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영적인 사람의 특징 [창골산 봉서방 제1233호]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16. 03:49

은혜라는 피난처

 

 

 

 

율법은 위대한 당신을 작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

즉, 당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렇게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곤궁에 빠져 있는 당신이

은혜라는 피난처를 찾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자료ⓒ창골산 봉서방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 도다"(시편 33:18,19)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섭리적인 보살핌으로 그의 백성에게서 위험을 차단하시고,

그들 주위에 수호천사들을 둘러 세우신다.(시편 34:7)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들의 뼈까지도 보호하시고(시편 34:20),

그들의 눈물을 병에 담으시며(시편 56:8),

성도들이 약할 때 강하게 해 주시고(히브리서 11:34),

그들의 모든 부족을 구원의 금고를 열어 공급해 주신다.(시편 23:5)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편 37:3)

 

- 토마스 왓슨, '묵상'중에서./자료ⓒ창골산 봉서방

깨어짐의 은혜

 

 

 

 

철저히 깨어지는 순간에는 우리 자신의 연약한 이름 - 비루한 오만함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초라한 정체성-을 외친다고 해서 힘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이 극단적인 상황에 있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호흡한다.

손으로 더듬는 소경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누가복음 18:38)

라고 탄식하며 외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삶의 어두운 시간들을 축복하신다.

바로 이러한 어두운 시간들에 빛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궁핍과 실패를 겪을 때 자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만을 찬양하는 영광을 만끽한다.

그러나 실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에 대한 찬양이 더 이상 자신을 지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서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면서 그분께 부르짖는다.

 

다윗의 말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시편 34: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혹독한 시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들은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해 절구와 홍두깨 사이에서 깨어지고 부서졌다.

그들은 연약하며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점점 단단한 화강암으로 바뀌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자신의 영광을 알리는 기념비로 삼으신다.

따라서 매맞고, 돌에 맞고, 난파당하고, 옥에 갇힌 다소의 한 유대인은(고린도후서 11:23 이하)

자신이 깨어져 연단받은 것을 감사하며 찬송한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폭풍우를 찬양한다.(고린도후서 12:10)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연약한 자아가 폭풍에 시달릴 때, 폭풍은 연약한 자아를 바꾸어놓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은혜가, 깨어짐과 함께 겁먹은 아시아의 한 유대인을 사로잡고 그의 이름을

여호와의 우뢰라고 바꿀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캘빈 밀러, 'The Unchained Soul'중에서/자료ⓒ창골산 봉서방

참된 체념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견뎌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결점을 참아내야 하고,

그것들을 은밀한 기도 가운데서

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고칠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야 하며

그것들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데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체념이다.

 

그가 태어나신 베들레헴에서,

그가 채찍질당하신 관점에서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갈보리에서

벌거벗기우신 예수님을 찾고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벌거벗기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은혜이기에,

이 일도 이 일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 존 웨슬리/자료ⓒ창골산 봉서방

영적인 사람의 특징

 

 

 

 

*영적인 사람의 특징*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7)

에이든 토저(Aiden Tozer)목사님은 ‘복음주의의 양심’으로 불렸던 믿음의 거장입니다.

특히나 목사님의 저서인 ‘하나님을 추구함’, ‘거듭난 자의 생활’, ‘하나님을 바로 알자’와 같은 책들은 목회자를 비롯해 성도들에게까지 유익하다고 인정받는 훌륭한 신앙 서적들인데 목사님의 많은 저서가 본질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것을 권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변화를 위해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음의 다섯 가지 질문을 통해 ‘자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1. 행복보다는 거룩함을 추구한다.
2.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 축복보다 중요하다.
3.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4. 잘못 살아가기보다는 바르게 죽기를 원한다.
5. 자신의 견해보다도 성경의 견해를 따른다.

사랑하는 그대여!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기 위해 노력하고 또 기도하며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며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지 않으실래요?/자료ⓒ창골산 봉서방

 

 

 

 

 

 

영국 교회 목회자들 얼마 받을까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진 한국교회…어지러운 제도가 부흥 막아

신완식 목사 (런던 트리니티 교회)

“신 목사님, 한 달에 얼마 받으세요? 사택은 상태 괜찮아요? 자가용은 누가 사준 건가요? 전기세나 수도세는 교회에서 내주나요?”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있을 때 가끔씩 받곤 하던 질문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일반 성도들보다는 오히려 선후배 혹은 동기생 목회자들이 더 물어본 것 같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대화하다 보면 어떤 분은 뿌듯해했지만 반대로 힘들어 하거나 낙심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내 형편과 상대방의 사정을 비교하면서 때로는 우월감에, 또 때로는 열등감에 빠졌던 그때를 떠올려보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목회자들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일평생 목양일념(牧羊一念)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영국 교회 목사는 재정에 No Touch


