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213 주의 이름을 아는 자(시 9:1-10)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3:45

110213 주의 이름을 아는 자( 9:1~10)

성경본문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자카르타 외곽에 따만 미니’(Taman Mini)라는 민속촌이 있죠. 거기에 가보면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습니다. 손님들이 인도네시아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 흔히 따만 미니로 모시고 가죠. 저도 가끔 손님들을 안내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맥스 영화를 꼭 보도록 합니다. 거의 매일 12시에 정확하게 ‘Indonesia Indah’(아름다운 인도네시아) 홍보영화를 상영합니다. 저는 수도 없이 봤는데 볼 때마다 좋더라고요. 인도네시아가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풍습과 관습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그런데 보통 10시쯤 가서 몇 군데 둘러보다가 아이맥스 영화를 들어가면 더운 곳에서 시원한 자리에 들어가시니까 30분 영화를 제대로 다 보시는 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다 주무시더라고요. 이해는 됩니다마는 마음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은 것을, 멀리 한국에서 와서 딱 한 번 보는 영화인데…’ 아쉬움이 있어요. 영화 한 편을 놓고도 이런 아쉬움이 있다면 하나님을 보는 눈이 활짝 열려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시편 9편에 다윗이 노래하듯이 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겠노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겠노라. 왜냐하면 내 안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찬송하노라.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노라. ,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므로.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께 간구하겠노라.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역시 그 핵심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 하겠습니다. 간혹 부부간에 대화를 할 때 그 사람 있지? 지난 번에 만났던 사람” “누구요?” “거 왜 옷을 이쁘게 잘 입었잖아옷을 이쁘게 잘 입은 사람이 하나둘이겠어요? “머리를 이렇게 올리고…” 그렇게 하면서 무슨 스무고개를 하듯이 사람을 맞춰나갑니다. 이름 석자만 정확하게 대면 바로 , 그 분!”하고 확연하게 이미지가 다가오는데 이름을 몰라서 키가 작고 뚱뚱하고이렇게 설명을 해댑니다만 부질없는 짓이에요. 이름 한 마디를 이야기할 때 그의 모든 것이 확 살아나는 것이죠. 이름은 존재를 표현하는 핵심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부모님에게 감사 드려요. 제 이름이 너무 맘에 들기 때문에. 더구나 그 이름을 뒤집어 놓으면 기억을 못하시는 분이 없어요. 제가 20년 전에 대구의 어떤 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여자중학교의 채플예배 설교를 부탁 받아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집중도 안 하는 여학생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면 좋을까 하다가 첫머리에 이름을 소개하면서 나는 수영장입니다했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우연히 시내버스 안에서 차에 올라탄 여학생들 중에 한 사람이 , 수영장목사님이다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름을 소개할 때 뒤집어서 얘기해요. 그랬더니 잊어버리는 사람이 없어요. 

원래 옛어른들은 이름을 굉장히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어요. 어릴 때 부른 이름이 있고, 그러다가 장가가면 이름을 바꿔요. ‘이순신은 장가 간 이후에는 자()라고 해서 여해(汝諧)라 불렀지요. 또 호()가 있잖아요. 호는 별명이에요. 자기들끼리 즐겨 부르는 멋스러운 이름이 호이고, 죽은 다음에 시호(諡號)가 있어요. 그 사람 평생의 삶을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는 이름을 붙여주죠. 특별히 왕들 경우에 태조라든지, 태종, 세종, 이런 건 다 죽은 다음에 붙여준 이름들이죠. 우리가 서로 이름을 부를 때 그 모든 모습이 내 눈앞에 확 살아나듯이, 특별히 성경에서는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를 이름 한마디로 다 설명해요.

