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1970년 조지아주 길목에서 ‘양키 박대’ ‘남부식 환대’ 모두 체험했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2. 06:56

“1970년 조지아주 길목에서 ‘양키 박대’ ‘남부식 환대’ 모두 체험했다”

등록 :2020-09-07 15:04

 

미네소타에서 차로 17시간 장거리
중고 승합차로 1박2일 꼬박 운전
만삭 아내·3살 맏딸 태우고 이주

첫날 저녁 남부 지역의 한 주유소
“위 돈 서브 양키스!” 주유 거부
북부 미네소타주 번호판 보고 오해
“내가 양키처럼 보입니까?” 항의에
돌연 태도 바꿔 숙소까지 친절 소개

이튿날 해질녘에야 애선스시 도착
경찰에 도움 청하자 순찰차로 안내

조지아대학 첫날 흑인은 노동자뿐
‘유일하게 양복 입은 흑인 청년’ 이채
법대 부임한 딘 러스크 교수의 사위
케네디·존슨 때 국무장관 지낸 거물

 

길을 찾아서 (39회) 조지아주 애선스 입성기

박한식 교수는 1970년 봄 조지아대학 교수로 임용받아 중북부 미네소타주에서 남동부 조지아주의 애선스시로 이주해 지금껏 살고 있다. 조지아주의 주도인 애틀랜타에서 북동부 쪽에 위치한 애선스시는 1801년부터 조지아대학과 함께 발달해온 대학도시이자 부유한 농업도시로 유명하다. 사진 조지아대학 아카이브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3년간의 박사 공부를 마치고 1970년 여름 나는 조지아대학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조지아대학이 위치한 조지아주 애선스시로 가는 길은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직장을 구했다는 기쁨도 있었고, 이제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다. 또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을 갖게 됐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흥분되고 설레는 마음 이면에는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다. 내가 좋아서 택한 조지아대학이고, 고향 떠나면 어디든 타향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 미국 동남부는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또한 노예제도의 잔재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으며,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용인되는 곳이기도 했다.

조지아대학의 북쪽 입구에 있는 상징 조형물인 ‘조지아 아치’ 앞쪽으로 애선스시의 중심가인 칼리지 애비뉴가 펼쳐져 있다. 1960년대~70년대 풍경이다. 사진 조지아대학 아카이브

조지아주 애선스시의 칼리지 애비뉴 쪽에서 바라본 조지아 아치 너머로 조지아대학의 북쪽 교정이 보인다. 사진 위키미디어

 

우선 애선스시에서 살림집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 같으면 집의 위치와 사진 그리고 주변 정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멀리 떨어진 다른 주의 주택 정보를 구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캠퍼스 인터뷰 때 고작 2박3일 머물렀던 게 전부였으니, 어느 곳에 어떤 집을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조지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지역이 안전한지, 출퇴근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마트까지 거리는 어떤지 등등 대략의 정보를 얻고 서너 군데 월셋집을 소개받았다. 집주인들과 전화와 우편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그중 한 월셋집을 계약했는데 월 75달러를 내야 했다. 집을 보지도 못하고 깜깜이로 월셋집을 얻은 까닭에 실제 입주해서 보니 집이 허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자동차도 문제였다. 미네소타에서 몰던 자동차는 연식도 오래됐고 이곳저곳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학교만 왔다갔다하는 일종의 출퇴근용이었으니 그럭저럭 큰 불편은 없었다. 하지만 자그마치 서울~부산 거리의 6배나 되는 조지아대학까지 운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새 차를 구입하기는 어려워 발품을 팔아가며 좋은 가격에 튼튼한 승합차를 중고로 구매했다. 승합차를 장만한 이유는 이삿짐을 운반하려면 넉넉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변변치 않은 세간살이였지만 바리바리 싸 들고 갔던 이유는 낯선 곳에 가서 적응하기도 힘든데 당장 살림살이를 장만하러 동분서주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자동차의 뒷좌석 시트를 모두 뒤로 눕혀 한가득 짐을 싣고 나는 운전석에, 집사람과 큰딸아이는 조수석에 앉아 조지아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집사람은 그때 둘째를 임신해 8개월째였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조지아대학까지는 지금 달려도 자동차로 꼬박 17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다. 더욱이 고도 1천 미터가 넘는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그때는 도로 사정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으니 하루 만에 조지아에 입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만삭인 집사람과 세살배기 딸아이에게는 무리였다. 가는 도중 중간 지점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이틀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출발 전날 집사람과 나는 미국 지도를 구해 대략의 주와 주 사이의 고속도로 정보를 숙지했다. 그때만 해도 조수석의 동승자가 내비게이션 구실을 해야 했다. 집사람이 시종일관 지도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길안내를 해주었다.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당 시간을 허비해야 하기 때문에 가는 내내 한시도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나는 밝은 낮에 조금이라도 더 달리자는 생각에 쉼 없이 운전했다.

