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의 은총
2010년 4월 18일
성경본문(개역개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17-21
이어령 교수의 고백입니다. 그가 11살 때, 해방 전 태평양전쟁 말기에 모든 것이 어려웠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아주 중한 수술을 받게 되었답니다. 서울로 갔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린 아들을 위해서 예쁜 필통을 사서 보내주었습니다. 병문안 오신 분들이 전시에 구하기 어려운 귤을 몇 개 가지고 왔는데 그걸 끝까지 드시지 않았어요. 이 귀한 귤을 아들에게 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끝내 그 귤은 하얀 상자에 담긴 어머니의 유골과 함께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11살 난 어린아이였지만 그 귤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귤은 사랑의 태양이요, 그리움의 달이었습니다. 그 귤은 어머니의 상자와 함께 무덤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나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난날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극심한 가난 속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정이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것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죠. 또 하나님을 믿는 어머니들은 가족들이 모르는 이른 새벽에 늘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어려움을 짊어지고 나아갔던 것이지요.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데는 남모르는 희생이 있는 것이지요.
오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의 특징을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지만 한 가지 중요한 해석은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거예요. 만물의 찬양을 한복판에서 지휘하는 존재예요.
그런데 그만 아담이 하나님의 그러한 뜻을 저버리고 자기가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안다 한들 대처할 방법도 없는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내가 하나님같이 되겠다’고 하는 이것을, 성경은 ‘타락’이라고 말해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어요. 그것을 ‘죄’라고 말해요. 화해라고 하는 것은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나 살아보니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끝내는 죽어요. 회복하고 싶은데 사람으로서는 회복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어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고통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예요.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신이다 하나님의 대사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셨던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그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 속에 살아야 했던 거죠. 그런 속에서도 온전한 자유인으로 사셨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죠. 하남님과의 관계가 열려있는 상태에서 살 때에는 사람이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셨지만 우리가 그것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보아도 행할 수 없어요. 그러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사건을 이루신 것이지요. 그것을 성경은 ‘속죄贖罪’ 라고 말해요. 죄를 지었어요. 죄값을 치러야 돼요. 그러나 돈이 없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죄값을 치러주어서 풀려나는 것을 ‘속죄’라고 말해요. 같은 표현으로 ‘속량贖良’ 이라고 말해요. 노예였어요. 종이었어요. 몸값을 치러야 돼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 몸값을 치르고 양인으로,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그것을 ‘속량’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로댕의 작품 중에 <칼레의 시민>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어요. 14세기 백년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가 오랫동안 싸웠거든요. 그때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바다를 건너서 프랑스를 쳤을 때 프랑스의 첫 성이 칼레였어요. 칼레의 시민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영국군을 맞아서 1년을 버티며 싸웠어요. 그러나 끝내는 프랑스 다른 도시들의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사절단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보냅니다. “우리가 항복하겠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지난 1년 동안 지독하게 저항하고 엄청난 피해를 준 칼레를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다 죽이겠다고 했어요. 사절단이 간절히 목숨을 구합니다. 왕의 측근들이 저들을 용서하고 넘어가자고 권고하자 드디어 왕이 결단을 내렸어요. “좋다, 내가 칼레 시민의 목숨은 보장해주겠다. 단 하나 조건이 있다. 그냥은 넘어갈 수 없다. 너희 중에 여섯 사람을 뽑아라. 그들은 교수형에 처하겠다. 누가 죽을 것인지는 너희들이 정해라.”
칼레의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어요. ‘이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 죽을 테지만, 누가 우리를 대신해 죽을 것인가?’ 갑론을박이에요. 추첨을 하자는 얘기도 나았어요. 고민에 빠졌어요.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납니다. 가장 부자인 웨스타슈 드 쌩피에르가 일어나서 “내가 죽겠소.” 앞으로 나왔어요. 그것을 보고 시장도 나왔어요. 법률가도 나왔어요. 돈을 많이 번 상인도 나왔어요. “내가 죽겠습니다. ‘ 여섯 사람이 앞에 나왔어요. 마지막 날 그들은 자루 옷을 입고 교수대로 올라가 목에 밧줄을 걸게 됐어요. 그 소식을 들은 영국 왕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제발 삼가 해주십시오.” 그 간청을 왕이 받아들여서 사신을 급파해서 그들을 사면하게 돼요. 모두가 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야기가 칼레 시의 전설이에요.
