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작가와 작중 인물과의 갈등, 오승재 작품론, 송하섭, 2019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6. 05:19

작가와 작중 인물과의 갈등, 오승재 작품론, 송하섭, 2019

은혜 추천 0 조회 52 20.03.08 14: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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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중 인물과의 갈등

-오승재 초기소설 이야기

 

송 하 섭

 

1. 들어가는 말

 

오승재의 첫 단편소설집 아시아가 출판된 것은 1971년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집을 받아들으니 감회가 깊다. 작가 오승재는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第三埠頭로 등단하여 10여년 간 발표한 소설을 모아 작품집을 간행한 것이다. 그는 전주에서 대전에 와 그의 모교인 숭전대학에서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나는 국문학과 강사로 나가면서 만났다. 당시 대전에는 소설가로 등단한 작가가 두세명에 불과한 때이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자연스레 자주 만나면서 발표한 작품이 상당량이 되니 작품집을 출판하자는 의견이 모아젔다,

그런데 대전에는 몇몇 인쇄소가 출판사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소설집을 간행한 출판사가 없었다. 그래 오작가는 나와 같이 대전에서는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출판사를 시작한 호서출판사에 이야기 해서 간행하게 되었으니 아마 대전에서는 양장본으로 책다운 책이 처음 출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세로줄 인쇄로 활판 인쇄였는데 그 제작 과정도 복잡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보니 고서 기분이 든다.

13편의 단편인데, 현대문학지에 발표한 소설이 8편으로 제일 많고, 사상계, 원간문학, 새시대문학에 각 1, 그리고 데뷔작을 합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에는 문단 등단의 길이 문예지 추천과 일간 신문의 신춘문예가 전부였는데 신춘 출신들은 발표지면이 잘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들을 할 때인데 이처럼 문예지인 현대문학에 계속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소설이 문학계에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 대하여 평론가 김 현, 백 철, 김치수, 그리고 소설가 이호철, 이무영 등 당시의 쟁쟁한 문인들이 월평 등으로 관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다작의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수학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결코 과작의 작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발표할 때마다 평자들의 관심을 모은 것으로 보아 의미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단지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유학 등 수학자의 길에 집중하면서 상당 기간 작품에 소홀히 하다가 정년을 맞으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왕성하게 집필하고 있다. 지금도 그는 90을 바라보는 연치에 열심히 건강한 모습으로 글을 쓰고 있는 노력이 아름답다.

2005, 그러니까 첫 단편집을 출간한지 34년이 지나 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장로직에서 은퇴한 후 창조문예사에서 다시 단편집 없는 앞에를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1971아시아제에 실은 아시아제, 日製 , 二次的 工作, 第一敎會, 大成里敎會, 食母, 6편을 다시 싣고, 노란 고양이 눈, 解雇, 푸레쉬먼의 回顧, 思索周邊,」 「한나절의 素描, 第三埠頭 6편을 제외하고 업는 앞에, 루시의 방한기, 기도,」 「하늘나라로 통하는 여행, 내 손으로 밥을 지어주고 싶다, 평화회담, 7편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발표한 단편들 중 교회와 기독교인을 주제로 쓴 것들을 모아 책을 냈다고 머리말에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그만큼 기독교 관계 소설에 중심을 두고 쓴 소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 한다고 할 때 첫 단편집 아시아제에 실은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할 것이다.

 

2. 작가의 시각

 

