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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칼럼] 들국화 주찬권씨는 정말 죽었을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1. 4. 17:19

[신영전 칼럼] 들국화 주찬권씨는 정말 죽었을까?

등록 :2020-11-03 17:02수정 :2020-11-04 11:45

 

지금 지구상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이는 모든 존재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우리의 지식체계가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더욱이 우리 몸에서 세균, 바이러스 등을 모두 제거하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고 하니 미생물과 우리를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신영전 Ι 한양대 의대 교수

 

주찬권씨는 정말 죽었을까? 그는 가수이자 드러머로 1980년대를 풍미한 록그룹 들국화의 멤버였다. 그를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그는 2013년 10월20일 자택에서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결례가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노래가 내 몸속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의 긴 노동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음악을 듣는다. 그의 노래는 내겐 노동요요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강장제다. 운전을 할 때 한껏 볼륨을 높이면, 그가 내리치는 비트 하나하나가 운전대 위에 올려진 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고 마침내 내 심장의 판막과 공명을 이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는 정말 죽었을까? 북채를 잡고 내리치는 그의 손목의 힘을 지금 이렇게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가 이미 죽었고 그의 드럼 소리는 레코드판의 홈이나 메모리 장치의 비휘발성 물질로만 남아 있다고 말할 때면, 나는 그럼 그건 그가 아니냐고, 당신들이 그가 살아 있다 말할 때도, 그나 우리나 65%의 수분, 15%의 단백질, 14%의 지방, 그리고 약간의 무기염류가 전부 아니었냐고 술주정하듯 우기곤 한다. 그러다 힘이 부치면 멀리 있는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이럴 땐, 그림도 잘 그리는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제일 든든한 우군이다. 그는 어떤 정치가처럼 주먹을 치켜들고 “신과 세계, 생물과 무생물은 하나다!”라고 외친다. 글 잘 쓰기로 유명한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도 “생명체란 우연히 그곳에 밀도가 상승하고 있는 분자 ‘덩어리’일 뿐이지요”라며 갈색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린다. 물리학자 김범준 교수도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저 우주 어디선가 초신성의 폭발로 만들어진 바로 그 원자임을 깨닫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라며 한마디 거든다. 인간만이 아니라 물질에도 힘과 활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자 제인 베넷은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려는 헛된 시도를 단념하라. 그 대신 당신 역시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배치 내의 비인간들과 더 정중히,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관여하도록 노력하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꼭 집어 이야기한다. 이 모든 이들 뒤에 조심스러움이 많은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서 있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는 만족한 얼굴로 “그렇지. 죽음이란 단지 태어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때 뒤늦게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한 시인이 외친다. “모든 경계는 결국 의식의 경계일 뿐!”

 

쟁쟁한 동료들의 지원에 한껏 고양된 나는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코로나바이러스 이야기를 꺼낸다. 지금 지구상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이는 모든 존재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우리의 지식체계가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더욱이 우리 몸에서 세균, 바이러스 등을 모두 제거하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고 하니 미생물과 우리를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더욱이 바이러스는 진화의 촉진자이자 동반자이며, 항생제 남용으로 생긴 슈퍼 박테리아를 먹어치워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식체계를 비롯한 과거 모든 체계를 재구축해야 하는 시기에 살고 있으며 이는 인류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시작은 생물과 무생물, 동식물과 인간, 적과 우군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모든 존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공생적 온존’(symbiotic wellbeing)의 인식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 인식대로라면, 오늘 연구실로 오던 길가의 가로수가 처음 거기에 심어질 때, 꾹꾹 땅을 밟아 다지던 인부의 발 힘이 어린나무의 뿌리를 흙에 단단히 고정시켜 양분을 잘 빨아들이게 했고 그해 여름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게 했으니 이제 제법 굵어진 가로수 단풍의 위용은 그 인부들의 힘에 빚진 셈이다. 반대로 지금 내가 살고 일하는 집과 연구소 건물은 500만년 전 북한강 상류의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한강의 모래가 만들어준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 무리의 활기는 아주 오랜 옛날 미토콘드리아란 작은 존재가 인간의 세포 내로 들어와 공생하며 만들어내고 있는 에너지 덕분이다.

 

주찬권씨도 이런 나의 생각을 알았던 것일까? 그는 그의 노래 ‘빗소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순 없다 하지만/ 언제나 언제나/ 여기 남아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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