 

어느덧 날도 어둑어둑해지고 마침 주유등에 노란불도 들어왔다. 기름도 넣고 하루 저녁 묵을 숙소에 대한 정보도 얻고자 주유소로 들어갔다. 지금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켄터키주 아니면 테네시주였던 것 같다. 주유기 가까이 차를 대고 있으니 주유원이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리고 가득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주유원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이면서 주유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주유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힐끗 내 차의 번호판을 보더니 갑자기 기름을 안 판다는 것이었다. 황당해서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위 돈 서브 양키스!” 양키들에게는 기름을 안 판다니 상상 초월이었다.양키라는 말은 원래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통용되는 용어다. 미국 밖에서는 미국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고, 미국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도 통용된다. 특히 남북전쟁 때는 남부연합군이 북군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고 대체로 미국의 북부에 위치한 주들을 통칭했다. 내 자동차의 미네소타주 번호판이 주유원으로 하여금 내가 북부에 살고 있는 양키이고 남쪽을 여행하는 중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았다. 나는 자동차 실내등을 켜고 창문을 좀 더 내리고 얼굴을 창문 밖으로 내밀면서 주유를 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주유원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내가 양키처럼 보입니까?”(Do I look like a Yankee?)

박한식 교수는 1970년 조지아주로 향하면서 북부 출신 ‘양키’로 오해받아 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외국인에 대한 ‘딥사우스’ 특유의 정서인 ‘남부식 환대’(사진)를 체험하기도 했다. 사진 리더스 다이제스트

 

그러자 내 차로 다시 다가온 주유원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태도가 급변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180도 바뀐 친절한 모습으로 기름을 넣어주었고 주변에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깨끗한 숙소도 알려주었다. 양키에게는 까칠하고 흑인들을 차별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친절하다는 소위 ‘남부 환대’가 이런 것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나는 100년 전 종결된 남북전쟁이 미국 사회에 남겨놓은 상처와 앙금을 새삼 떠올렸다. 사실 한국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남겨놓은 상처도 남북전쟁의 그것 못지않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적개심과 반목 그리고 앙금의 원천이다. 교류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남북한에게 한국전쟁의 상처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은 민족적 과제이다.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남북한의 동질성을 발견해서 꾸준히 진작시키는 노력뿐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1970년 봄 박한식 교수가 조지아주 애선스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들어가 도움을 청했던 프린스 애비뉴의 맥도날드(사진) 매장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영업중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우리 가족은 이튿날 해질녘에야 조지아대학이 있는 애선스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간 고속도로 지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애선스시 지역 지도는 구하질 못했다. 달랑 주소 하나 들고 캄캄한 밤에 월셋집을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침 애선스시에 들어서자마자 환히 빛나는 맥도날드의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맥도날드는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영업하고 있다. 출출하던 참에 요기도 하고 길도 물어볼 겸 해서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를 돌아보니 덩치 큰 경찰관 두 명이 제법 커다란 햄버거와 접시 가득한 감자튀김으로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역 경찰관이니 지리를 잘 알겠다 싶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길을 물었다. 사실 경찰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경찰관 하면 일본 순사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특히 4·19혁명에 직접 참여하면서 보고 경험했던 경찰의 횡포와 탄압 그리고 무자비한 공권력 남용으로 인해 공포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친절하다는 남부 환대에 기대를 걸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경찰관은 월셋집까지 친절하고 안전하게 순찰차로 에스코트해주었고 신호등도 무시하고 앞서가는 순찰차 덕분에 금세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 운전으로 피곤했지만 나는 바로 이튿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정치학과에 들러 인사도 하고 인사과를 찾아서 입사 서류를 작성하는 등 행정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다. 청명한 날씨에 잘 다듬어진 초록빛 잔디밭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아름답게 조성된 캠퍼스의 오솔길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첫 출근길의 모습이다. 아직 개학을 하지 않았던 캠퍼스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한 흑인 청년이었다. 흑인 학생도 교직원도 극소수였던 조지아대학에서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청년이라. 차림으로 봐서는 학생은 아닌 것 같고 흑인 교수도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궁금증이 들었다. 마침 그 청년은 정치학과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1970년 조지아대학에 첫 출근 한 날 박한식 교수가 교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흑인들은 대부분 학교 잡무를 하는 노동자였고 학생과 교수들은 거의 백인이었다. 사진 조지아대학 아카이브