그는 첫 작품집 서문에서 작품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은 흠 많은 자기 알몸을 공개하는 것만치 참으로 부끄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자기 작품에 대한 문학적 가치를 이야기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 속에 자기의 내밀한 생각을 공개한다는 데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무엇을 쓰게 되는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을 말하고자 쓰는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 살아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렇다면 작가 오승재는 우리 사회, 우리 삶에서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가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중심이 될 것이다.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 학병으로 소집되어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부두에서 근무한다. 그때 하역작업을 하면서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를 보고 第三埠頭를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하게 된다. 그리고 군 생활에서의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빨지산 유격대의 변전소 폭파 임무를 띠고 작전에 임해 결국 생명을 해고 당하는 이야기인 解雇와 의식적이면서 우화적 세계를 다룬 二次的 工作도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6년에 한미교육위원단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하와이에 유학하게 된다. 거기에서의 체험이 아시아제, 일제 맛, 노란고양이 눈으로 표출되고 있다. 하와이에 모인 유학생들의 행태를 통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무질서한 기질이라던지 의식을 조명한 아시아제, 그리고 역시 하와이에서 만난 일본 여인과의 애정에 개입된 민족의식을 다룬 일제 맛, 또 하와이에서 살기 위하여 취업한 부동산 소개소에서 만난 노란 눈을 가진 미국인 소장의 가증스러운 행태를 이야기 한 노란 고양이 눈, 이렇게 오작가는 그가 생활해 온 사회적 환경에서 정상적이지 못한 문제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청년기의 대학 생활을 경험하면서 얻어진 애정 문제를 다룬 프레쉬먼의 회고, 한나절의 소묘가 있다. 대학 캠퍼스에서 처음 만나 연정을 느낀 여학생이 자기를 낳아놓고 부자집 첩으로 들어간 어머니의 딸이라는 기구한 이야기인 푸레쉬먼의 회고, 취업난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한심한 한나절을 묘사하고 있는 한나절의 소묘, 세상살이에 실패한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숙부집에서 만난 사촌 여동생에게 연정을 느껴 고민하는 근친 애정의 갈등을 다룬 사색 주변이 있다.

그리고 종교를 가지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 교회와 신앙을 주제로 한 제일교회, 대성교회, 식모가 있다. 지역에서 세워진 역사가 오래이면서 전통을 가진 교회에서의 신앙문제를 제기한 작품이 제일교회라면, 새로 세워지는 교회의 지도자 난을 그린 작품이 대성교회이며, 광신에 가까운 식모를 내세워 참 신앙의 문제를 제기한 소설이 식모이다.

그는 이처럼 그의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우리의 생활 반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어서 절대 난이하지 않다. 누가 읽어도 편안하다. 그의 작품에는 영웅이 없다. 진저리칠 정도로 생활의 역경을 이겨내거나 몰락하는 인물도 없다. 많은 작가의 작품들은 인생의 기구한 운명이나 역경을 이겨내는 히어로들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작품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활 현장에서 만나는 장삼이사들이다. 교회의 문제를 다루다보면 목회자의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마련인데,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지도자급 목사가 등장하지 않으며, 6.25같은 전란의 과정에서 특별히 종교적 헌신을 한 목사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순교하는 목사나 교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사회에서 평범한 교회를 이끄는 정말 우리 교회 목사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평범 속의 아주 일상적이라 할 생활 속에서 작지만 깊은 의미를 가지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하와이에 유학 가서 만나는 인물들도 거창한 민족 지도자나 종교지도자가 주 인물이 되지 않고 여러 유형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따라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극도의 흥분이나 주먹을 움켜쥐게 하는 격분, 혹은 슬픈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 그만큼 우리와 가까운 인물들을 통하여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몇 편 쯤 사랑의 이야기를 쓰지만 그의 사랑 이야기는 비극적인 이별이나 목숨을 걸만한 장애로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거대담론의 소설이 아니라 미세담론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에는 과장이 없다. 흔히 과장을 통해서 극적 효과를 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이 없어서 오히려 나의 문제나 우리의 문제로 곧바로 인식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기구절창한 스토리로 독자들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소설가 오승재의 진실인 것이다. 기교보다는 진실을 중시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교회를 비판하는 글이라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었고, 또 제대로 치지 않고 왜 솜방망이로 치느냐고 꾸중하는 분들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솔직히 저는 제 식구들을 칠 생각도 없고, 또 그것이 문학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슴아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제가 먼저 아파해서 그렇게 형상화 했을 뿐이라.”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 작가와 유학생들

 

 

김 현은 단편집 아시아제의 발문에서

 

