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풍자의 관점에서 본 오승재의 기독교소설, 오승재 작품론, 임영천, 2019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6. 05:22

풍자의 관점에서 본 오승재의 기독교소설, 오승재 작품론, 임영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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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풍자의 관점에서 본 오승재의 기독교소설

2창작집 <급매물 교회>를 중심으로

 

임 영 천

 

 

첫 번째 소설집 <없는 앞에>(2005) 이후 실로 9년 만에 오승재 (吳昇在) 작가가 그의 두 번째 소설 창작집을 펴냈다. 이름 하여 <급매물 교회>(2014)이다.

작가의 첫 소설집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제일교회><대성리교회>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두 작품들 속에서 작가가 그 나름의 교회론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작품은 이제 그의 두 번째 창작집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작가가 그의 두 번째 창작집마저 이른바 기독교소설 작품들로 꾸미려 했다고 한다면 더욱 그렇게 보아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면 제1 작품집 속의 두 작품 <제일교회><대성리교회>는 두 번째 창작집 속에 수록된 작품들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금번 창작집 속의 첫 작품인 <급매물 교회><제일교회><대성리교회>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니 <목갈치 교회-> 또한 같은 처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금번의 <급매물 교회><목갈치 교회->는 지난번의 <제일교회><대성리교회>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작품들이라고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금번의 <급매물 교회><목갈치 교회->는 지난번의 <제일교회><대성리교회>와 이른바 텍스트상관성을 지니는 작품들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상정해 볼 수 있는 여러 상관성의 아이템 가운데서 필자는 특히 풍자성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풍자(諷刺, Satire)의 사전적 의미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문학 작품 따위에서,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빗대어 비웃으면서 씀으로 되어 있다. 김용직(金容稷)도 그의 <문예비평용어사전>에서 이를 같은 시대 사회의 결함이나 병폐, 악덕과 우행(愚行) 등을 지적하여 비꼬아 공격하며 조소하는 방식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다음의 문제들이다. 공격이나 비난의 주체(主體)’대상(對象)’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하겠다. 누가 누구를 규탄하고 공격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점을 바르게 인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김용직은 같은 사전을 통해, 이어서 이렇게 설명한다. “본래 풍자는 표면상 힘이 모자라는 쪽에서 상대방을 비웃고 꼬집는 한 방식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힘이 모자라는 쪽약자 편이라고 바꿔 표현할 수도 있다면 상대방은 자연히 강자 편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위의 표현을 바꿔서 다시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 되겠다. “본래 풍자는 표면상 약자 편에서 강자 편을 비웃고 꼬집는 한 방식이라고····. 이는 한용환(韓龍煥)이 그의 <소설학 사전>에서 풍자는 특히 사회가 이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을 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라고 한 표현과 수평을 이룬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하부구조의 약자 편이 상부구조의 강자 편을 공격하는 수단이 바로 풍자라고 했을 때, 우리는 사회적 통념상 사회정치적으로(또는 사회경제적으로) 무력한 계층이 그 반대편이라고 할 기득권층을 공격하는 수단이 곧 풍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나 풍자의 실상이 반드시 그런 것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섭(李商燮)은 그의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 풍자(또는 풍자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다. 풍자하는 이는 풍자의 대상에 대하여 우월한 자세를 유지하게 되고, 그 때문에 예로부터 도덕적 우월성을 지닌 풍자가(諷刺家)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들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인류에게 교훈을 주려 했으니, 결국 풍자의 목적은 현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통해서 사회악을 제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상(以上)으로 살펴본 풍자 문제에 대한 김용직과 이상섭의 견해는 서로 약간의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전자는 약자의 강자에 대한 공격 수단이 풍자다, 라는 입장이고, 후자는 도덕적 우월자가 도덕적 열등자를 규탄함으로써 인류에게 교훈을 주려 하는 것이 풍자다, 라는 관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興味로운] 사실은 공격을 당하는 편[對象], 전자의 강자와 후자의 도덕적 열등자가 대체로 일치하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강자 = 도덕적 열등자’, 라는 공식(등식)이 성립될 수도 있을 것이란 말이다. 강자로서의 사회 지배계급은 일반적으로 권력과 금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에 따른 법질서 무시, 윤리의식 부재, 도덕 불감증···· 도덕적 열등자에 속하는 인사들이 꽤나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강자는 도덕적 열등자, 라는 일종의 등식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격을 주도하는 편[主體], 전자의 약자와 후자의 도덕적 우월자도 또한 서로 일치하는 수가 많은 것일까? 다시 말해 약자 = 도덕적 우월자’, 라는 등식이 대체로 여기서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 공식이 반드시 성립된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활 경험에 의할 때 이 등식이 전혀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만일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기득권층을 상대로 해서 조롱을 감행하거나 공격을 가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무모한 행위로밖에 비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때의 그 공격자[諷刺家]를 일단 도덕적 우월자로 보지 않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사회 통념상 가진 것이 없는 부류의 인물일 개연성이 크다고 보겠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고 가재는 게 편이란 말도 있듯이, 강자가 강자를 옹호하면 했지 조소(嘲笑)의 대상으로 삼을 리 만무한 것이다. 곧 약자가 강자를 조롱하거나 공격하게 되는 것이며, 그때 그 약자가 최소한의 도덕적 우월성은 지녀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결국 약자 = 도덕적 우월자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특히 문학과 관련된 풍자의 문제를 다루므로 문학 작품상에 나타난 결과를 토대로 하여 이 문제(물음)에 접근한다면 더욱더 약자 = 도덕적 우월자라는 등식이 대체로 성립한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사회 통념상 강자로 분류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든 작가는 강자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약자의 처지에 놓일 여지가 많은 것이다. 작가에게는 그의 삶의 자리, 곧 주위 환경이나 시대적 여건에 따라 강자 편을 공격하는, 필시 약자 편에 선 도덕적 우월자가 되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어문각 <한국문예사전>풍자문학편을 잠깐 참조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나라는 1930년대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해 지면서 일부 작가들이 사회적 부조리를 작품화하고자 했으나 강자(곧 일제) 의 탄압으로 인해 그 일이 어려워지게 되자, 그 탈출구로 풍자적 수법을 써 서 간접적인 현실비판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일이 말하자면, 도덕적 우월자인 작가(곧 약자)가 식민지 침탈을 강행한 도덕적 열등자 약소국을 침략한 악덕자일제(곧 강자)에 대하여 조롱하고 비판(공격)한 문학적 풍자였다고 보겠다. 그런데 각도를 좀 달리해, 작가가 기독교회에 깊이 관여되어 있거나 또는 그것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을 경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유사한 사례가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예로부터 기독교회는 예수의 본뜻이나 그 고귀한 정신의 고양과는 달리, 교회 회중들을 억압하고 파행적으로 운영해 온 과오가 많았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편이다. 중세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은 그것을 역으로 증명해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어떠한가? 조금 과장해 표현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거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위에서 살펴본 어문각 <한국문예사전> 식의 표현을 빌려 오늘의 교회 문제에 적용(변용)시켜 본다면 어떠할까.

