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1212 연약함을 자랑하라(고후 12:7-10)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3:25

 

101212  연약함을 자랑하리라  (고후 12:7-10)

성경본문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지난 주에 예고한 대로 남선교회에서 <열린 아버지학교>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여섯 사람이 참여했는데 저도 참여했습니다. 느낀 바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입니다.’ 이번 아버지학교는 특별히 장소를 교회 밖으로 옮겨서, 대상도 주로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보다는 우리 이웃 들을 초청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분들과 믿지 않는 분들이 반반 정도 모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번 열린 아버지학교는 저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찬양 대신에 7080의 노래를 불렀는데도 은혜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더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작심하고 배운 노래 몇 개 외에는 유행가를 주목해서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다 그저 귀로 흘려 들었는데, 이번에 공식적으로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아서 가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니까 참 심오한 진리가 있더라고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심지어는 소양강처녀도 불러봤는데요, 거기도 의미가 있더라고요. 윤수일의 아파트’, 옛날 그렇게 TV에서 떠들 때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현대 세속사회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텅 빈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했구나. 공감의 크기가 찬양 못지않게 컸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그러면서 이걸 느꼈어요. 유행가를 하나도 주의 깊게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자리에서 따라 부르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더라고요. TV의 위력은 대단한 거예요. 이미 내 몸 속에 다 들어와 있었던 거예요. 눈을 뜨고 보니까 그 내용이 이해가 된 거예요. 반대로 이건 뒤집어 얘기하면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이 믿음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콩나물에 물주는 것과 똑같아요. 계속 스며들고 있는 거예요. 이제 내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눈을 씻고 볼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제부터 예배시간에 조는 분들에게 더 이상 실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 몸으로 스며들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남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저절로 아버지가 되는 것 아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저절로 남편이 되는 것 아니다. 제가 이번에 받은 충격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연평도 피격사건 못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많은 남자들이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고 있구나. 그걸 건져주어야 되는데 건져주기는커녕 나 역시 급류에 휘말려서 허우적거리면서 떠내려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저는 아무래도 많은 분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목회를 배우고 목회현장 속에서 일했습니다만 한국의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었기에 다분히 일 중독에 매여있는 점에선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목사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붙들고 현실 문제들을 지탱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동아줄이 있다고 한다면, 일반 비즈니스 하시는 많은 분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거죠.

자카르타는 굉장히 거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친척들 사는 것을 보니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그러면서 20, 30년 사는 거예요. 위로 받을 곳이라고는 없어요. 저녁에 어디 나가서 술을 마시겠습니까. 어림도 없어요. 가정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고 교회를 찾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이 곳 자카르타는 그렇지 않아요. 맘만 먹으면 골프도 칠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어요. 때로는 원치 않지만 비즈니스 때문에 술을 마시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는 상황이라면 어떤 게 행복한 겁니까? 여기는 미국보다 더 거친 곳이에요. 겉보기에는 잘 먹고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아니요, 그건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남자들, 그들의 가정, 그들의 자녀, 그들의 아내, 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평도 피격사건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지붕도 무너졌고 벽도 내려앉았고 다 깨진 거예요.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상황 속에 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는 위로에요. 하늘의 위로가 없으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의 선교여정은 너무나 험악했어요. 제가 지난 번에 사도 바울의 선교여정을 따라서 터키를 다녔습니다만,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길이 발달하지 않았잖아요. 지금도 그런데 2천 년 전은 오죽하겠습니까. 높은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런 곳을 갈 때 강도의 위험도 있었고 강을 건너다 떠내려간 경험도 있었고 배가 파선한 적도 있었고 위험에 완전히 노출된 상황이죠. 또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방해와 핍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여정 속에 있었던 고난을 얘기합니다. 숱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39대의 채찍질을 세 번이나 맞아야 했다. 태장을 또 세 번이나 맞았고 배가 파선되어서 물에 빠져 죽을뻔한 고비를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숱한 밤을 추위에 떨어야 했고 굶주려야 했고 곤고한 나날을 보냈다고 하는 겁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려웠죠.

그 모든 고난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치지만 그 자리를 떠나면 다 연약한 교회인지라 교회에 어려움이 와서 성도들의 신앙이 어그러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장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위로를 주셨어요.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아주 놀라운 얘기를 해요. 내가 어떤 사람을 안다, 사도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삼층천에 올라갔었다고 말해요. 삼층천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우리 눈으로 보이는 하늘, 그것을 넘어서 있는 우주, 마지막으로 그것을 넘어서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라고 얘기하는 하늘입니다. 삼층천이라고 얘기하는데 천국에 갔다 왔다는 얘기에요. 내가 그곳에 가서 경험한 그것은 도저히 뭐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할 일도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 놀라운 하늘의 신비를 보고 그것이 현실인 것을 알았기에 오늘 이 땅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위로를 주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휴가를 나가기 전에 어느 선교사님이 책을 한 권 소개해주시더라고요. <내가 네게 불세례를 주노라> 라는 책이에요. 한국에 나갔을 때 서점에 들렀을 때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인천에 있는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요. 교회식구들이 채 20명이나 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목사님 부부가 병원을 다니면서 전도를 해요. 오랫동안 무당생활을 하다가 중병이 들어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전도하게 됐어요. 그렇게 우상을 깊이 섬기는 집안은 저주가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다 이상한 병으로 고통 당하는 그런 여자분을 만나서 예수님을 전하게 돼요. 성령이 역사하셔서 이 분이 마음을 열었어요. 예수를 믿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어요. 그리고는 교회에 날마다 한 10명 정도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들은 세상에 내놓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건강도, 자랑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있는 목사님 부부와 그 자녀들, 늙은 전직 무당과 그 자녀들,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얼마나 은혜를 부어주시는지 모두 다 차례차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체험담을 책 7권으로 쭉 기록해놓았습니다. 믿든지 말든지 말입니다.