그의 단편들은 크게 나누면 세 개의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아시아제처럼 외국에서 공부한 자들의 패배주의를 그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제일교회처럼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를 비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가정생활이나 소시민의 애환을 그린 것들인데 그 어느 것에도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자들이 보는 현실의 한심함이 드러나 있다. 아마도 그는 연구실의 책상 위에서 만나게 되는 --- 질서정연한 세계와 퇴근해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만나게 되는 부조리한 일상생활 사이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 아마도 그로서는 그러한 간극을 메꾸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모양인데 그러기에는 소설은 너무나 조잡하며, 그렇다고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기에는 주위의 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수의 세계가 너무 정연할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이는 단편집 아시아제에 들어있는 13편의 작품을 세가지 경향으로 분류하고 수학자인 오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하여 고민하는 내적 고뇌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확실이 오작가와 만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렇게 성실하려고 하는 그의 눈에 비친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노력한 일련의 결실이 그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는 작중 인물 사이의 갈등 보다는 작가의 내면 세계와 작중 인물들과의 갈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오작가는 정년 후 다시 정리해서 사실상 첫 소설집으로 간행한 신 없는 신 앞에서에 단편집 아시아제에서 김 현이 지적한 가정생활이나 소시민의 애환에 해당한다는 작품을 제외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작품적 가치를 저평가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프레쉬멘의 회고한나절의 소묘, 그리고 사색주변은 맺을 수 없는 환경에서의 애정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소재 자체가 다소 진부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귀는 여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새로 만난 남자의 딸이었다는 운명적 이야기나, 아빠가 떠나서 고생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잘 사는 삼촌 댁에 갔다가 만난 사촌 여동생과의 애정 이야기는 고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운명담으로 참신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하겠다.

단지, 다른 작가들의 경우에는 버린 자와 남은 자인 작중 인물의 고난 같은 것을 갈등 구조로 설정할 텐데, 오작가는 그런 배경은 가급적 생략하고 남녀 당사자들만의 애정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 특이점이 찾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소시민적인 주제의 작품을 논외로 한다면 유학생의 문제를 다룬 작품과 기독교 문제를 다룬 작품을 중심으로 초기 소설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아시아제를 작품집의 제호로 할 정도로 유학생활을 통하여 얻은 작품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다시 정리한 단편집의 제호를 신 없는 신 앞에서로 삼은 것은 그만큼 자기의 기독교 관계 소설을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평자들도 이 두 계열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시아제는 한미교육위원단에서 장학생으로 뽑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온 사람들이 작중 인물들이다. 장학생이라 했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인물들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고 김가, 고가, 허가, , 미시즈 허, 등으로 성만 제시된다. 이는 김가의 경우 수 많은 김씨를, 고가의 경우 수 많은 고씨를 대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작중 인물은 특정인이 아니라 한국인 누구일 수도 있다는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런 의미로 상징화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당시 미국에 유학해 온 모든 사람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 쎈터에서는 각국의 민속 예술을 공연하여 상호 이해도를 높이려는 예술제를 개최한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공연하는 과정에 우리 한국 유학생들의 행태를 들어냄으로 젊은이들의 기질이나, 특성, 내지는 국민성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작품 가운데에는 조국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한 것이 있고, 일본 여자 유학생과의 사랑 이야기도 있으며, 가난한 조국의 일화도 있고, 하와이에 와서 술집을 경영하는 여인의 이야기도 있지만, 주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사건은 하와이에 온 한국 유학생들이 여러 나라 학생들과 겨루는 민속경영의 행사를 어떻게 진행하는가가 관심의 초점이라 할 것이다.

우선 협동성의 결여를 들었다. 도무지 협동이 안 된다. 정해진 시간에 모이기를 하나 회장의 부탁을 순수히 받아들이기를 하나 합창을 하는데 화음을 하나, 참여하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 중심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 회장은 협조가 안 된다고 회장직을 내 놓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만리타국에서 만났으면 공속감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우선 이 행사에서 어떻게 하던지 잘 해 보아야 하겠다는 일치된 의기의 투합이 안 된다.

