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남·북·미 대표들 우리 집 초대 ‘통일 합창’…가슴 벅찼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27. 04:21

“남·북·미 대표들 우리 집 초대 ‘통일 합창’…가슴 벅찼다”

등록 :2020-10-27 01:35

 

2009년 북 핵실험 이듬해 천안함 사건
암울한 한반도 정세 해법 찾아 ‘고심’
2011년 조지아대학 글로비스 주최로
2003년 이어 ‘남·북·미 트랙2 회담’

3개국 민간전문가 10명씩 30명 초청
비공식·비공개·비책임성 ‘3원칙’
“진솔하고 기탄없는 대화 통해 이해”

‘ABC’ 방송·조지아대학도 경비 지원
존 메릴 국무부 국장 ‘비자 발급’ 해결
미 FBI 헬기 띄워 북한 참가단 ‘주시’

3박4일간 매일 저녁 함께하며 ‘친목’
마지막날 애선스 집에서 6개 항 합의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특별연주도

길을 찾아서-42회 ‘트랙2 회담’ 성사시키다

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 내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설립한 이래 여러 차례 남북, 북·미, 남·북·미 사이의 직간접 대화를 주선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노력했다. 2011년 10월에는 남북한과 미국의 민간 전문가 30명을 처음으로 한 데 모아 조지아대학에서 ‘남·북·미 3자 트랙2 회담’을 열었다. 개회식 연단 맨 왼쪽부터 사회자 박 교수, 리종혁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박주선 민주당 의원·커트 웰던 미 하원의원·한성렬 조선아태평화위 국장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2011년 한반도 정세는 암울하고 엄혹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과 그에 따른 ‘5·24 대북 제재 조처’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또한 2009년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실시 이후 북-미 간의 회담도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부 간 소통의 창구는 답답하리만큼 굳게 닫혀 있었고 대화의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 북-미 또는 남북 간 현안 해결의 실마리 제공을 위해 민간 창구가 꼭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년이 넘는 준비 과정 끝에 나는 소장을 맡고 있던 조지아대학 부설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통해 2011년 10월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간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3자 간 트랙2 회담’을 주최했다. 앞서 2003년 11월 6자회담 돌파구를 열고자 내가 처음 성사시켰던 ‘북핵위기 해소와 미-북 관계 개선을 위한 미국-조선 포럼'(워싱턴-평양 트랙2 포럼)에 이은 2차 트랙2 회담인 셈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2003년 12월에도 조지아대학에서 ‘북-미 트랙2 회담’을 주최했다. 왼쪽부터 신성철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참사,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 박 교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커트 웰던 미 하원의원, 조성구 북한 단장(군축·평화연구소), 프랭크 자누지 미 상원 민주당 보좌관, 키스 루스 미 상원 공화당 보좌관, 김명길 조선아태평화위 국장, 심일관 통역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트랙1이 정부 대 정부의 회담이라면 트랙2는 정부와 정책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대화의 장이다. 나는 트랙2 회담을 통해 남·북·미 3자 간의 긴밀하고 진솔한 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정부 당국자 간 회담, 즉 트랙1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자국의 견해와 방침이 상대방보다 더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국의 정책을 관철시켜 유리한 협상 결과를 도출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아 나라 간의 회담은 종종 쉽게 결렬되기도 한다.

 

하지만 트랙2는 회담 목적 자체가 트랙1과는 다르다. 트랙1이 잘 되지 않아서 트랙2를 하는 것이 아니다. 트랙2는 트랙1의 대용물도 아니고 트랙1을 보완하거나 보조하는 구실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트랙2는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해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는 ‘언더스탠드’(understand)다.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버리고 상대방의 아래에 서서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나는 남·북·미 3국의 민간 전문가들이 오해를 풀고 솔직한 서로의 견해를 경청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편견과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대화이고, 그런 대화만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면 서로의 차이점과 이질성을 포용할 수 있고, 이질과 이질이 만나서 서로를 포용하면 더 높은 차원의 동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조화이고 평화다. 남과 북이 지난 75년 동안 자신의 견해만 고수하고 각자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체제 경쟁에 갇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안타깝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진솔한 대화 없이는 통일과 평화는 절대 오지 않는다.

