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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했고, 꾸준히 늘었다 기억되고 싶어요”[부지런한 사랑/이슬아 지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31. 07:22

“성실했고, 꾸준히 늘었다 기억되고 싶어요”

등록 :2020-10-30 05:00수정 :2020-10-30 09:52

 

작가 이슬아, 아이들 200여명 글쓰기 가르친 경험 책으로 펴내
“작가 조롱하는 애들 보면 오히려 가벼워져…아직 쓸 얘기 많다”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지음/문학동네·1만6000원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아이도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2014년 봄 이슬아 작가는 이렇게 적힌 전단지를 동네 아파트 단지마다 붙이고 다녔다. 불과 한 계절 전 ‘한겨레 손바닥 문학상’에서 가작을 수상하며 데뷔했지만 청탁은 뜸했고 생계는 빡빡했다. 시급 높은 누드모델 아르바이트로도 월세와 생활비가 감당이 안 됐다. 그때 오랜 글쓰기 스승이 그에게 강의를 권했다. 이제 상도 탔으니 누드모델 말고 강의로 돈을 벌어보라 했다. 스물셋, 막 데뷔한 무명작가에게 글쓰기 과외를 맡길 부모는 많지 않았기에 이 작가는 “스스로를 교사로 임명”하고 직접 수강생을 찾으러 나섰다. 세상이 기회를 주지 않을 때, 마냥 기다리지 않고 제 손으로 그 기회를 만들어 내는 건 그의 주특기이자 생존방식이다. 훗날 <일간 이슬아>(한 달에 만원을 받고 글 20편을 메일로 전송하는 에세이 구독 서비스)로 ‘청탁 황무지’를 개척했듯 말이다. 케이티엑스(KTX)로 왕복 8시간 거리, 전라남도 여수에 초등학생 10명이 모인 작은 글방이 차려졌다.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글감을 던지면 돌아오는 건 ‘기억 안 나요’, ‘할 말 없는데’, ‘쓰기 싫어요’ 같은 심드렁한 대답뿐. 글쓰기가 마냥 귀찮은 아이들을 ‘쓰게 만드는’ 주제를 찾아야 했다. ‘그날 ○○이 입었던 옷’, ‘나의 탄생신화’, ‘방귀’까지 기발한 제시어를 던지며 그들의 표현 욕구를 자극했다.

이슬아 작가는 이 책에 아이들이 쓴 글 50편을 수록했다. 그는 “가르치는 자리에서 뭔가 확실히 말하려면 내가 잘 알아야 하기에, 글쓰기와 가르치기는 서로를 지탱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렇게 공들여 얻은 아이들의 글과, 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작가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부지런한 사랑>에 담았다.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슬아 작가는 “거의 5년 동안 매주 주말마다 출장 글쓰기 강의를 다녀서 20대를 떠올리면 케이티엑스부터 생각난다”며 “처음에 10명으로 시작했는데 이 아이들의 자매, 형제, 친구가 하나둘 합류하면서 막판엔 50명까지 늘었다. 대안학교에서 가르친 수강생까지 합하면 못해도 200여명은 나를 거쳐 갔을 것”이라고 했다. 글쓰기는 수학처럼 공식이나 정답이 없다. 모든 글에 통용되는 매뉴얼 같은 것은 없거니와, 그걸 안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글쓰기 교사는 좋은 글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는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내고 있을까. “장면을 선물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자주 말해요. 독자 마음에 뭔가를 그려주거나, 텍스트만 가지고 독자를 이미지 혹은 사운드의 세계로 데려가는 글들이요. (…) 때로는 큰따옴표가 스무개 이상 들어간 글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기도 해요. 그렇게 하면 ‘엄마가 뭐랬더라? 아, 잘 들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면서 귀와 눈을 활짝 열게 되거든요.”책에 소개된 아이들의 글을 보면 이 지침의 효력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함께 뒤섞여 놀다가 서로의 여름 냄새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 (…) 우리의 발에서는 가죽에 물을 묻히고 한동안 방치해둔 냄새가 났다.’(13살 이형원) ‘엄마가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 그러자 아빠의 영혼이 찬물에 적셔진 것처럼 놀랐다.’(10살 조이한이 나의 탄생신화를 주제로 쓴 글)“아이들이 자기가 쓴 글을 낭독할 때마다 놀라요. 자유롭고 기발하거든요. 나도 이런 문장을 쓰고 싶다, 닮고 싶다고 느껴서 어떨 땐 어린 스승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아이들이 ‘스승 같은’ 글을 써낼 때, 진짜 스승이 하는 일은 최대한 정확히 잘한 점을 짚어주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휘모의 손은 언제나 뭔가를 뚝딱 완성할 수 있도록 달구어져 있어. 누군가는 그걸 필력이라고 불러.’ ‘유나는 문장에 무엇을 넣거나 뺄지에 대한 감이 좋아서 읽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가독성을 선사하지.’이 작가는 이런 칭찬이 글쓰기라는 한정된 분야를 넘어 인생 전반에 필요한 자신감을 꼼꼼히 채워줄 수 있다고 본다. “글쓰는 사람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재밌는 글감이 돼요. 창피한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이 되레 부자처럼 느껴지는 거죠. 그걸 재료 삼아 독자를 웃길 수 있으니까요. 처음엔 자신을 미화하고 경직된 글만 쓰던 아이도 나중엔 자유롭게, 막 나가는 문장을 쓰는 걸 볼 때면 마음이 유연해졌구나, 건강하게 쑥쑥 자라고 있다고 느껴요.”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슬아 작가.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경험이 쌓이면서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도 훨씬 유연해졌다. 이 작가의 집에 글쓰기를 배우러 온 아이가 큰 맘 먹고 산 원목 책상에 샤프 끝으로 스크래치를 낼 때 그는 이렇게 말할 줄 안다. “있잖아, 나 이 책상 많이 좋아해.” 의자에 앉지 않고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아이에겐 선택권을 제공해 반항기를 잠재운다. “이 의자에 앉을지, 저 의자에 앉을지 네가 선택할래?”‘급식 먹고 취객처럼 구는’ 아이들로부터 예상 밖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선생님! 얘 꿈이 작가래요.” “X발, 내가 언제 그랬냐고! 얘가 하는 말 다 구라예요.” 작가라는 직업 자체를 조롱거리로 삼는 중학생을 보며 그는 허탈하기보단 오히려 재밌었다고 했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작가가 얘들에겐 너무 진지해서 우스꽝스러운 존재라는 거잖아요. 그걸 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요.”이 작가는 요즘도 여전히 일주일에 네다섯 시간을 글쓰기 강의에 쓴다. 동시에 2018년 첫 책을 낸 이래 벌써 여섯 번째 책을 펴낼 정도로 숨 가쁘게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수필은 작가의 삶이 비치는 장르. 다작으로 인해 글감 또는 이미지 ‘소진’이 걱정되지는 않을까. “아직 쓰지 않은 이야기가 많아요. 삶을 깊게 또 넓게 확장하기 위해서 누구를 만날지 잘 정하고, 누굴 만나도 잘 듣고 있거든요.”그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다. “성실했고, 꾸준히 늘었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글쓰기를 향한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은 한동안 마르지 않을 것 같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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