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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 공론장 파괴의 바이러스, 정치 컬트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1. 04:06

[이진순 칼럼] 공론장 파괴의 바이러스, 정치 컬트

등록 :2020-09-08 16:22수정 :2020-09-09 02:10

 

‘애국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바이러스 테러를 벌였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극우 테러세력’이라고 굳이 응수했어야 할까? 바이러스는 박멸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상존하는 위험 속에서 치명적 해가 되지 않도록 순치하고 다스리면서 살아야 한다.

이진순 ㅣ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추석 연휴가 다가오는 게 두렵다. 경로 불상의 감염률이 25%대에 육박하는데 고강도 방역대책으로 간신히 잠재운 확진자 수가 다시 폭증할까 불안하고, 명절 연휴에 이어진 개천절 대규모 집회 예고도 불길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 방역이 사기극’이라고 비난하는 전광훈에 이어, 일부 극우 인사들까지 지난달 31일 ‘코로나 계엄에 반대하는 시민비대위’를 결성하고 ‘과잉방역’과 ‘위협사찰’을 중단하라고 나섰다.

 

이 엄중한 시기에 코로나 방역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건 한국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타이에서는 정부의 편파적인 격리정책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 규제가 인권과 자기결정권을 억압한다며 시위가 있었다.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서구사회에서는 특히 마스크를 강제하는 조치에 대해 반감이 적지 않은데,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할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안티마스크 운동이 일부 자유주의 운동가와 시민들에 의해 벌어졌던 것과 같은 맥락이겠다.

 

문제는, 코로나 위기를 희화화하며 반정부 투쟁의 기폭제로 삼는 극우세력의 발호이다. 최근 베를린에서는 나치 문양과 제국주의 시대 국기를 앞세운 극우파들이 독일 정부의 코로나 규제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런던에서도 “마스크는 입을 막는 재갈” “뉴 노멀은 뉴 파시즘”이라는 손팻말을 들고 수천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이 중 상당수가 극우파였다.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스페인에서도 이와 유사한 극우파의 반대 집회가 있었다.

 

이들은 공히 ‘코로나 위기가 과장 조작된 것’이며 ‘권력 엘리트의 정치적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큐어논(QAnon) 그룹이다. 큐어논은 2017년 미국의 극우성향 온라인게시판 포챈(4chan)에 큐(Q)라는 닉네임을 쓰는 개인이 올린 글에 동의하면서 익명의(anonymous)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을 가리킨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세계를 비밀리에 지배하는 ‘딥스테이트’가 존재하는데,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락 오바마,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같은 정·재계 유명인사들이 여기 속하며 이들은 소아성애자로 악마숭배의식을 치르는 사탄의 무리이고, 이런 사탄세력에 대항해서 싸우는 유일한 지도자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것이다. 21세기에 누가 이딴 얘기를 믿을까 싶지만, 경쟁과 도태의 사이클 속에서 마음의 항체를 잃은 이들은 음모론에 허물어지기 쉽다. 큐어논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3억달러를 투자한 빌 게이츠가 백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피부 아래 마이크로칩을 심으려 한다는 백신 음모론을 유포하고 코로나 방역에 극렬히 반대하면서 급진과격파 극우세력을 결집시키고 있다.

 

보수적 복음주의와 극우 정치세력의 결합을 ‘컬트’(cult)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흔히 컬트는 ‘소수의 열광적인 팬덤’을 가리킨다. 문화적 컬트는 문화의 다양성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지만 정치적 컬트는 민주주의 공론장을 파괴하는 독소가 된다. 2019년 <트럼프의 컬트>란 책을 펴낸 스티븐 하산은 정치적 컬트와 사이비 종교의 가장 큰 공통점으로, ‘피라미드 꼭대기의 전지전능한 지도자가 사탄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는 도착과 망상을 꼽는다. 컬트 추종자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지도자를 비판하는 그 누구든 적대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만이, 악을 이기고 선을 구현하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믿지 않는다. 자기들끼리의 폐쇄적 회로 안에서 그 어떤 이견이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선, 너는 악’의 배타적 구도 속에서 공격적 파괴를 정당화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바탕인 소통과 대화, 건강한 논쟁은 실종된다.

 

그러나 소수 극렬한 정치 컬트를 제압하기 위해 역방향의 컬트를 내세우는 것이 해법은 아니다. ‘애국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바이러스 테러를 벌였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극우 테러세력’이라고 굳이 응수했어야 할까? 바이러스는 박멸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상존하는 위험 속에서 치명적 해가 되지 않도록 순치하고 다스리면서 살아야 한다.

 

“당신이 이 정부를 비난하고 나를 물러나라 주장한대도 나는 당신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대통령이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의 생각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이 터널을 헤쳐나가야 하는 보통 사람들에겐 가슴 설레는 자부심과 위안이 되었을 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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