영국 교회 목회자들의 복지 현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지역 교회에서 어떻게 헌금이 시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침례교와 복음주의 계열 교단을 제외한 영국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 감리교, 구세군, 성공회 (Church of England), 웨일TM 교회(Church Of Wales), 스코틀랜드 교회(Church of Scotland) 등 주요 영국 교단의 헌금 시행 상황은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우리가 눈 여겨 볼만한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서는 거의 보편화되어 있는 십일조, 각종 절기 감사 헌금 제도는 없으며 그런 헌금을 할 수 있는 봉투 또한 없다. 필자가 출석하고 있는 영국개혁교회와 감리교단 소속 Trinity의 경우 일련번호가 새겨진 조그만 개인용 주정 헌금 봉투를 사용하고 있는 데 봉투에는 감사 혹은 기도제목이나 이름조차 쓸 곳이 없다. 월정 헌금 봉투도 있기는 하지만 십일조 제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두 가지 헌금 봉투를 희망하는 자에 한해서만 제공하고 계수하는 사람은 그 봉투의 주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재정부장만 확인이 가능하다. 담임 목사도 누가 얼마를 헌금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담임 목사의 직책과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일 예배 시간에 드려진 헌금은 예배가 마치자마자 즉시 계수되는 데 Trinity 교회의 경우 2인 1조가 되어 작업을 한다. 계수 위원은 한정된 멤버가 맡는 것이 아니라 재정부 소속 회원들이 매주 순번제로 봉사한다. 그들은 회계장부에 헌금 내역을 기입을 하고 이를 재정부장에게 보고하면 되는데, 특이한 사항은 영국 교회 재정은 담임 목사가 결재를 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담임 목사는 재정에 대한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가 없다. 교회 재정은 근본적으로 교단의 정책과 연계된 것이지 개 교회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한국교회에서 가끔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재정 관련 비리나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셋째, 재정부장은 매주 결재를 한 후 노회 혹은 지방회와 비슷한 조직인 Synod를 거쳐 총회로 헌금을 올려야 한다. 이때 개 교회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유지비는 제외되어 자체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나머지는 전액 총회에 상납해야 한다. 총회는 전국의 지 교회에서 올라온 재정과 정부 보조비 등을 기초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만약 지 교회의 재정 능력이 열악한 경우 총회의 관련 부서에서 지원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한국의 총회가 대부분 ‘총회를 위한 총회’인 반면 영국의 총회는 그야말로 공교회 개념이다.

넷째, 지 교회 재정 감사는 평균 4년에 한 번 평신도로 구성된 위원들이 Synod로부터 파송 받아 실시하는데 대개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평소에 각 지 교회에서 총회의 지침에 따라 엄격하게 재정 관리를 하기 때문이다. 문서 문화가 비교적 일찍 정착된 영국 사회의 특징이 교회에도 잘 반영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목회비는 쥐꼬리만 해


영국 교회에 목회자 지망생이 별로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 때문이겠지만 그 중 하나는 쥐꼬리만 한 봉급이 아닌가 싶다. 영국 교회 목사들은 연봉이 얼마나 되며 그 액수는 영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영국 교회 목회자의 목회비 지급 현황 또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지교회에서는 담임목회자의 목회비를 부담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인들은 담임 목회자가 얼마의 연봉을 받는 지를 잘 모른다. 언젠가 필자가 Trinity 교회 재정 부장에게 담임 목사의 연봉을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다. 즉 지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경제적 부담을 직접적으로 지지 않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목회자에 대한 연봉 지급은 지교회가 아닌 총회에서 일괄적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둘째, 한국 목회자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다음의 사항이 아닌가 싶다. 질문부터 하는 게 좋겠다. ‘이제 막 안수 받은 목회자와 40년 목회한 목회자 중에 누가 연봉을 더 많이 받을까?’, ‘런던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와 농어촌 미자립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 중에서는 누가 연봉을 더 많이 받을까?’