모두 갈 생각 뿐이다. 회의는 흥미가 없는 듯이 날치기로 진행되었다.” “사실 모두들 이 귀찮은 일을 누구에게든 떠맡기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중요한 회의 인데 콩가루 집안처럼 다 한마디씩 지껄이고 가버리면 그만이었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전혀 진정성이 없다. 맥주나 마시고, 화투나 치고, 아리랑 술집에나 가려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는 향수병에 대한 타령이나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같은 의식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일반적인 기질처럼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고 고국에서도 수많은 파당으로 나뉘어 자기 개성대로 생활하려하는 속성이 해외에서라고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행사는 치루어 낸다. 행사준비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기발한 발상들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가령 마지막 리허설에서 개판이 되었는데도 합창의 실패에 주눅 들기보다는 빨간 마후라를 기분 나는 대로 힘차게 부르자든지, 즉흥적으로 강강수월래를 술 한잔 들고 신바람 나게 놀이를 한다든지, 꽹과리 북 장구 징을 울려 농부가를 부른다든지 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흥을 공연으로 올려서 진행하자고 합의를 본다.

그리고는 모두 어울려 한국인이 경영하는 술집 아리랑에 몰려가 술타령을 하고 공연에 가서는 신나게 놀아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끝맺는다.

한국 학생이 최고지? 잘 생겼겠다 똑똑하겠다, 공부 잘하겠다, 사실 못하는 게 뭐 있나? 연앨 못하나?”

이렇게 스스로는 모두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막상 여럿의 힘을 모아서 해야 하는 일에는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절박하면 임기응변으로 일을 치루어 내고 그런대로 성공한다. 준비엔 치밀하지 못하지만 흥만 돋우면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기질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학생의 패배주의를 표현 했다는 김 현의 지적은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는 하와이에 와서 일본 여자 유학생인 가쓰꼬와의 연애담을 그린 작품이 일제 맛이다.

 

, 정복했니?”

뭘 말이야?”

가쓰꼬 고년 말이다.”

그건 너무했잖아.”

뭐가 너무해? 갖고 놀 생각 아니면 너는 친일파거나 매국노야

 

소설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나, 특별히 친절히 접근한 가쓰꼬와 사귀는 에게 친구 김가가 들이대는 말이다. 과거 일본인에게 수 없이 당한 역사적인 비극이 가슴과 머리에 짙게 각인된 한국 유학생 친구들은 내가 일인 여인과 연애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중 인물인 나는 1년 먼저 와서 자리잡은 일본 여인, 그녀는 자가용차까지 가지고 있고 여러 면에서 나보다는 우월한데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가쓰꼬가 싫을 수가 없다.

친구는 어린 시절의 송탄 따기, 건초 베기, 근로동원, 죽창훈련 등 지긋지긋했던 일제 교육에서부터, 명치 9년의 무관세 무역장정, 동양척식회사를 통한 수탈, 을시 늑약, 심지어는 소총을 실험해 본다고 어린애를 업고 가는 한국 부인에게 총질을 하는 등 죄 없는 양민의 학살 등 가지가지 만행을 이야기 하면서 절대 일본 여인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는 조상 정치가들의 죄를 아무 것도 모르는 후손이 져야 하느냐?”는 의견에 . 져야지. 아담의 죄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듯 회개하지 않고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라면서 기독교의 원죄 사상까지 동원하면서 일본 것들은 육체를 농락할 것 밖에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욱박지르고는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다그친다.