박한식 교수는 ‘트랙2 회담’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위해 비공개 원칙을 고수해 개회식 때만 언론 취재를 허용했다. 2003년 12월 ‘북-미 트랙2 회담’ 때 현지 언론들이 열띤 취재를 하고 있다. 사진 조지아대학 글로비스 제공

 

2011년 남·북·미 3자 간 트랙2 대화를 진행하면서, 트랙2 본연의 취지를 살리고자 나 나름대로 세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는 회담의 비공식 원칙이다. 회의 참가자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 공식적으로 국가를 대표하거나 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되도록 배제했다. 공직에 있는 정부 관료라면 정부의 견해를 대변할 수밖에 없을 테고 소신껏 그리고 자유롭게 발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둘째는, 비공개의 원칙이다. 이런 행사들은 언론의 관심과 조명을 받게 마련이니, 언론을 초청하고 광고하고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트랙2는 오히려 언론에 알리지 않는 비공개 회담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효율적이다.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함으로써 회의 참가자들의 토론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아야만 자유로운 대화가 보장되고 신선한 아이디어도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담의 개·폐회식만 언론에 공개했고 나흘 동안의 본회의는 비공개 원칙을 지켰다. 마지막으로, 비책임성의 원칙이다. 참가자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고 자유자재로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회의에서 진행된 어떤 발언, 또한 주장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트랙2 대화 내내 철저하게 지켜졌고, 결과적으로 진솔하고 기탄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회의와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회의 참가자들의 면면도 트랙2 대화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회의 참가자로 누구를, 어떤 선정 기준으로 초청할 것인가, 여간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모든 참석자의 이름과 직함을 다 공개하지는 못하지만, 위에 언급했던 회의 진행 3원칙처럼 참가자 초청 기준에도 세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참석 인사들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와 이해를 통해서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인사들만을 초청했다. 둘째는 전문성이다. 학계·예술계·시민단체 등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인사들을 초빙했다. 전문성이 있어야 사회에 영향력이 있고,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선정 기준은 인품이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준이기도 했다. 남북이든 미국이든 체제와 이념을 초월해서 인품이 있는,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을 초청했다. 인품 있는 인사들이 와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체제와 삶의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때 서로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남과 북을 수십 차례 방문하면서 교류했던 모든 사람들의 인품과 사람 됨됨이를 면밀히 관찰해왔다. 남들이 들으면 고약하다고 할 만한 버릇이기는 하지만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인품에 점수를 매기곤 했다. 트랙2 회담에 초청된 인사들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인품 점수가 10점 만점에 적어도 8점 이상 되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회담 준비는 녹록지 않은 과정이었다. 각 나라에서 10여명씩 30명가량의 참석자를 일일이 연락해서 참석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확답을 듣는 과정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킬 수도 없는, 내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북쪽 참석자들은 남쪽이나 미국처럼 실시간 연락이 여의치 않았고 일정 조정과 참석 확답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정 조정과 더불어 또 한가지 큰 난관은 회담 경비였다. 대다수의 미국과 남쪽 인사들은 흔쾌히 자비로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하지만 교통비에 더해 3박4일간의 숙박과 식사비 같은 체류 비용까지 참석자들에게 부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북한 참석자들은 나라 전체가 굶고 있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미국까지 오는 경비를 직접 감당하기란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회의 개최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나섰다. 우선 조지아대학에 ‘트랙2 회담 기획안’을 제출하고 공식적으로 예산을 신청했다. 총장과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회의의 취지와 의의를 설명하고 예산 확보의 필요성도 설득했다. 고맙게도 조지아대학에서 국제문제연구소를 통해 적지 않은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데이비드 웨스틴(오른쪽) <에이비시>(ABC) 사장은 경비를 후원해줬다.

 

이와 더불어 미국의 <에이비시>(ABC) 방송에서도 상당한 경비를 후원받았다. 사실 에이비시는 나와는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1994년부터 2008년까지 나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 에이비시의 뉴스 컨설턴트로 많은 자문을 해주었고, 2000년대에는 에이비시의 사장인 데이비드 웨스틴을 포함한 뉴스 방문단의 북한 현지 취재를 주선하고 그들을 인솔하여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이력도 있었다. 트랙2가 끝나고 재정 후원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나는 에이비시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회담의 의의와 성과를 상세히 전해주었다.

