4만 원과 무이자로 빌려주겠다는 6만 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박 사장은 이날 아주 기분이 좋은 듯했다. 손을 들고 아는 체하고 옆 의자에서 기다리라고 신호했다. 그는 대머리 신사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대머리 신사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머리 신사의 옆에 앉은 젊은 귀부인은 대화에는 흥미가 없는 듯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찬란한 다방만 여기저기 둘러 보고 있었다. 미스 허가 차를 가져왔다. 그녀는 이날도 애수에 차 있는 얼굴이었다. 박 사장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지금쯤 십만 원을 손에 쥐고 싱글벙글해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미스 남과 같은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면 새로운 꿈을 가지고 들떠 있을 터였다. 그는 이들의 대조적인 표정이 퍼즐의 요철 부분에 약간 붙어 있는 실마리처럼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래 수속은 잘 마쳤나?” 박 사장은 말이 끝났는지 다가와 앉자 바로 물었다. “출발만 남았어.” “그럼 다 된 거네. 오늘 밤에는 최고급으로 송별 파티를 한번 하자고.” “관두게 남 지금 그런 걸 받고 싶은 기분이 아닐세.” “그건 자네 기분이고. 자 오늘 범에는 뭐로 할까?” 그는 아주 많이 상기된 상태였다. “그렇지. 예행연습으로 저녁은 양식으로 하고, 이 차로 아가씨들을 주물러야지.” 박 사장은 승준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계획대로 진행 시켰다. 저녁을 마치자 한 요정으로 그를 인도했다. 들어가면서 큰 소리였다. “이거 봐. 여긴 사람 안 사나?” “어머 우리 서방님 오셨네.” 뚱뚱한 마담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 나와 그와 팔을 꼈다. 단골집인 듯했다. “자 꽃방으로 인도하고 제일 예쁜 것으로 둘, 들여보내요. 오늘 밤은 싫건, 아니 아주 자구 갈 테니까.” “아무렴 누구 말씀이라구요.” 그들은 제일 깊숙한 방으로 인도되었다. 이윽고 한복 차림의 두 아가씨가 들어와 사뿐히 인사하였다. 정이에요. 숙의예요. 이런 식이었다. “이런, 어째서 그렇게 이름이 외자야. 그리고 이게 뭐야 미니스커트를 입고 올 일이지.” “왜요?” “불편하잖아. 그건 그렇고. 이분이 국내에서 유명한 장학금을 받아 이·삼일 내로 미국을 가실 분이야. 알겠어? 그래 오늘 밤 최후로 한국 맛을 잘 보여 드려야 한단 말이야. 달라는 것은 다 주구.” 정이 눈을 흘겼다. “요것 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 그는 호주머니 안에서 오백 원 화폐를 한 움큼 쥐고 흔들어 보였다. “어머!” 숙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낚아채려 했다. “왜 이래. 이게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공으로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서비스를 잘하란 말이야.” “아이, 어떻게? 이렇게요?” 정이 승준의 팔을 꼭 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어리둥절하였다. 평생 경옥 이외에 자기 팔을 안으며 볼에 입 맞춘 여자는 없었다. 그는 책과 씨름하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것이 자기의 기쁨이요, 가정의 행복이요,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해 왔다. 누가 사회를 안정하게 하며 누가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정치적으로 발언 한번 안 하고 오히려 이권 다툼의 피해 대상자가 되면서도 꾸준히 가정을 지킨 자들은 이 나라 수 만 명의 부인들이 아니었던가? 평생을 연구하는 일과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는 상아탑의 지성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대학에서 인기학과는 졸업 후 돈 많이 버는 학과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고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영리한 학생이 돈벌이하는 인기과에 진학하는 걸 경고하고 생각하고 진리를 파고드는 학자가 될 걸 권유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활이 흔들리고 궁지에 빠져 미로를 헤매면서 지금은 가치관마저 흔들리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인생을 가장 잘 엔조이한 것은 로마 시대 귀족들이었던 것 같애. 그들은 나체의 미녀가 피리를 불며 춤추는 걸 보지 않으면 식욕이 없었다니까. 그런데 우린 뭐야? 이건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잖아? 자 싫건 취해 보지구. 취해서 허깨비라도 보잔 말이야.” 박 사장은 술상이 들어오자 마구 마시며 지껄여 댔다. 승준도 이날 밤은 싫건 취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생리적으로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낭만이 없어. 