원래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부흥집회 초청을 합니다. 지금 그런 일이 있어요. 세상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위로를 주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조금 맛있게 먹고 조금 편안하게 산다고 이것이 내 삶에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스스로 속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넘치는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이 죄의 굴레 속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놀라운 사건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위로라는 것이죠. 그래서 조용히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는 일이 잘 될 때 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영락없이 우리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깨어져서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때 하늘의 위로를 얻어요. 잘 나갈 때 잘 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 우리 인생의 변화는 남편도 아내도 이해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만져주시는 그 시간에 일어나요. 혹 삶의 고통과 아픔이 있다면 그걸 거부하지 마세요. 외면하지도 마시고. 오늘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시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세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130~140년 전에 조선이란 나라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나라에요. 이들이 미국 대부흥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20대의 젊음을 하나님께 송두리째 드렸어요.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다 26, 27나이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조선으로 들어와서 한평생을 쏟아 붓고 살았던 거예요. 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참 감동이 있어요. 그런데 선교사들의 수기를 읽다 보니까, 그들이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을 이야기하지만 또 사람이기에 나름의 고민과 아픔과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한나 스미스의 글을 통해 그런 문제들을 해결 받았다는 고백이 있어요.

한나 스미스(Hannah Smith) 1832년생이니까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한참 은혜를 받을 때 이분은 중년을 넘어선 분이죠. 그녀의 글이 많은 지성인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불붙는 마음으로 헌신하려고 하는 그들에게 신앙을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줬다는 거예요. 그녀가 어느 철학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앙을 권유했어요. 그랬더니 이 철학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두통을 앓는 사람들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세상 사는 것도 버거운데 하나님 믿는다고 그 무거운 것까지 또 떠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더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 어두운 얼굴로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가. 이건 하나님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잘못된 것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신앙을 조목조목 말씀을 가지고 풀어본 거예요. 그것을 아주 명쾌하게 정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빛을 던져준 거죠.

그 상황이 오늘 사도 바울의 발견이에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천국의 계시를 체험했어요. 세상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얻었어요. 그러나 다시 눈 뜨면 여전히 어려운 현실이 있어요.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했어요. 그것은 사도 바울의 질병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13절에서 15절에 보면 내가 여러분을 처음 만났을 때 여러분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질병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뜻 받아들이고 환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놀랍게도 넉넉한 사랑으로 볼품없는 나의 외모를 다 받아주고 나의 질병까지도 받아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눈이라도 빼어서 나를 주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질병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눈이라도 빼어서 주었을 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봐서는 혹시 뭔가 눈에 깊은 병이 있지 않았는가, 또 어떤 학자들은 혹시 간질이 아니었는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서로 대하기에 너무나 불편하고 어려운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삶을 다 드렸는데 이 병을 고쳐주셔야지 어떻게 나로 하여금 이 병을 끌어안고 살게 하십니까하고 세 번이나 작정하고 간구를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은 응답하지 않으셨어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응답이었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이미 내가 네게 부어준 은혜가 풍성하도다.’ 그 말은 뭐에요.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구하지 말아라. 그것은 내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 고통을 왜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 때 깨달았어요. 내가 하나님의 천국을 체험한 이 계시가 너무 크므로 교만할까 봐, 내 몸에 가시를 심어주셨구나. 이 질병은 평생 나와 함께 가는 것이구나. 이게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내가 이 연약함 때문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정해주신 목적을 아름답게 이루는 것, 이게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여러분, 이게 바로 삶의 영적원리에요. 예수 믿는 것은 도 닦는 게 아니에요. 흔히 가정도 뒤로 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도를 닦는 것, 그건 아니에요. 우리의 이 연약함은 죽을 때까지 가는 거예요. 우리와 함께 가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이에요.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음을 알고 있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그게 연약함을 우리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에 한 무명의 병사가 지었다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였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큰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구하였으나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를 얻어 행복을 누리기를 간구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되어 오히려 지혜를 배웠습니다.

언젠가 권력을 휘둘러 만인의 찬사를 받기를 원하였으나

힘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을 손에 넣고자 바랐건만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주시어 온갖 좋은 것을 다 즐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한 가지도 받지 못하였으나

모르는 중에 나는 희망한 것을 모두 얻었으니

나는 부족한 몸이지만 내가 간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모두 응답되었습니다.

나는 만인 중에서 가장 풍성한 축복을 얻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 때에 세속문화에 일대일로 싸우려 한다면 각개격파를 당한다는 겁니다. 신앙적이고 성경적인 습관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어요. 남선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 한번 삶의 원리를 정리하고 뜻을 정하고 일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되겠다. 교회가 사회 속에 유리되어 게토(Ghetto)가 되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여러분,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마음을 같이 해서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