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06 영생의 열쇠 (요 17:1~5)
성경본문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러분 설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설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고나 할까요? 어떤 분이 저에게 선물을 하나 주셨는데 <클래식음악 여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차르트를 비롯해서 우리 귀에 익숙한 음악가들이 살았던 도시들, 그들이 살았던 집과 의미 있는 장소 등을 훑어 보는 DVD를 6장 세트로 선물 받았어요. 이번 명절에 그것에 푹 빠져서 지냈습니다. 그걸 보면서 느낀 것은 제가 비엔나도 가보고 프라하도 가봤습니다만 그저 본다고 보는 게 아니더라고요. 적절한 안내와 해설을 바탕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됐습니다.
그 가운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에 관한 대목이 굉장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오늘날 바흐는 ‘클래식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지만 당대에는 그런 평가를 못 받았어요. 죽은 다음에 붙여진 이름이에요. 바흐는 200년 동안 50여 명의 음악가를 배출한 전통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도 음악가요, 큰아버지도 음악가요, 자기 아들들도 음악가에요. 그런 집안이죠. 바흐는 1685년 생이고 1750년에 죽었는데 그 당시 독일의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독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22세였다고 합니다. 유아사망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낮은 거죠. 바흐만 하더라도 6살 때 자기 형이 죽고 9살 때 엄마가 죽고 10살 때 아버지도 죽어서 고아가 됩니다. 큰 형에게 맡겨져서 자라나지만 나이 열다섯에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야 할만큼 현실에 내몰리게 되죠. 그는 열여덟에 교회 오르간 주자로서 직업을 가지게 됩니다. 스물둘에 결혼하고 서른다섯에 아내를 병으로 잃는 바람에 재혼을 하게 되고요, 두 부인을 통해서 모두 22명의 자녀를 얻습니다. 11명은 어려서 잃어버리고 9명만 자라나는데 그게 그들의 삶의 환경이었어요.
또 바흐는 자기가 태어난 아이제나흐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몇몇 도시를 돌면서 교회음악가로, 오르간주자로, 성가지휘자로 한평생을 보냅니다. 그는 평생 멀리 가지 않았어요. 그가 28년간이나 삶을 쏟아부었던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 음악감독으로 살았던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얼마나 숨가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주일날 두 교회에서 칸타타를 연주해야 했던 거죠. 칸타타는 두 곡의 합창곡에다 세 곡 정도의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의 솔로곡이 얽혀있어요. 그것을 매주 작곡해야 했어요. 매주 월요일, 화요일에는 새로운 곡을 작곡하느라 애를 쓰고, 또 작곡한 악보를 솔로나 합창, 악기에 맞추어 악보를 필사해야 했고, 주말 금요일, 토요일에 부지런히 연습을 해서 주일 노래를 불러야 했다는 거죠. 아주 바쁜 일상을 보낸 거죠. 그는 말하기를 ‘시간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시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일상에 충실한 사람이었어요. 또 자녀들도 많았으므로 먹고 살기 바빴던 거죠. 그러다가 65세를 일기로 죽어 그 도시 묘지에 묻힙니다.
오늘날에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그를 높여 부르지만 정작 당대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아마도 그는 모든 음악 전통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해석해내는 아주 앞서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가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바흐가 죽은 지 한 80년 지나서 멘델스존이라고 하는 음악가가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아주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17살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음악만이 아니라 문학에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 거죠.
그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의 지휘자로 와서 교회를 섬기면서 바흐의 작품들을 우연히 재발견하게 되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백 년 만에 다시 연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바흐라는 이미 죽어 묻힌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눈 뜨게 합니다. 바흐를 재발견한 사람이에요. 바흐라는 인물을 제자리에 올려 놓은 거죠. 이것도 은총이죠. 죽은 지 백 년 후에, 후대사람이 그의 작품을 재발견하고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바흐는 죽어서 한평생 수고했던 땀의 결실을 보았던 것이죠.