메마르고, 삭막하고, 기계적이고, 소심하고, 타산적이고. 도대체 왜 인간들이 이렇게 왜소해져 가느냐 말이야.” 하더니 그는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자네 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이것만 가지면 처녀도 사고, 권력도 사고, 시간도 사고, 행복도 사고……. 하지만 난 이놈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흥 돈 좋아하셔.” 숙이 아니꼬운 듯이 한마디 거들었다. “요것이 뭘 안다구. 너라고 별수 있어? 돈이면 다지.” “사람 깔보지 말라고요.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 “넌 오백 원만 주어도 옷 다 벗을걸.” “에이 여보시오.” “그럼, 그건 너무 했다 하구. 만원이면 어때?” “어림없어요.” “오만 원이면?” “돈으로 되는 게 따로 있잖아요.” “요것 봐. 오늘 유 교수께 재밌는 구경 시켜드려야겠군.” 하면서 화투치기를 하자고 했다. “자 오늘 싫건 잃어 줄 테니 자신 있으면 덤벼.” 하고 그는 오백 원 지폐로 삼만 원을 세어 앞에 놓았다. 여인들은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너희들 돈 없지? 그러지 말고 누구 한 사람 덤벼라. 내가 이기면 진 사람이 술 한 잔 들고, 내가 지면 오백 원짜리 하나씩 주지.” 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오천 원도 따기 전에 술에 녹초가 되었다. “아직 멀었는데 이러면 어떨까? 내가 지면 천 원을 주지. 그러나 이기면 넌 옷을 한 가지씩 벗기로 말이다.” “좋아요.” 숙은 벌건 눈으로 살기를 띄우고 말했다. 정이 말렸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는 천원을 거뜬히 땄다. 박 사장이 또 제안했다. 화투는 지루하고 하니 ‘가위· 바위·보’를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가위· 바위·보’가 시작되어 숙이 앞엔 돈 무더기가 자꾸 높아졌으나 숙은 위 애래 한 벌씩 남은 나체였다. 승준은 이건 너무 심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해 두지.” 승준이 얼굴이 벌겋게 되어 말했다. “하겠어요. 하겠어요.” 숙은 강경했다. 돈에 누이 멀면 인간이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듯했다. 잔인한 박 사장은 자기 앞의 남은 돈을 천천히 세었다. 육천 원이었다. 그는 두 묶음으로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두 번. 이번에는 삼천 원씩 주지.” 박 사장이 졌다. “마저 하겠어?” “그럼요.” 숙은 필사적이었다. 이번에는 박 사장이 이기고 그녀가 윗옷을 벗어버렸다. 승준은 견디다 못해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박 사장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돈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알았지? 자네는 외국에 나가면 돈의 노예가 되지 말게. 그리고 귀국하면 돈만 아는 이 나라를 좀 바로잡아 주게.” 그러면서 승준의 손을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몇 번씩 손을 다독거리며 십만 원 뭉치를 그에게 주었다. “자네는 모를 거야. 나는 돈 때문에 그보다 더한 모욕을 얼마나 당하며 살아왔는지 모르네. 그 분풀이를 불쌍한 저 애들에게 하는 건 내가 잔인한 탓이지만 나는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어.” 그러면서 택시를 타고 혼자 가버렸다.
출발을 이틀 앞두고 그는 서재를 정리했다. 책은 다 뽑아 분류해서 상자에 넣고 식별할 수 있는 이름을 붙였다. 혹 필요할 때는 아내가 찾아 보내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랍 속 자질구레한 것도 다 정리했다. 여권, 예방주사 증명서, 비행기 표, 찾아갈 대학 구내 약도, 공항에서 식별하기 위해 미리 나누어 준 배지 등을 챙겨 놓자 새로운 미지의 희망이 솟는 듯했다. 그는 서랍에서 묶인 한 뭉치의 편지를 보자 꺼내어 읽어보고 싶어졌다. 결혼 전 경옥이 보내준 것이었다. 하나를 뽑아 읽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에 파묻혀 명상에 잠기는 선생님의 모습은 더 없이 멋있을 것 같아요. 양지바른 곳에 서재는 꼭 하나 꾸며야겠어요. 푹신한 의자도 좋지만, 롤링 채어도 어떻게든 하나 구해야겠어요. 앉아 계시다 지루하시면 그곳에 앉아 앞뒤로 흔들며 쉬실 수 있게요. 저는 좋아하는 피아노도 이 집엔 가져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답니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요 어린애가 둘이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땐 그들 방에 공부하는 책상을 나란히 벽에 붙여 만들어주도록 해요. 양옆엔 각각의 캐비닛을 만들어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하고. 저는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거나 나란히 공부하는 애들 책상 뒤 의자에 앉아서 뜨개질하겠어요.