19세기 말 칼레 시에서는 그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로댕에게 작품을 주문한 거예요. 로댕이 10년 만에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어요. 완성하기 전에 시의원들에게 작품을 보여주게 됐어요. 그런데 작품을 보니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요. 용감하게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던 영웅들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로댕이 만든 여섯 명의 조각상을 보니 그들은 다가올 죽음의 고통으로 인해서 번민에 싸여 있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몸짓 그대로예요. “이건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데요?” “아니요, 이것이야말로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영웅을 만들어서 사실을 미화하고, 높은 데에 올려놓음으로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칼레의 시민>은 맨바닥에 여섯 개의 동상을 세웠어요.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저 ‘훌륭하구나’하고 지나치게 되지 않아요. 그 진실 속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들의 음성을 듣게 돼요. “당신도 우리와 같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아니었다면 다 죽었어요. 아름다운 희생이었어요. 그래서 모두가 살 수 있었어요.
오늘의 성경말씀 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까지도 다 물리치셨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추상적인 이해예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물으셨어요. “꼭 내가 죽어야 합니까?” 히브리서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동을 주셔서 생각을 바꾸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자가 되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을 입고 태어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명을 주세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대사가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과 같이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대사가 되어라. 하나님과 화해한 자가 되어서 세상사람들에게 나아가서 화해하라고 선포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이 있어요. 김하중 전前 통일부 장관은 사실 전 중국대사로 더 유명하신 분이시죠. 6년 반이나 중국대사로 계셨고 최장수 기록을 세우신 분이에요. 그분이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교회를 가끔 나갔는데 대학을 들어가면서부터 아주 교회를 떠났어요. 그러다가 1994년 나이 47에 뒤늦게 회심하게 되었어요. 그 배후에는 세 여인의 기도가 있었대요. 평생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엄니의 기도가 있었고 아내의 기도가 있었고 딸의 기도가 있었어요. 나중에는 딸이 아빠의 회심을 위해서 아빠 앞에서 금식을 선포해요. “난 아빠를 위해서 이제부터 밥 안 먹어요.” 그리고는 기도하는 거예요. 그 바람에 이분이 마음이 약해져 가지고 “그래 알았어, 이제 그만해 내가 교회를 나갈게.” 교회를 나온 첫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속죄의 은총을 알게 되었어요.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뒤늦게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니 대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불안해하고 초조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용납하지 못해요. 사랑하거나 여유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요. 정부의 훈령을 따라 움직이는 대사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대사다.’ 이게 그의 자기 정체성이었어요. ‘나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겠다.’ 이분이 참 어려운 때에 중국대사로 계시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거예요. 그 어려운 일들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면서 풀어나가는 거예요. 중국에 사는 우리교민들이 겪는 어려움이 참 많지 않습니까?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음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기도하면서 구원해냅니다.
특히 탈북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한국대사관에도 탈북자들이 들어올 것을 예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준비합니다. ‘하나님 저렇게 북한을 탈출해서 자유를 찾아 헤매고 있는 많은 동포들, 이 불쌍한 영혼들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들이 스페인대사관이나 다른 대사관들을 통해서 자유를 얻고 있지만 분명히 한국대사관으로 오게 될 테고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심각한 갈등이 초래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하나님 1천 명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참으로 한 편의 드라마였는데요, 나중에 퇴임할 때 헤아려보니까 1천 명이 넘는 탈북자를 끌어안고 한국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거죠. 참 놀라운 드라마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또 하나 있어요. 그분이 그러한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기도만 해서 된 게 아니었어요. 정말 그분이 중국을 사랑하는 분이였더라고요. 중국 TV에서 자기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대사들을 초청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중국어를 잘하고 중국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어요. 알고 보니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날마다 중보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는 처음 정무 참사관으로 중국에 있었을 때부터 교제하던 사람들 가운데 기도해줘야 될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서 늘 기도했던 거예요.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람들도 출세하고 자기도 출세하고 점점 더 어떻게 돼요? 나중에 정상에서 같이 만나니까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지요.