반면, 가쓰꼬는 이런 설명에 대하여 몰랐던 일이라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들 국사책 맨 뒤에 두장 쯤 쓰여 있어무슨 일인지 기억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인들 친구들도 자기가 한국인과 사귀는데 대하여 싫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너를 좋아하는 한국인은 색마라고 규탄 까지 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이런 비련의 애정 문제는 이미 다른 작가에 의하여 여러번 제기된 바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결말은 좀 다른 데가 있다. 양쪽 친구들의 반대 속에서도 사랑의 행각은 여러 형태로 지속되는데 급기야 까쓰꼬의 귀국을 앞둔 연말 미팅에서 여인의 적극적인 욕구로 몸을 결합하고 만다. 그러고 나서 가쓰꼬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사실 난 처음부터 가쓰꼬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복스럽고 예쁘고 명랑해서 욕심을 냈던거지.”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 말조차도 호의로 아는 가쓰꼬에게

내일부터 난 한국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쓰꼬를 정복했소 하고 광고를 할 셈이요.” 라 하자 표정이 바뀐 가쓰고는 결별을 선언한다.

폭죽놀이에서 돌아 온 나에게 친구들이 여전히 정복했느냐는 질문에 정복하지 않고 정복 당했다고한다. 이 결말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사랑의 장애로 다가온 민족 감정에 굴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찌 보면 현대인의 성에 대한 가벼움을 말한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는 민족적 갈등에 개인의 사랑을 희생하는 것이 아닌가. 한일 관계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임을 들어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오작가가 이념의 세계, 즉 종교적인 규범의 세계를 중시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 한 작품, 노란 고양이 눈도 하와이 체험의 소산이다. 도대체 노란 고양이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태평양부도산소개소 소장의 우묵 들어간 눈자위에서 노란 고양이 눈을 보았다.“고 쓰고 있다. 소설 화자 는 한국에서 안주하지 못해서 하와이로 왔다. 그리고 부동산 회사에 취직했고 그 소장이 모리스인데 그가 곧 노란 고양이 눈을 가졌다.

소장은 가지가지 감언이설을 통하여 중개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전화번호부를 내놓고 전화로 투자를 권유하는가 하면 개발되지도 않을 땅을 개발된다고 속여 투자를 유도한다. 기독교인인 는 이같이 자기 꿈 만을 위하여 남을 생각하지 않는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같이 해야 하는데 대하여 가책을 느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 부동산의 부정한 이야기는 외화(外話)이다. 실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이야기 즉 내화(內話)는 유학 와 있는 박지성이다. 박지성은 기혼자인데 미국에 와서 학위나 따고 자식을 낳아 시민권이나 얻으려는 친구이다. 알고 보니 가 한국에 있을 때 청혼까지 했으나 그 여인의 어머니로부터 서울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 거절을 당했던 정숙의 남편인 것이다.

작가가 주의 깊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부부와 그들의 어머니의 신앙문제이다. 정숙의 어머니와 딸은 성령파이다. 그런데 남편인 지성은 그 반대이다. 하와이에 온 정숙은 남편의 신앙은 물론 현지 교회 신도들의 신앙도 이해되지 않는다.

제 집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은 성신을 받아야 하며, 자기는 성신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성령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일러준다는 거예요여기에 대하여

저는 성신이란 일종의 소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명감도 있기 전에 성신이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건 성신도 아니고 자기 멋대로 그린 무녀도요, 결국 종교와 미신이 구별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이렇게 상극을 이룬 신앙의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정숙을 세탁소에 취업까지 시켜보지만 결국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이 과정을 통하여 작가의 신앙관 까지 읽어 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마지막 자기의 꿈을 접고 귀국하는 장면에서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꿈으로 삼고 사는 노란 고양이 눈의 모리스와, 성령파 신앙의 정숙과, 그 남편 지성의 출세지향적 꿈을 같은 반열에 놓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기독교 신앙을 고민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자각의 신앙관이 표출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오작가는 하와이 체험에서 얻은 이 세 작품의 작중 인물에 기독교 신앙인을 빼 놓지 않고 등장시키고 있다. 아시아제에서 작중화자가 크리쳔이요, 일제 맛의 화자도 교인이면서 몇군데에 성경을 인용하고 있고, 노란 고양이의 눈은 본격적으로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신앙의 문제는 제일교회」 「대성리 교회」 「식모에서 소설의 주제로 발전하게 된다.