 

또 다른 문제는 비자였다. 외교 관계도 없고 적성국인 북한의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감한 시기에 미국 정부가 과연 그들에게 방문 비자를 내줄 것인지가 큰 복병이었다. ‘길을 찾아서 34회’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국무부 동아시아 국장인 존 메릴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존처럼 인품 있는 사람들과 깊이 사귀고 교류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내 삶의 큰 행운이었다. 존 본인도 회의 참석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지만 막판에 국무부의 만류로 애틀랜타공항에서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2011년 ‘남·북·미 트랙2 회담’ 때 존 메릴 미 국무부 동아시아 국장은 북한 참가단의 비자 발급을 도와줬다. 사진은 2016년 제주 4·3 국제심포지엄 때 발표자로 참석한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 참석자들의 여정은 애틀랜타공항에서부터 언론뿐만 아니라 미 연방수사국(FBI)의 집중 관심과 조명의 대상이었다. 에프비아이는 북한 참석자들의 동선과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헬리콥터까지 띄워가며 주시했다. 나는 에프비아이 쪽에 자유로운 토론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회의장 주변에는 접근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고 매일 저녁 직접 회의의 내용과 분위기를 그들에게 간략히 브리핑해주었다. 사실 에프비아이의 존재는 북한 방문단에게는 기분 나쁜 감시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근접 감시가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 북한 방문단에 대한 철저한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흘간의 회의 내내 다양한 현안과 의제에 관해 진지하고 진솔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단순히 민간 전문가들이 모여 입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확인하고, 이질성은 어떻게 조화시키고, 동질성은 어떻게 권장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 방안들을 논의했다. 또한 각 나라의 현재 정책에 어떤 자문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폭넓은 토의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과가 있었던 것은 일과 뒤에 남·북·미 참석자들이 함께한 저녁 시간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약주도 한 잔씩 하면서 모두가 격의 없이 친근한 대화로, 서로가 서로를 더 알아가고 이해해가는 모습에 참 흐뭇했고 가슴 벅찼다. 남쪽의 한 참석자는 나에게 “북쪽 인사들과 이렇게 장시간 이야기한 것은 처음입니다.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좋은 기회였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해주었다.회의 마지막 날 저녁에 나는 모든 참석자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만찬을 함께 했다. 음식과 주류도 한식과 양식으로 넉넉히 준비했고 내가 손수 요리 방법을 개발한 치킨 바비큐도 선보였다. 나흘 동안 급격히 친근해진 참석자들 사이에선 이야기꽃이 피어났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선생의 ‘트로이메라이’(꿈) 연주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2011년 12월 ‘남·북·미 트랙2 회담’ 마지막 날 박한식 교수의 자택에서 열린 만찬에서 재미 바이올린 연주가 안용구(왼쪽) 선생과 박 교수의 딸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박(오른쪽)이 ‘아리랑’을 협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1년 12월 ‘트랙2 회담’ 마지막 날 만찬에서 안용구 선생의 부인 김정현(맨 왼쪽)씨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나는 지하실 서재에서 각 나라의 대표들과 회담 합의문을 우리말과 영어로 작성하였다. 합의문이 완성된 뒤, 나는 모든 참석자 앞에서 6개 항의 합의 사항을 낭독했다. 합의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참석자 중 한분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다 같이 합창하자는 즉석 제안을 하였다. 우리 모두는 손에 손을 맞잡고 빙 둘러서서 커다란 원을 만들어 안용구 선생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며 평화가 이런 것이구나 또 통일은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011년 12월 트랙2 회담 마지막 날 박한식(앞줄 왼쪽 네째) 교수의 자택에서 남·북·미 참가자들이 6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한 뒤 다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1년 이후 남·북·미 트랙2 대화의 상설화 또는 정례화를 추진했지만, 지금껏 다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트랙2는 남·북·미 상호 대화를 증진시키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민간 교류의 모델이다. 특히 정부 간 대화 창구가 막혀 있을 때,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진행하는 ‘트랙2’ 대화는 남·북·미 간 상호 대화와 이해를 통해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마중물이다. 또한 2000년의 ‘6·15’, 2007년의 ‘10·4’, 2018년의 ‘4·27’ 선언에서 남북이 합의한 평화 통일 방안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도 트랙2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지난 6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표류하고 있는 작금의 남북관계를 고려해볼 때, 트랙2 대화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구술집필 권준택 뉴욕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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