 

그 건물로 들어서니 그 청년은 보이질 않았고 한 무리의 흑인들이 맞아주었다. 다가가서 내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고 나서 보니 청소 직원들이었다. 모두가 흑인이었고 허리춤에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차고 있는 한 사람만이 백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청소를 관장하는 책임자였다. 지난 연재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조지아대학에서 보이는 흑인들은 대다수가 건물이나 도로 청소를 하는 단순 육체노동자들이었다. 남부 흑인들은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노예문화에 여전히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훗날 깨달은 사실이지만 똑똑하고 진취적이며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흑인들은 모두 남부를 떠나 다른 주로 이주해서 정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정치학과 사무실에 들러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혹시나 해서 아까 보았던 양복 차림 흑인에 관해 물어보았다. 직원은 그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25살의 가이 깁슨 스미스인데 그해 조지아대학 법과대학에 부임해 온 딘 러스크 교수의 사위라고 했다. 딘 러스크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다. 1961년부터 69년까지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8년간이나 국무장관으로 재임한 저명인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퇴직하고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법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이었다.

딘 러스크(맨 왼쪽)는 1961년 존 에프 케네디(가운데) 때부터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 때까지 2대에 걸쳐 국무장관을 지낸 미국 정가의 거물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오른쪽)와 더불어 베트남전쟁 정책에 깊숙이 간여했다. 1961년 1월 백악관 회의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1967년 국무장관 딘 러스크(왼쪽)은 딸과 흑인 청년의 결혼이 린든 존슨(가운데) 대통령의 내각에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해 스스로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다. 1968년 2월 백악관에서 러스크·존슨·맥나마라(오른쪽)가 베트남전쟁 관련 회의를 하는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뒤이어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딘 러스크 교수의 딸 마거릿과 가이 깁슨 스미스의 결혼식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 출신 백인이면서 미국 정부의 최고위직인 국무장관으로 8년간이나 재직한 러스크 교수가 어떻게 흑인 사위를 허락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박사과정 공부 와중이어서 미처 챙겨보지 못했지만 이들의 결혼식은 미국에서 큰 화젯거리였고 신문마다 헤드라인으로 소개될 만큼 큰 뉴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식이 행해졌던 1967년 9월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16개 주에서 타 인종 간의 결혼, 특히 백인과 흑인 간의 결혼을 금지한 법률이 연방헌법에 위배된다는 위헌결정을 내린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흑백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했던 1960년대 딸의 결혼식으로 인해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사임까지 요청해 가면서 흑인 청년과 딸의 결혼을 허락했던 러스크 장관의 인품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러스크 교수와 나는 그가 1984년 법과대학에서 은퇴할 때까지 두터운 친분과 우정을 쌓았고 한반도 정세에 관한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현직 국무장관 딘 러스크의 18살 딸 마거릿(왼쪽)과 22살 흑인 조종사 가이 깁슨 스미스(오른쪽)의 1967년 9월 결혼식은 <타임> 잡지 표지에 실릴 만큼 파격적인 뉴스였다. 박한식 교수는 1970년 같은 시기 조지아대학 법대 교수로 부임한 러스크와 각별한 교류를 나눴다.

1967년 9월 딘 러스크(오른쪽)가 부인 버지니아(왼쪽)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의 한 채플에서 열린 딸의 결혼식장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 에이피통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은행에 들러 계좌도 계설했다. 나에게 한 가지 새로웠던 사실은 학교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그렇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영어가 남부 특유의 악센트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흑인들의 영어는 발음은 물론이고 단어와 표현 그리고 말하는 방식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영어의 사용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조지아주에서 나고 자란 흑인 토박이들의 발음은 여전히 중간중간에 못 알아듣기도 한다.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이 분주하게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지아주 애선스시에서의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애선스시 근교에서 반세기 넘는 세월을 살고 있다.

 

집필 권준택 미 유티카대학 교수,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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