 

4. 작가와 신앙, 그리고 교회

 

오작가는 70년대 후반 이후 수학교수 직에 충실한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학위를 취득하고 교육에 전념한다. 북 텍사스 주립대에 가 있는 동안 필자에게 보내 온 편지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국의 대학에서 조교수 인데 여기에 와 보니 수학과에 조교만 70여명이고 공부를 하는 동안 이제야 수학이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지경이라고 써 보내왔다. 그런 충격 속에 전공에 몰두하면서 소설계에서 이름이 잊혀질 정도로 작품 활동은 뜸 했다.

그러다가 단편집 급매물교회의 머리말에 밝힌대로 1998년 은퇴하면서 다시 붓을 들기 시작, 최근 창작집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출간할 때까지 꾸준히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모두가 그의 신앙과 교회 생활을 중심으로 쓰고 있다. 뿐 만 아니라 묵상과 기도집을 7, 간증집, 콩트집 등을 통하여 바른 기독교 생활을 강조해 오고 있다.

그는 아시아제머리말에서 교인이 되면서 고린도 후서 47절의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을 상기하여

 

질그릇처럼 하잘 것 없는 제가 문학을 통해 꽃피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저에게도 한 보물을 담아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이를 길러주심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1970년에 대성리교회, 71년에 식모, 제일 교회, 노란 고양이 눈을 연달아 발표한다. 그의 기독문학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님이 담아주신 보물 같은 능력의 힘으로 쓴다는 일념으로 써 온 것이다. 그러니 그의 문학은 기독교 문학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김 현은 아시아제발문에서 이상론에 입각하여 가르치는 교육과 그것이 실 생활에 적응되었을 때, 일으키는 알레르기성 반응, 교인들의 영혼을 이끌어 가야 할 목사가 성대 좋고 틀 좋은 배우로 변모해야 하는 괴로움, 한국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에 앞서 그가 이념과 현실의 간극이라는 테마를 붙잡은 것은 아무리 치하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고 평했다. 또 작가 스스로도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이라는 타인들의 지적을 인식하면서 끊임 없이 교회의 문제, 교인의 문제,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중수 목사가 지적한 전갈의 독침처럼 한심한 교회의 현실을 지적해준다는 지적은 오작가의 창작 의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창작집에 실은 가독교 관계 소설은 다른 평자에 의해 논의 된다는 설명이어서 여기서는 구체적인 작품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 교인은 천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교회나 교인의 양적 팽창에 값하는 내실 있는 참 신앙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오늘도 그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일호(一毫)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는 수리의 세계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수학 교수가 부조리한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오승재는 이 특이한 작업을 50년간 계속해 오고 있다. 그 스스로도 현재보다 과거에 더욱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문학을 대해 왔다고 밝히고 있거니와 실제로 초기 소설이 그의 소설을 평가하는데 조금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후기로 오면서 기독교 신앙에 더욱 집착함으로 작품 세계가 깊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취재의 영역은 좁아젔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 체험에 상상을 더하여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작가에 따라 체험의 세계보다 상상의 세계가 더 많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작가는 수학자이기 때문에 상상 보다는 현실의 체험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작가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작중 인물끼리의 갈등구조로 소설의 얼개를 짜기 보다 작가 내면의 진실과 작중 인물과의 갈등으로 문제 의식을 제시한다.

6.25 전란 후, 빈곤과 무질서가 팽배해 있었던 6-70년대, 유학생들의 행태를 생생하게 표현함으로 젊은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비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전망이 불투명한 사회에서 치밀한 기획력은 부족하지만 내재되어 있는 고춧가루 같은 기질을 잘 살리기만 하면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저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초기 기독교 소설 역시 작가가 내면에 소장하고 있는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 바른 신자관을 가지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지가지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소설이 앞으로 성경에 준하는 진실의 기록으로 발전할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와 함께 소설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를 같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를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단국대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천안캠퍼스 부총장 역인, 현 단국대학교 명예 교수,

저서에 한국현대소설의 서정성 연구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