총회는 기본적으로 1년 된 목회자나 40년 된 목회자나 동일하게 연봉을 지급한다. 도시와 농촌도 격차가 없다. 대교회냐 미자립 교회냐도 상관이 없다. 기본적으로 목회비는 동일하다. 재미난 점은 초임 목사가 대체로 더 많이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부양가족 때문이다. 은퇴를 앞 둔 목회자는 자녀를 다 양육 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적게 받는 경우가 많다. 또 재미있는 것은 젊은 목회자들은 런던 같은 도시의 큰 교회에서 목회하기를 꺼린다는 점이다. 동일한 연봉에 상대적으로 물가는 비싸고 일이 많아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굳이 도시로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공기 맑고 사람 냄새 나는 조그만 도시나 농어촌에서 차분히 목회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런던 같은 대도시에는 오히려 연령이 높은 분들이 떠밀려온다고 한다. 영국 사회가 런던 중심이 아닌 덕분에 명문대학들이 지방에 골고루 퍼져있는 점도 주요한 요인이 아닌가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교들은 대부분 런던 밖에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 중에서 오히려 명문인 경우가 더 많다.

셋째, 총회장이나 노회장 같은 감투는 서로 기피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총회장을 맡는 사람은 지교회를 담임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교회 목회자보다 활동비 명목으로 조금 더 받는 일 외에는 별다른 특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감투는 곧 파워와 성공 혹은 영광과 직결시키는 한국교회의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영국 교회 구조에서 제일 힘이 없는 곳이 총회이고 가장 힘이 센 곳은 지교회이며 지교회의 핵심은 바로 회중이다. 회중은 대부분 목회자와 상급 기관의 들러리 역할만 하는 한국교회가 이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영국개혁교회의 총회 조직도를 보면 지교회 회중이 가장 상단에 위치해 있고 총회는 제일 밑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영국개혁교회 총회를 가보니 건물도 작고 직원 수도 적었는데 그 직원들마저도 상당수는 유급이 아닌 자원 봉사자들로 운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6년 가까이 영국개혁교회 교단 소속 교회를 다니면서 총회장이나 노회장과 관련된 사항을 주일 공예배 시간에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물론 본적도 없지만 말이다. 교인들은 총회장이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관심조차 없다. 그러니 그런 재미없는 일에 돈을 쓰고 목숨 걸 일이 있겠는가!

넷째, 이제 핵심을 이야기할 차례다. 영국 교회 목사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을까? 영국개혁교회 교단의 어느 국장이 답한 내용에 따르면 지교회 목회자의 일 년 연봉은 약 2만 5000파운드라고 한다. 한화로 계산하면 한 달에 약 200만 원 정도를 받는 셈이다. 문제는 이 연봉이 호봉제가 아니기 때문에 전술한 바와 같이 4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는 데 있다. 영국개혁교회의 경우 이런 정책은 1974년에 처음 시행이 되었고 큰 틀은 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한국인 최초로 영국개혁교회에서 안수 받아 현재 목회하고 있는 필자의 어느 지인이 총회에서 한 가지 독특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열심히 목회해서 교인이 늘고 재정이 늘면 그 목회자에게 조금 더 주는 제도는 어떻겠느냐?’는 논지의 발언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는? 영국인 목회자들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려 한다.


그러면 2만 5000파운드는 어느 정도의 액수일까? 대졸자의 초봉 정도다. 40년 목회한 사람이 받는 연봉도 이 정도이니 목회자 지망생이 별로 없다는 점이 충분히 납득이 간다.

 

빈손으로 가는 목회자들


적지 않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이유는 사실 개인 윤리 때문이기 보다는 구조와 직결된다. 영국 교회 목사들이 신사적이고 친절한 이유는 그들의 영성과 도덕성이 탁월해서 그러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시스템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여기서 영국 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복지 현황을 개관해보면 이 사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첫째, 영국 교회 목회자들은 다 같이 구조적으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 우리들처럼 교인들이 봉투를 찔려주거나 양복을 사주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회로부터 지급받는 목회비 외에 생길 수 있는 부수입은 부정기적인 결혼식 주례와 장례식 주례 후에 받는 일정액수의 돈인데 필자는 그 액수를 잘 알지 못한다. 감사의 표시를 한 사람과 그 돈을 받은 목사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 목회자 부인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기도 한다. 영국 교계에서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일도 거의 없는 셈이다.