보통 이런 책들을 보면 은혜를 많이 받는데 신기하게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니까 힘이 빠지더라고요. 왜 그랬느냐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거든요. 서양사람들이 은혜 받은 책을 읽으면 은혜가 되는데 이 책은 나 자신이 비교가 되잖아요. 그래서 하루 종일 힘 빠져가지고 혼났어요.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성경말씀대로 ‘네가 누구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이게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냐! ‘아! 그렇구나’ 나는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통하여 일하신다면 그것이 우리나라의 유익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유익이 되잖아요? 여러분, 슬픈 사람을 위로할 수는 있어도 잘나가는 사람을 축하하고 칭찬하기는 어려운 거예요. 잘되는 사람을 축하하는 사람, 이 사람은 큰 사람이에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의 선교 팀이 사도 바울이 갇힌 것을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또 다른 소식도 들었어요. 사도 바울이 갇혀있는 것을 내심 흐뭇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경쟁하는 다른 선교단체예요. ‘이틈에 우리가 앞서야지’ 그런데 사도 바울이 놀라운 이야기를 해요.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전하든지, 심지어는 경쟁심으로 예수를 전할지라도 예수만 전해진다면 나는 이 감옥에서 그대로 죽어도 아무 상관없노라. 내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여진다면 나는 만족하노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편지가 성경에 기록되게 하신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나는 높아지든지 낮아지든지 죽든지 살든지 오직 예수만 증거되고 높아진다면 하나님 뜻대로 되기를 원하도다.” 사도 바울이 박지성 선수라고 친다면 저는 동네 축구하는 셈이지만, 동네 축구에도 나름의 은혜가 있어요.
제가 예전에 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날마다 축구를 했는데 왜 그랬느냐면, 입시지도를 하다보면 너무 힘들어요. 저도 고등학교 3학년 진학담당을 해봤거든요. 체력이 딸려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함께 축구를 했어요. 일과를 마치고 축구를 하면 피곤할 것 같죠? 안 그래요. 점점 더 튼튼해져요. 단련이 돼요. 그렇게 3년을 하다가 신학대학원을 갔어요. 당장 직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야간 여자상업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겨 오전에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참 힘든 일이었어요. 2년 동안 그렇게 했는데요. 가만히 생각하니 ‘아, 내게 3년 동안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준비시키셨구나!’ 교사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다가 큰 은혜를 받고 뜻을 정하고 신학을 하기로 한 것과, 또 하나는 3년 동안 날마다 축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체력을 다진 것이죠.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주 명확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도대체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늘 기도하세요. 차 안에서도 기도하고 예배 중에도 기도하고 늘 기도하세요. 웃고 먹고 마시고 떠드는 순간에고 생각은 다 기도예요. 찬양도 기도예요.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하세요. 그럴 때 예수 이름의 권세가 문을 여는 거예요. 왜? 예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주셨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죠. 이게 바로 ‘속죄의 은총’이에요. 이것을 알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 이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자유함을 누리고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예요.
'장영수 목사 설교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1226 하나님을 가까이하라(약 4:1-10) / 장영수 목사 (0) | 2011.10.05 |
---|---|
101212 연약함을 자랑하라(고후 12:7-10) / 장영수 목사 (0) | 2011.10.05 |
100404 말씀대로 되리라(누가복음 24:41-49) / 장영수 목사 (0) | 2011.10.02 |
100328 돌이 외치리라(누가복음 19:37-46) / 장영수 목사 (0) | 2011.10.02 |
100321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이사야 43:18-25) / 장영수 목사 (0) | 2011.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