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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사랑의 말들’을 놓지 않았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1. 8. 08:16

마지막까지 ‘사랑의 말들’을 놓지 않았다

등록 :2020-11-06 05:00수정 :2020-11-06 09:47

 

고전학자가 1년간 어머니를 간병하며 적은 ‘삶과 죽음’
“어머니 말에 대한 해석이자 사랑과 주체성에 대한 기록”

 

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지음/창비·1만6000원

 

“엄마!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요!” “어어어.”아들은 호스피스 병실에 누운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어머니는 호흡이 끊어질 듯 말 듯 간신히 이어지는 순간에도 아들의 말에 답한다. 힘겹게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고전학자인 박희병 서울대 교수가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을 앓았던 어머니를 1년간 간병하며 쓴 기록이다. 삶과 죽음, 돌봄, 호스피스 완화의료 등에 관한 인문학자로서의 세밀한 기록이기도 하다.책은 어머니의 말과 지은이의 해석으로 구성돼 있다. 1번부터 165번까지 번호를 단 말은 대부분 구순의 어머니가 가슴에 품은 예순네살의 아들에 대한 걱정이다. “밥은 묵었나?” “오지 마라. 힘들다.” “춥다. 옷 더 입어라.” “피곤한데 또 왔나? 욕만 보인다.” “밥 차리났다더나? 퍼뜩 가 밥 묵으라.” “니가 나 때문에 에비따(여위었다).” “조심해라.” 이 모든 걱정의 말은 곧 어머니가 늘 말한 ‘사랑의 말’이다. 그 말은 언제나 타인에 대한 관찰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바라보고, 병실의 환자들과 간병인을 보고 창밖 풍경을 살펴보았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지은이는 “‘보다’와 ‘말하다’라는 두 동사는 엄마가 자신의 마지막 주체성을 실현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그 행위의 동력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보다’와 ‘말하다’라는, 엄마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셨던 주체성의 두 계기는 ‘염려하다’라는 또 다른 주체성의 계기와 결합됨으로써 인간적 온기와 품위를 담보하면서 인간성의 어떤 고양된 높이를 보여줬다. ‘염려하다’라는 동사에는 ‘사랑’ ‘배려’ ‘헌신’ ‘희생’ ‘안쓰러움’ ‘슬픔’ ‘연민’과 같은 명사들이 그 내용물로 포함되어 있다.”

2019년 3월 호스피스 병동 로비의 꽃 앞에 앉아 있는 박희병 교수의 어머니. 박 교수의 아버지가 그렸다. 창비 제공

 

어머니를 관찰하고 말을 해석하고

 

아들이자 인문학자로서 지은이는 세심한 관찰과 해석으로 흩어질 뻔한 어머니의 말에 의미를 불어넣었다. 병원에서는 어머니를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말’을 하고 ‘혼돈’ 상태에 있는 인지저하증 환자로만 규정했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한 스승이다. 어머니는 이성적 판단은 흐려졌어도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와 염려,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은 자신보다 높았다. “나는 1년 가까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와 함께하면서 ‘정상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다. 엄마는 생의 마지막에 내게 큰 공부를 시키신 것이다.”지은이는 인지 장애 때문에 옛 시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어머니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아부지” “희병아! 도망가라!” 등 갑자기 툭툭 내뱉는 말들은 아주 깊숙한 곳에 남아 있던 기억의 발화였다. 어머니가 살아오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말로 전한 것이다. 옛 기억은 옛 언어를 불러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프기 시작하면서 예전에 쓰던 경상도 사투리를 다시 했다. 어느 날엔 어머니가 오래전 저녁 무렵에 자주 하던 “늦었는데 밥 한그릇 해가 간단히 묵자”라는 말도 했다. 이 말을 들은 지은이는 “엄마 덕에 까마득히 잊어버린 저 옛날을 소환할 수 있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엄마와 소통하고 ‘접속’할 수 있었”다. ‘혼돈’의 상태에 있었던 어머니가 전한 추억 선물이었던 셈이다.

 

인문학자가 목도한 호스피스 의료의 현실

 

지은이는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말기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현실을 목도한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기암 환자의 존엄한 죽음을 돕기 위해 환자에게 통증 완화를 포함해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영역 등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치료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걸음마 단계다. 호스피스는 2017년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이 시행되면서 제도적 틀이 마련됐지만 관련 인프라 구축 등이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무엇보다 지은이가 1년간 여러 호스피스 병원에 다니며 느낀 것은 환자 중심의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의료진에게 환자는 이해 아닌 처치의 대상일 때가 많았고, 의료진이 환자가 느끼는 불편함과 부작용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잦았다. 병원 시스템과 의료진에 따라 어머니의 몸 상태는 크게 달라졌다. 한 병원에서 어머니가 천덕꾸러기였다면 다른 병원에서는 ‘스마일 할머니’였다. 후자는 “환자를 장애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인간’으로 여기고 대하는 자세와 감수성”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환자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 존엄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의료진의 헌신적 보살핌, 간병인의 적절한 돌봄 그리고 호스피스 의료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뒷받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아버지가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

 

또 하나의 중요한 깨달음도 담겼다. 지은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죽음의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먼저 떠난 어머니가 이끌어준,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첫걸음이다.박 교수는 4일 <한겨레>와 전화통화에서 “이 책은 엄마의 말에 대한 해석이자 죽어가는 한 인간의 사랑과 주체성의 기록”이라며 “사적인 기록에서 출발하지만 누구나 겪게 되는 간병 문제,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일,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책에 아버지가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실었다. 남편이 묘사한 아내의 모습은, 아들의 글과 어우러져 잔상을 뚜렷이 남긴다. 남편과 아들이 그리고 적은 두 사랑의 기록이 책에 담겨, 이곳에 남았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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