 

 

한국 교회는 오늘날 교회 회중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강화되고 종교사 회적 모순이 심해지면서 일부 작가들이 교회의 부조리를 작품화하고자 하나 강자(곧 교회)의 감시체제로 인해 그 일이 쉽지 않게 되자, 그 탈출구로 풍 자적 수법을 써서 우회적인 교회비판의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도덕적 우월자들을 박해하였다. 문학계의 작가들도 교회 당국으로부터 그런 박해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문학의 대가들이었던 도스토옙스키, 니코스 카잔차키스, 엔도 슈사쿠 등에게서 대표적으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이들은 러시아정교회, 그리스정교회 또는 일본 가톨릭교회 등으로부터 파문(출교) 처분을 받은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곧 도덕적 우월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탄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특히 그가 교회 문제에 간섭(개입)하게 되면 교회 당국으로부터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작가 아닌 일반 신도가 교회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그 비판의 파급 효과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서도 교회 측이 크게 신경 쓰게 마련이라고 하겠다.

작가 유재용의 중편소설 <위대한 환상>(1996)에는 주님영광교회의 정책 여러 비합리적 관행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는 평신도 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치구 집사이다. 정 집사는 교회 대표인 김장수 목사의 교회신축운동에 앞장서 반대하는 이성적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담임목사의 독단과 전횡에 용기 있게 항거하는 투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반대운동 때문에 그 교회에서 파문 처분을 받고 추방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만일 이 정 집사가 작가 신분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든다. 그렇다면 상황은 훨씬 더 흥미롭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작가신분의 주인공이 교회 당국의 정책에 맞서 항거하는 내용의 어떤 소설 작품이 있다면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지만, 과문(寡聞)에서인지 아직 그런 작품을 보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결국 우리는 도덕적 우월자(곧 약자)인 작가가 현대 교회(즉 강자)의 모순과 우행을 풍자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그 도덕적 비판을 통해 종교사회의 악을 제거하는 일을 수행하는 작품들에 대하여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다.