잊힌 십 년 전의 이야기들이 동화처럼 떠 올라 얼마 동안 멍청히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몇 개의 편지를 더 읽어보고 거짓말같이 순진했던 때 묻지 않았던 옛날을 회상했다. 퍼즐로 아름다운 경치를 맞추어 가듯 그런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이 모습은 초라했다. 편지를 다시 묶어 넣고 방안을 둘러 보았다. 아직도 맞춰지지 않은 퍼즐은 상위에 산만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퍼즐을 흩어놓은 일이 없었다. 그동안 바쁘고 거들떠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심란했던 이 한 달 동안의 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잿빛 한 무더기 색깔들이 분류된 채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갑자기 맡겨 놓은 슬라이드를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최근에 도미한 명 교수가 미국에서는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풍속이나 관광지를 소개하는 슬라이드 필름을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는 편지가 와서 현상소에 맡겨 놓은 것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사흘 남았는데 금년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모양이었다. 외출하는데 몇 시에 오겠느냐고 아내가 또 물었다. “한 시간 뒤에.” 그는 먼지가 꽉 낀 철조망에 걸려 있는 <피아노 개인지도>라는 집 앞에 걸린 아크릴을 쳐다보면 말했다. “빨리 오세요. 가지고 가실 옷을 같이 담아야지요.” 현상소에 들러 오는 길에 그는 다방 <무지개>로 갔다. 떠날 때 박 사장과 무이자로 빌린 돈의 변제 이야기도 하고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그는 승준의 좋은 친구였다. <무지개> 앞에 이르자 그는 문전에 즐비한 축하 조화가 놓여 있는 것에 놀랐다. 크리스마스 계절에 무슨 개인전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고 문 앞까지 간 그는 더욱 놀랐다. <무지개>라는 간판 대신 <환상>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렸나?)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사람들이 가뜩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하는 레지들도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고 있는데 미스 남이 질겁을 하며 다가왔다. “어머, 유 선생 아니세요?” 겨우 자리를 하나 찾아 앉자 그녀는 곁에 앉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선생님, 박 사장님 소식 아세요?” “소식이라니?” “선생님께도 말씀 안 하셨어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는데.” “짜라시 놓았어요. 찌리시.” “뭐라고?” “아 글쎄, 누기 크리스마스 때 한몫 안 보고 도망가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승준은 망치로 한 데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지?” “뻔하지요, 뭐. 빚 때문이지요.” “빚이 얼마나 됐기에?” “누가 알아요. 아유 말 말아요. 요즘 찾아오는 빚쟁이 때문에 북새통이에요. 미스 허 있잖아요? 그 애도 십만 원이나 뗐다고요.” 길을 향한 창가 의자에 나흘 전에 봤던 대머리 신사가 앉아 있었고, 카운터에는 그때 같이 온 부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날 밤 술집에서의 일들이 훤하게 떠올랐다. 특히 헤어지면서 ‘돈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알지?’라고 말하며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며 그래도 그에게 십만 원 뭉치를 안겨 주었던 일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잘했지 뭐예요.” “잘했어?” “살려면 별수 있어요? 내 돈 못 떼먹어 약오르겠지만.” 미스 남은 벙글벙글 웃으며 사라졌다. (역시 그랬군.) 어쩐지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이 어처구니없이 짝짝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경옥은 농 속의 옷들을 꺼내놓고 방안을 잔뜩 어질러 놓고 있었다. 승준은 경옥의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아니에요. 애들이 수선을 피워 좀 때려 주었더니 눈물이 나는군요.”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널려 있는 바지를 가리켰다. “결혼하실 때 입었던 것인데 이젠 못 입겠지요?” 그녀는 승준이 몇 번이나 이제는 그만 싸서 다니고 누굴 주거나 버리라고 했으나 기념이라고 가지고 다니던 옷을 가리키며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니까.” “뜯어 큰애 바질 해 주어도 괜찮겠지요?”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본 채 말했다. “당신은 폐품 활용이 대단하군요. 그만 버려도 된다는 데.” “이 오버도요?” 그녀는 닳아 털이 문드러진 외투를 가리켰다. “아무렇게나.” 그러다 승준은 정신이 바싹 들어 경옥을 내려다보았다. “여보.” 그녀는 더 큰 눈물방울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일어서며 미소하였다. 승준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하고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두꺼운 통치마와 버선발을 내려다보았다. “여보.” 승준이 팔을 벌리자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힘있게 그녀를 포옹하였다. 언제나 향기로운 머릿기름 내음이 그를 행복에 취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무지갯빛의 나이트가운도 해 주지 못했고, 아담한 집 한 칸을 바랐는데 그것도 해 주지 못했다. 이 순간은 수많은 한국 어머니들의 머리에서 역하게 나는 머리 내음이 콧날을 시큼하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너를 놓아두고 내가 어떻게 떠나지? 내가 무슨 장래의 약속을 해 줄 수 있을까? 여기 머물러 함께 고생하고 싶다.) 이것이 승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글은 1971년 월간문학 6월호(32호)에 실린 것을 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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