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1226 하나님을 가까이하라(약 4:1-10)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3:27

 

101226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 4:1-10)

성경본문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2010년 직장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설문조사 한 내용이 있습니다. 직장인들의 고민은 '날마다 점심을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지요. 점심메뉴를 선택할 때마다 고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90.9%, 열의 아홉 명은 날마다 고민하는 거예요. '오늘은 뭘 먹을까?'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메뉴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같으면 뭘 선택하겠습니까? 1위는 압도적으로 김치찌개, 그다음 된장찌개, 백반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 선택의 기준은 뭐냐? 첫째는 맛, 두 번째는 가격, 세 번째는 속도, 네 번째는 양 그리고 다섯 번째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심하는 그들에게 새해 목표가 뭐냐고 물었더니 "새해에는 새 직장으로 옮기겠노라." 하는 거예요. 점심 먹을 때마다 뭐 먹을까 고민하는 한 해를 보내면서 일이 도대체 맘에 안 들어서 새해에는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야지 하면서 10, 20, 30년 살고 있는 거예요. 정말 우리에게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한 거지요. 보수가 조금 더 좋은 직장으로 가는 게 해결책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뉴질랜드의 원주민이 마오리족이에요. 원시 부족들이 다 그러하지만 그들은 전쟁을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치릅니다. 사실은 주기적으로 치르게 되는 거예요. 그들은 식인종이었어요.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어요. 그들에게 선교사가 들어갔어요. 그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알아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선교사들이 나름대로 수고하고 애를 쓰지만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들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러나 선교사들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데 잡아 먹히지 않는 것, 그거 하나로 위로를 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선교사가 닦아 놓은 길로 상인들이 들어와 총을 팔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이 마오리족들은 부족 간에 다툼이 생겨 살인이 일어날 때 부족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복수해야 된다는 나름의 규율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거든요. 거기에 착안한 상인들이 총을 팔았어요. 총으로 무장했어요. 총을 들고 나가서 복수를 했어요. 그랬더니 이게 상황이 다른 거예요. 다 죽게 생겼어요. 전쟁을 경험한 거예요. 이건 아주 자기 파멸적이에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을 시작했지만 전쟁은 늘 확대되는 법이기에 나중에는 어떻게 돼요? 사람이 시작한 전쟁이지만 그것을 이끌어 가는 것은 전쟁이 되어버렸어요. 사람이 거기에 다 휘말려 들어가 그 결과를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전쟁의 결과가 참혹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자기파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드디어 해답을 찾았어요. 선교사들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생들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집단 개종했어요.

여러분, 이런 일화가 있어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저 아프리카의 한 원시부족의 족장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에게 물었대요. 원래 이 사람들도 다 식인종이었거든요.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런 악한 습관들을 내버리고 예수를 믿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추장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식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선교사에게 묻는 겁니다. "제가 듣자하니 선교사님이 온 나라에서 지금 큰 전쟁이 일어났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수십만이 죽었다는데요?" "그렇습니다." "거 참, 이해가 안 되네요? 한꺼번에 어떻게 그걸 다 먹으려고 하나요? 우리는 먹을 만큼만 죽이는데." 누가 원시인입니까? 그게 계몽주의 이후에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면서 이 땅에 평화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하는 일이에요. 도대체 누가 원시인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람을 둘로 나누는 거예요.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싸우고 다투며 하나라도 더 빼앗으려고 하는 인생들은 결코 얻지 못한다는 것. 손에 움켜쥐었지만 그것으로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표현을 했어요. ‘간음하는 여인들이여!여기서는 꼭 여자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으며 하나님 안에서 지극한 행복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멀리 세상으로 도망가서 세상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구약에 이런 표현이 많이 있잖아요. ‘간음한 여인들이여! 그렇게 세상과 벗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거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버리고 세상으로 도망간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불붙는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시지 않느냐? 십계명에도 그랬죠?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질투를 하려면 먼저 사랑한다는 게 전제되어야 해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 여자가 다른 사람하고 사랑하는 걸 왜 질투하겠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불붙는 마음으로 질투하신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결코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는 불붙는 사랑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존비비어(John Bevere) 라는 분이 자기의 신앙체험을 이렇게 책에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느껴요. "내가 나를 아끼는 것보다 너를 더 아낀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이해가 안되었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이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니.'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어요. "하나님, 정말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성경구절을 세 개만 나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빌립보서 2 3절 말씀을 떠오르게 하셔요. 거기에 보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각자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그래서 "이거는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씀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이 저에게 주실 말씀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나는 내가 지키지 않는 말을 너희보고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나보다 너를 정말 귀하게 여긴다는 내 마음을 이 말이 잘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말씀을 주셨어요. 베드로전서 2 24절에 보니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고민과 불안과 저주와 모든 것을 해결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런 고통을 감수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거예요.