작가 오승재의 첫 창작집 속의 소설 <제일교회><대성리교회> 등은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의 작품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창작집 속의 <급매물 교회><목갈치 교회-> 등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에 이르렀다. 먼저 말하기로 하면 이 두 작품은 그 풍자의 특성으로 보아 <제일교회> 쪽의 것이 아니라 <대성리교회> 쪽의 것이라고 보는 게 온당하리라고 생각한다. 즉 강력하고 직접적(적극적)인 풍자 쪽이라고 하기보다는 미세하고 간접적(소극적)인 풍자의 성격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노골적인 풍자보다는 은근한 풍자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는 말로도 이해되는 그런 성격의 풍자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밖으로 드러난 요란한 풍자보다는 내적인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그윽한 풍자, 즉 내재적 풍자라고 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재적 의미의 풍자는 그 나름으로 은근하고도 뜻있는 풍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차제에 강조되어야만 할 것 같다. 왜냐면 그런 풍자가 요즈음엔 훨씬 더 업투데이트(up-to-date)한 풍자로 여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목갈치 교회->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살펴보면 위의 판단이 무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사 자주 바꾼다고 천당 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목갈치 교회->란 작품의 이 마지막 문장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풍자가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사 갈아 치우는 데 이골이 난 교회의 교인들이 그 일목사 갈아 치우는 일로 천당 가는 데 무슨 큰 불리할 일은 없으리라는 타산을 하고 있는 형식주의적인 신앙인에 불과함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지적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풍자의 대상이 목사 쪽이 아닌 평신도 군()이 되고 있다. 내재적 풍자의 대상이 이처럼 평신도 군으로 이동하고 있음에 유의할 일이다.

그들은 극도의 타산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신도들이다. 극도의 보수적 신앙을 지니고 있는 그들은 일반 사회에서 왕 노릇하며 살았듯이 교회 안에서도 늘 왕 노릇하며 살려고 한다. 그 때문에 교회 내에서 누구[목사?]에게도 결코 지려고 하지 않는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목사를 갈아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근무 연한(7)이 찼기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는 식으로 갈아 치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 7년의 목사 연한제(年限制)란 얼마나 큰 무기인가.

목갈치 교회의 담임인 천 목사는 이제 7년이란 연한이 다 찼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내세운 이런저런 억지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이 교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마 그가 교인들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었더라면, 아니, 요구 조건을 들어 주겠노라고 약속을 할 마음만 먹었더라도 그곳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 목사는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유레카(발견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끝으로 며칠 뒤 교회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급매물 교회>에서의 상황도 오십보백보다. 이 교회에서의 풍자 대상은 평신도 대표인 이인식 장로라고 보아야겠다. () 장로는 이 교회에서 거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지니고 있다. 교회가 월세도 못 낼 정도의 부도 상태에 이르자 급매물교회 광고를 낸 뒤 이를 보고서 담임을 맡겠다고 응한 새 목사를 받아들이면서 옛 목사를 쫓아냈다. 새로 들어온 천 목사는 아예 사례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목회 시무(視務)를 시작했는데, 그 목사는 그만큼 자기중심적인 목회를 지향한다. 단순히 고집불통의 목회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서 중심의 목회, 하나님 중심의 목회, 곧 바른 목회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는 교회를 물량적으로 키우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경고하면서 올바른 방향의 목회를 지향하였다.

그런데, 사례도 받지 않고 시무해 온 천 목사였지만, 그리고 세속에 물든 교회가 아닌 참[眞正] 교회를 지향한 그였지만 이미 세속화된 교회를 더 편하게 여기는 교인들과의 견해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2년의 목회 기간을 다 채우려던 즈음 미국의 친구 목사가 암에 걸려 2개월만 도와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도미한 것이 결국은 그의 현장목회의 종말이 되고 말았다. 이인식 장로가 목사 부재 시에 교회를 급매물로 다시 내놓아 이미 그 교회는 다른 목사에게 넘어간 뒤였다. 귀국한 천 목사가 이 장로에게 교회 매매의 불법성을 추궁했으나 이 장로는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이 급매물 교회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고 말았다.