마태 수난곡은 바흐가 마흔네 살 때, 그의 음악인생 절정기에 작곡한 것이죠. 마태복음 26장과 27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때, 그 상황을 말씀에 기초해서 작곡한 것입니다. 세 시간 이상 연주하는 대작이죠. 이전의 다양한 음악 전통들을 가져다가 쏟아 부은 것이고,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신앙고백이죠. 한평생의 음악적 재능과 삶을 묶어서 신앙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 곡은 바흐 살아생전에 딱 3번 연주하고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습니다. 100년 만에 멘델스존이 그것을 재발견하고 연주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내로라 하는 합창단, 교향악단은 모두 그 곡을 연주하게 된 거죠.
마태 수난곡은 ‘다섯 번째 복음서’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특별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책이죠. 마태 수난곡은 음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재해석해서 고백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바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음악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있다. 이것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고 악마의 소음일 뿐이다.’
여러분, 자기가 하는 일에 이렇게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음악이든 비즈니스이든 어떤 것이든, 이런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죠.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일터에서 어떤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아침 일찍 부지런히 청소하는 청소부를 보고 ‘수고하십니다’라고 했을 때 ‘나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깨끗이 쓸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선한 발상이에요.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 삶에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죠. 성경은 우리가 그저 먹고 마시는 일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삶의 초점을 맞추라고 말하고 있어요.
오늘부터 <새찬송가>를 씁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통일찬송가>를 30년 썼었어요. 30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까? 이번에 한국인들의 신앙고백을 많이 담았어요. 이제까지 미국이나 유럽사람들이 작사 작곡한 찬송가를 전해 받아서 불렀습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우리 땅에서 싹 트고 자라난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뜻으로 찬송가를 개편하게 됐습니다. 아직 낯설기 때문에 좀 불편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사람은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거예요. 새로운 곡조로 노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고백을 새롭게 하면서 찬송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적을 구해요. 저는 젊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왕 태어나는 거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태어났으면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적도 보고 떡도 얻어 먹고 확실하게 예수를 믿었을텐데.’ 하나님이 그런 저를 위해서 요한복음만 하더라도 많은 이적이 있어요. 요한복음에 7가지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어요.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를 고친 이야기, 오병이어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사건, 실로암의 소경을 고친 이야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 7가지 이적을 소개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눈 앞에 일어나는 이적을 보면서도 그것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이적이 있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했느냐 하면, ‘이렇게 떡과 먹을 것을 주시는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목마르게 찾던 구세주가 아니냐. 이 사람을 우리의 왕으로 세우자.’ 그래서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다녔죠.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서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여러분이 나를 찾는 것은 진리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 나를 쫓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떡만 찾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을 먹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생명의 떡을 주시는데 내가 바로 그 생명의 떡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이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대로 판단했어요. 빗나가버렸어요. 예수님께서 다시 해석해주셔요. 그것을 무려 7번이나 반복하시는 거예요. 그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얼마나 이적이 많습니까.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이적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적의 의미를 발견해야 돼요. 그럴 때 이적은 나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만드는 표적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이적 중의 이적이 뭔지 아십니까? <고통은 선물이다>라는 책에 보면 우리의 뇌조직 1g에 4천억 개의 신경세포들의 접합점이 있다고 해요. 1초에 우리 뇌 안에서 5조 회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대요. 도대체 과학자들은 이런 것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어요. 이걸 정말 믿어야 될는지 모르겠어요. 1초에 5조 회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서 사물을 인식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나도 안 놀라시네요. 믿음도 좋으시네요. 과학자들이 말했다니까 그냥 다 믿습니까? 살아 숨쉬는 게 이적이에요. 여러분이 의문을 품는 것도 이적이에요. 1초에 5조 회의 화학적 반응 속에서 의문을 품고 있는 거예요. 더 이상의 이적을 얘기하지 마세요. 사람이 살아 숨쉬는 것도 이적이고 때를 따라서 죽는 것도 이적이에요. 모든 것이 다 이적이에요. 그러므로 1초에 5조 회의 화학적 반응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그 두뇌를 가지고 이 말씀을 이해하세요.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 17장이에요. 요한복음 17장은 일곱 번의 이적과 그 이적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다 끝난 다음에 십자가 사건으로 건너가는 교차점에 있는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18장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어떤 기도를 하느냐? ‘아버지여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심으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이게 무슨 얘기냐? ‘아버지 이제 내가 십자가를 질 때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온전히 이루게 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모든 인생들에게 부어지게 하옵소서’ 그런 말이에요.