둘째, 한국교회와 달리 영국 교회 목회자들은 노회에서 관리하는 총회 소유의 목사관에서 생활을 한다. 따라서 지교회는 목사관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는다. 기본적인 관리비는 총회에서 지급하며, 목회자 유고시 가족들이 원하면 그 곳에서 계속 살 수가 있다. 미망인이 퇴거를 희망할 경우 그녀가 원하는 곳에 집을 제공하여 여생을 보내도록 배려하는 점은 우리가 두고두고 배워야 할 점이다. 목회자가 사망했다고 해서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퇴거를 요청하는 일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목회자 미망인들과 자녀들이 상처를 받는지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목회자 연금은 기본적으로 교단과 국가에 가입하고 여유가 되는 사람은 개인연금에 든다고 한다. 은퇴는 65세인데 대부분 조기 은퇴를 희망하지만 목회자 수가 부족한 탓에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조기 은퇴 희망 이유는 ‘격무’ 때문이다. 목회자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교회가 평균 3~4개 되면 어떤 이는 5개를 돌보아야 한다. 3개를 담임하나 5개를 담임하나 지급 받는 연봉은 물론 동일하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지교회 위주로 활동하고 필요 시 노회나 총회와 관련한 일을 하지만 영국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리더이기 이전에 사회 지도자다. 따라서 YMCA 같은 사회기관․교도소․병원․학교 등에 나가서 당번 식으로 예배․교육 그리고 상담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상당히 힘겨운 일이지만 경제적 보상은 없다.


설교 한 번하고 몇 십만 원, 부흥회 한 번 하고 몇 백 혹은 몇 천만 원을 주고받는 우리의 문화를 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꽃 한 송이에 박수 한 번 치면 최고 대우를 받은 것이라 한다. 은퇴 목회자는 교단과 국가로부터 일정한 연금 혜택을 받으며 사망 시까지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교단에서 제공한다. 은퇴자 집단 거주 지역에 들어갈 수도 있고 본인의 희망 거주지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다고 한다.

넷째, 어떤 분들은 이런 제도를 목회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오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면 영국 목회자는 존경은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 인기 없는 직업이다. 한국처럼 비인가 혹은 무인가 나아가 무자격 신학교가 난립하는 나라가 아닌 이곳 영국의 교육 시스템 하에서 목사는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교단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질과 특히 인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영국 대학에서 학부를 나오고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일은 그리 용이하지가 않다. 사실 석사를 학위 취득한 목회자 수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목회학 박사 제도가 없고 그런 학위를 모르는 이 나라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목회자는 만나기조차 힘들다.


따라서 이곳에서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일반 회사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중 삼중으로 거르고 거른 소수의 사람들이 목사 안수를 받아 쥐꼬리만 한 연봉으로 평생을 살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분위기라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개인 소유의 재산을 남길 필요도 없고 또 남길 형편도 안 되는 구조, 이것을 한국교회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사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교회당 주변에 뿌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고 한다. 그들은 빈손으로 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빈손으로 천국 갈 수 있게 돕는 영국 제도 부러워


모든 제도나 시스템에는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영국 교회의 최대 장점은 ‘함께 걷는’ 구조가 아닌가 싶다. 큰 교회에 대하여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고 도시 교회에 대하여 부러워할 이유가 없도록 운용하는 점이 필자에게는 가장 신선하게 느껴진다. 성서에서 말하는 ‘한 몸’, ‘지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과연 어떠해야 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섬에서 목회해도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런던 중심가에서 사역을 해도 우월감을 갖지 못하게 시행되고 있는 이런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예배당에 비해서 목사 수가 현저히 부족하니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우애 있게 지내고 합력하는 모습이 참 인상 깊다. 요즘에 와서 나는 개인적으로 ‘추수할 곳은 많은 데 일꾼이 부족하니’라는 말씀의 참 맛을 알 것 같다. 성도들이 한 2~3년 열심히 ‘하느님 저희 교회에 목회자를 보내주소서’ 기도하면 한 사람 올까 말까 하는 이곳 영국 교회의 상황에서 나는 여전히 은혜를 받고 있다.


성서가 믿어져서 감격스러울 때도 있다. 알곡을 고르고 골라서 안수를 준 후 먹고 사는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그저 하나님과 사회와 이웃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평생을 봉사하게 하다가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 건축한 목사관에서 빈손으로 주님 앞에 갈 수 있게 돕는 이런 제도가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이것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특혜나 특권을 주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목회를 전쟁 치르듯 하고 이웃 교회 목회자를 마치 원수 대하듯 해야 하는 한국교회가 하루 속히 참고하고 현실에 맞게 시행해야 하는 반면교사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과감한 제도적 변화와 혁신이 없이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진 한국교회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영적이고 도적적인 목사라고 해도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제도와 여건 속에서는 빛을 발하기가 어렵다.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한국 목회자들의 충성․헌신․봉사 그리고 주를 향한 사랑과 열정이 어그러진 제도와 시스템에 짓눌려 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두고두고 아쉽다.


주여! 더 늦어지기 전에…/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