 

오승재의 첫 창작집에 실린 <제일교회>에서는 원목사가 강자였다. 그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까지 합세해 결속된 당회가 공고한 아성을 형성한 채 외부의 도전에 대해 철저한 박멸책을 쓰는 강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풍자[공격]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같은 첫 창작집의 <대성리교회>에서는 세 명의 교역자들을 자꾸 갈아 치우는 교회 회중들(달리 말해 평신도들)에게 은근한 풍자의 화살이 날아갔었다. ‘대성리교회에 대한 풍자의 정도만큼 오 작가의 제2창작집에 실린 <급매물 교회>란 작품에도 유사한 열도(熱度)의 풍자가 가해지고 있다. 교회의 위기 때마다 교회를 급매물로 내놓아 능수능란하게(?) 사태를 처리해결하는 이 작품 속의 평신도 대표 이인식 장로에 대한 풍자의 열도만큼, 평신도들이 거의 쥐락펴락하다시피 한 <목갈치 교회->의 실상에 대해서도 유사한 풍자의 열도가 느껴지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창작집 속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제사장과의 대화>가 일단 우리의 유다른 관심을 끈다고 보아야겠다. 목회자 신분인 정 목사에 대한 풍자가 매우 강한 작품이라는 뜻에서이다. 1창작집 속의 <제일교회>와 관련지어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판단에서이다. <제일교회>에서 목회자에 대한 풍자가 강했듯이 <제사장과의 대화>에서도 목회자 신분인 정 목사에 대한 풍자가 의외로 강한 편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정 목사와 박 권사가 일종의 정면 대결을 한다. 평신도인 박 권사가 자신의 교회 담임인 정 목사와 어느 면 정면 대결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짙은 안개 속 길 가운데서 우연히 만나게 된 제사장과의 대화가 큰 힘이 되었다고 보겠다. 박 권사는 그 제사장과 만나서 대화하기 이전엔 소위 제사장 직분과 목사 직분에 대해서 제대로 구분해 설명할 줄 몰랐었다. 그러다가 그 제사장을 만나 대화를 해 보고 난 뒤, 목사가 평소 자신을 제사장으로 알고 그렇게 행세하는 일에 대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분명히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특히 목사가 자주 일천 번제(一千燔祭)에 대하여 강조해 온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이고 비기독교적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 제사장은 박 권사와 대화하는 가운데 신랄하게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비판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는 그 제사장은, 목사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며 또 드릴 필요도 없으니, 목사가 스스로 제사장입네 행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 단 하나님께서 맡긴 양 무리를 치고 고난의 증인으로 사는 본이 될 책임을 지닌 이가 바로 목사라고 그 제사장은 박 권사에게 설명한다. 그러면 목사를 선지자로 볼 수는 있겠는가 하고 묻는 박 권사의 질문에 제사장은 지금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말하기만 한다면 그는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지.”라고 말해, 박 권사에게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는 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런 제사장과의 대화가 있은 뒤, 박 권사는 또 길가에서 우연히 담임 목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정 목사는 이번에 자기가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가게 되었는데 박 권사가 동행해 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목사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박 권사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이번에도 몇 사람 동원해서 분위기 좀 띄워 주시오.” 정 목사는 박 권사를 이번 부흥회에서 일종의 분위기 메이커로 써먹겠다고 주문하는 것이었다. 과거엔 담임 목사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제사장과의 대화가 있은 뒤론 전혀 달라진 박 권사였다.

박 권사의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에 정 목사도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일천 번제라는 구약 시대의 관습을 신약 시대에 와서 견강부회로 적용시켜 교회 재정을 불려 보려는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관행에 연약한 여성 신도가 반기를 듦으로써 담임 목사를 굴복시킨 셈이었다. 일종의 꼼수에 저항하는 박 권사의 언동에서 날카로운 풍자가 엿보이며, 이를 개신교권 전체에까지 확장시켜 비판하는 작가(화자)의 필치에서 섬직한 풍자를 아니 느낄 수가 없다.

특히 작품의 말미에서 병원에 입원한 박 권사와 그녀의 남편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른바 비빔밥 일화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래 행동은 불교식이나 유교식으로 하고, 믿기는 무당 믿듯 하더라도 출석은 교회로 열심히 나가 봅시다.”라고 한 남편의 말에 박 권사가 그래요 빨리 퇴원해서 비빔밥이나 맛있게 해 먹읍시다.”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한국 교회의 샤머니즘화에 대한 은근한 풍자이면서, 동시에 이를 확대 해석할 때, 일천 번제와 같은 유태교식 행사를 끌어들인 기독교의 비빔밥식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학교 인문대 학장, 한국문학비평학회 초대회장 역임, 현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저서에 한국현대문학과 기독교, 한국현대소설과 기독교정신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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