성경이 말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이적 중에 이적이라고.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사람이 없었어요. 또 십자가를 통하여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했어요.
제가 아주 어릴 때 본 영화가 기억나요. 여러분도 보셨을 거예요. <스팔타커스>라는 영화 있잖아요. 그게 약 BC 160년 경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에요. 스팔타커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노예반란이 일어났어요. 그때 로마가 망하는 줄 알았다고요.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 두고 두고 영화로 재현되고 있죠.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 보면 스팔타커스를 비롯해서 반란노예 중 살아남은 자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요. 그래서 로마로 들어가는 아피아 가도 양 옆에 십자가 6천 개를 세워요. 6천 명을 십자가에 처형했어요. 십자가라는 건 로마에 대항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가장 극악한 형벌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런 스팔타커스 반란과 같은 정치적 사건의 십자가와 나사렛 예수가 지고 갔던 십자가는 다른 거예요. 눈에 보이는 모습은 비슷해요.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달라요. 예수의 죽음은 성경이 예언한 말씀의 성취에요. 구약성경의 성취이죠. 성경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유대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양이나 염소를 데리고 제사장 앞에 가서 양과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으므로 주인의 죄가 양이나 염소에게 옮겨지고 죄가 옮겨진 양과 염소를 대제사장이 목을 따고 찢어서 그 피는 제단에 뿌리고 몸뚱아리는 각을 떠서 불살라 태우므로 죄의 형벌이 무섭다는 것과, 아무 죄가 없는 양과 염소가 주인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주인은 죄를 용서받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사건은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희생제물로서 자기 몸을 드리신 것이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의미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말하기를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리라’ 했던 거예요.
요즘 <세시봉> 열풍이 일었다고 해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40년 전에 가수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인기가 대단했잖아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어요. 요즘 그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노래를 했는데 난리가 났다는 거죠. 나이 60이 된 여자분이 40년 전의 감격을 잊지 못해서 옛날 얘기를 주저리 주저리 하면서 윤형주씨를 짝사랑했고 등등등 뭐 다 좋습니다. 유행가 노랫가락 한 마디도 귀 기울여 들으면 그렇게 마음을 울리고 40년 절절한 추억으로 남아가지고 감동이 된다면, 그 눈으로 십자가를 한 번 깊이 들여다 보세요.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요.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요.
당대 최고의 학자요, 도덕주의자였으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스스로도 흠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는 ‘난 모든 것을 쓰레기같이 여기고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에요.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17장 3절에 말합니다. 영생은 무엇이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여기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해요. 예전에 저는 어떻게 외웠냐 하면 ‘야하게 알다’ 이렇게 기억했어요. 성경에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할 때 동침한다는 말을 야다라고 썼어요. 동침할 정도로 깊이 아는 것을 ‘야다’라고 해요. 부부사이에 아는 관계를 야다라고 해요.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수 윤형주를 좋아하듯이 알았으면 옛날에 벌써 우리 삶은 완전히 변했어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야다’ 주목하고 알았다면 우리 삶은 진작에 변했어요.
설을 맞아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신비와 사랑의 은총을 발견하세요. 오늘 성경은 말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거기에 자유함이 있고 거기에 삶의 기쁨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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