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뚫고 울리는 ‘민중·민족 지식인들’의 육성
등록 :2020-10-30 05:00수정 :2020-10-30 09:48
함석헌·안병무·김대중·송건호 등 현대 한국 지성사의 주역들
출판인 김언호, 책으로 각별한 인연 맺은 16인의 초상 그려
그해 봄날: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
김언호 지음/한길사·1만9000원
출판인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쓴 <그해 봄날>은 한국 현대 지성사·사상사의 종단면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만하다. 유신체제의 한복판인 1975년 ‘자유언론’ 투쟁을 벌이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지은이는 이듬해 한길사를 창립해, 중단된 자유언론운동을 출판문화운동으로 이어간다. 이후 40여년 동안 책을 만들면서 현대사의 걸출한 지식인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현인’이라고 부르는 지식인 16명의 초상이 생생히 돋을새김돼 있다. 종교인 함석헌·강원용·안병무, 언론인 송건호·리영희, 역사학자 이우성·이광주·이이화·최영준, 사회과학자 김진균·신영복, 문화예술인 윤이상·이오덕·박태순·최명희, 그리고 정치인 김대중이 그들이다. 정치인으로 유일하게 이 책에 이름을 올린 김대중을 지은이는 우리 역사를 통관하며 민족통일의 비전을 제시한 역사사상가,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를 전망한 문명비평가로서 주목한다.
이 책의 특징은 지은이의 주장보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이 책은 내가 쓴 것이지만,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나는 현인들의 육성을 충실히 받아 적는 기록자이자 전달자가 되고자 했다.” 책의 제목이 <그해 봄날>인 것은 지은이가 이 인물들과 세상을 향해 책으로 발언하자고 의기투합하던 시기가 공교롭게도 봄날인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지은이는 함석헌 전집을 기획했고, 김대중의 ‘옥중편지’를 편집했으며, 송건호가 참여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신군부 몰래 등사했다. 이 일화가 가리켜 보여주는 대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발언이 집중된 시기는 우리 현대사의 기나긴 혹한기와도 같았던 군사독재 시절이다. 말이 갇히고 글이 탄압받던 때에 말을 하고 글을 쓰려면 비상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 책 주인공들의 발언에 역사의 무게가 실리는 것은 이 발언들 하나하나가 그런 용기 속에서 나온 신념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은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이다. 지은이는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사상계>를 탐독하면서 함석헌의 글을 만났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 함석헌은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썼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 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인 찬성과 지지와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박정희 쿠데타군의 총칼이 번득이던 시절에 함석헌은 5·16을 4·19와 비교하며 가짜 혁명이라고 일갈했다. “그때(4·19)는 맨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엔 칼을 뽑았다. 그때는 믿은 것이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다 같이 있는 양심의 도리였지만, 이번에 믿은 것은 연알(총알)과 화약이었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했지만, 이번엔 밤중에 몰래 했다.”기독교를 젖줄로 삼아 형성된 함석헌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민족의식으로 뚜렷했지만, 사상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혼을 키운 기독교라는 틀마저 넘어섰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네 번째 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 없지만 내게는 이제 기독교가 유일한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이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은 씨알이 만들어가는 역사의 ‘뜻’을 묻고 찾았다. “그 뜻을 찾아 얻을 땐 죽었던 돌과 나무가 미(美)로 살아나고, 멀어졌던 과거와 현재가 진(眞)으로 살아나고, 서로 원수 되었던 너와 나의 행동이 선(善)으로 살아난다. 그것이 역사의 앎이요, 역사의 봄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지은이는 이 책에서 함석헌의 그 뜻을 잇는 사람으로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를 꼽는다. 한신대 교수를 지내다 유신정권의 마수에 걸려 해직당한 안병무는 1980년대에 지은이가 <함석헌 전집>(전 20권)을 만들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전집의 제18권은 함석헌의 편지들로 채워졌는데, 여기엔 1950~60년대 독일 유학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 40여통이 들어 있다. 시대와 역사를 신학적으로 사유하던 안병무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이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신학 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을 사회로부터 하나의 권리로 인정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인식하고 그 밑에 신음하는 민중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전태일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민중을 정확히 바라보고 각계에 호소했으나 이 사회는 카프카의 ‘성’처럼 그에게 차단돼 있었다. 그는 육탄으로 이 굳은 성을 폭파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전태일이 산 안병무를 일깨워 민중신학자로 거듭나게 했다. 투옥과 고난의 가시밭길이 이 신학자 앞에 놓였다. 1993년 안병무는 한길사에서 펴낸 <안병무 전집>(전 6권)에 이렇게 썼다. “나의 삶에, 나의 사상에 결정적 전기는 ‘민중’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정좌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침내 역사의 담지자를 만난 것이었다.” “수난의 도상에서 민중과 만나면서 나는 오랫동안 거미줄같이 나를 휘감았던 서구적 사고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못 만난 예수를 나는 만나게 되었다.”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언론인 송건호. 한길사 제공
지은이가 기획하고 펴낸 책으로, 1980년대를 뒤덮은 변혁의 불길에 풀무 노릇을 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 첫 권의 권두 논문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을 쓴 이가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언론인 송건호다. 이 논문에서 송건호는 말한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런 여건 하에서 민주주의가 꽃핀다.” ‘민족’과 ‘민중’이라는 말이 역사의 뒷길로 밀려난 것만 같은 시대지만, 모든 사람이 나라의 주인으로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 민족·민중 지식인들의 열망과 투혼이 밴 문장들은 책의 표지를 뚫고 함성처럼 울려 나온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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