세 번째 말씀을 주셨어요. 로마서 8 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셨다.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으시고 우리를 예수님의 동생과 같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자로 삼으셨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자유로운 인생으로 살았어요. 사람들이 볼 때는 고난가운데 있었지만 그 고난 속에 하나님과 활짝 열린 관계를 가지고 아버지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고난도 능히 감당하고 이길 수 있는 자유인으로 사셨던 거죠.

이렇게 격랑이 일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오늘의 삶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내년에는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야지. 승진하고 더 높은 보수를 받아야지 이거로 문제 해결이 안 돼요. 삶의 패러다임(Paradigm)을 완전히 바꿔야 되는 거예요. 삶의 조건을 조금 더 낫게 함으로써 인생이 변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직장을 절대 옮기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에요. 그것도 하나님에게 물어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 할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의 모든 물음에 대해서 해답을 가지고 계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거지요.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동생이지요. 야고보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는 예수의 소문을 나사렛에서 들으니까 전혀 이해가 안됐어요. 심지어는 귀신들려 미쳤다라는 소식을 듣고 붙잡으러 나왔었어요. 동생이었지만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드디어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도가 되었어요. 그가 바로 야고보 사도에요. 그가 말해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걸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한걸음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만 그 변화는 늘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마가복음에 보면 참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베푸시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요. 특별히 병든 사람, 아픈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어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수가 없었어요. 몸이 괴롭고 아픈 사람이 체면이 문제가 되지 않죠. 고침을 받아야 되겠기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옷자락을 붙들고 몸을 부딪치고 하니까 주님이 말씀을 전할 수가 없어서 호숫가에 배를 띄우게 하시고 사람들을 호숫가 들판에 앉게 하시고 말씀을 전하실 수밖에 없었어요. 사람들이 계속 좇아다니니까 너무나 피곤하셨어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배가 뒤집혀지는 위기 속에서도, 제자들은 난리가 났다고 소리를 치지만 예수님은 깊이 잠에 곯아 떨어지셨어요. 너무나 피곤해서요. 그런데 그 호수를 건너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죠. 그런데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처음 맞이한 건 누구였냐면 무덤가에 살고 있던 귀신들린 사람이었어요. 그의 불쌍한 모습을 보시고 고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에게 들렸던 군대귀신을 내쫓고 회복시키셔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는 이제 네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긍휼이 여기사 너에게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을 가서 이야기하라." 그러고는 예수님이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다시 건너오셔서 그를 기다리는 많은 무리들에게 다가가셨다는 대목이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늘 많은 사람을 대하셨지만 동시에 예수를 갈망하는 한 사람을 늘 찾으셨어요. 갈릴리 호수 이편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지려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때로는 호수를 건너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한 사람을 만나주셔요. 그를 고쳐주셔요. 그리고 돌아오지요.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계셔요. 하나님 눈에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그 뜨거운 마음으로 바로 나를 사랑하시지요. 여러분, 오늘은 우리 생애에 남은 날 가운데 첫날이지요.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스바냐 3 17절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냐? 허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나를 기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