아브라함, ‘모든 민족의 아버지’, 그의 삶은 바로 그 이름 한마디를 이루어가는 삶이었어요. 야곱, ‘속이는 자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하나님이 그 이름을 고쳐주시죠.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 그 뜻은 말이죠, 싸워서 이겼다는 문자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너를 향해 준비하신 모든 계획과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라는 거죠. 자기가 몸부림 쳐서 형의 것을 빼앗고 삼촌 것도 속여서 빼앗는 인생이 바뀌어서 남의 것을 빼앗아 가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눈을 열고 보라고 하는 것이죠. 성경인물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한 거예요.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런 점에서 가톨릭에는 세례명이 있잖아요. 세례 받을 때 이름을 정해주잖아요. 그것도 참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중보기도집회를 하다 보니까 인도네시아 교회의 대표되신 분들하고 자주 만나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분들이 저한테 명함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사실 준비하지 않았는데 할 수 없이 해야겠다 싶어 준비하다 보니, 명함에 제 이름을 한자로도 쓰고 뭔가 성경에 있는 이름을 택해서 알려주는 게 효과적이겠다, 어떤 이름을 쓸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영문 이름을 하나 정해야 될 텐데, 뭐가 좋을까요?’ 여러분, 제가 뭐라고 정했을 것 같습니까? 한번 알아 맞춰 보십시오. 제가 그토록 자주 새로운 시대 40년을 얘기했다면 뭐라고 정했을 것 같습니까? ‘여호수아라고 정했어요. ‘죠슈아라고 했어요. 저를 이제부터 죠슈아 장이라고 불러주세요. 새로운 40, 새로운 협력과 화해의 40, 이미 하나님이 우리 앞에 열어놓으신 40, 약속으로 주신 이 40년을 내 남은 목회의 이정표로 삼아야 되겠다.’ 그런 의미로 죠슈아로 했어요. 여호수아란 말이죠. 여러분, 여호수아란 뜻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그런 말이에요. 사실은 헬라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예수스에요. 여호수아를 헬라식 표현으로 하면 예수가 되요.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거예요.

여호수아 1 8, 9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모세가 죽은 이후에 종이었던 여호수아가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나아갈 것을 생각하니까 막 짓눌리는 거예요.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켜주지 않느냐? 너와 함께 하리라. 너는 오직 내가 너에게 전해주는 말씀을 붙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 말씀만 붙들고 나아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네가 형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이름을 바꿨어요.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도 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귀한 이름이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삶을 표현하는 성경적인 믿음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번 주에 숙제를 하나 드릴께요. 여러분 한번 가서 곰곰이 내 이름을 무엇이라고 정할까, 하나씩 지어보세요.

이렇게 이름을 새롭게 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그때마다 하나님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셨어요. 출애굽기 3 14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묻지 않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네가 만난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을 터인데 그때 제가 뭐라고 말하면 좋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셔요? 출애굽기 3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나는 나다.’ 하나님을 어디다 비교하겠어요? 아니요. 우리는 어떤 예쁜 분을 보면 꽃과 같이 예쁘다이렇게 얘기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아니하시고 나는 나다.’ 영어로 말하면 ‘I am that I am.’ 그런데 이 말은 사실 히브리어에서 그대로 따온 거예요.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나는 나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은 보어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는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 그게 아브라함이 발견한 하나님이에요. 한평생 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바라본 눈이에요. 그분은 나의 곤고한 삶 속에 갈 길을 예비하셨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이렇게 만났어요.

모세는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는 나의 승리라는 말이에요. 다윗은 뭐겠어요.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그랬잖아요. 이것을 히브리어로 얘기하면 여호와 로이가 됩니다. 나의  목자.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건강해야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건강해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말씀에 기초한 그대로 건강해야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어요. 그럴 때 그 안에서 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요.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일곱 번이나 나는 무엇이다이렇게 얘기했어요. ‘에고 에이미이건 헬라어인데, 아까 말한 히브리어하고 구조가 똑같아요.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이 말한 그대로 요한복음 118절에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요한복음 10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말은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그런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드러내실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셨던 그 방식 그대로 나는 나다.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면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면서 그때마다 자기의 모습을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내셨어요.

제가 오래 전에 중국 상해에 갔다가 상해서커스를 봤는데, 중국사람들 서커스 무섭습니다. 철로 만든 큰 공 속에 오토바이가 들어가서 안에서 막 돌아요. 그러더니 한 대가 또 들어가요. 안 부딪히고 돌아요. 보는 사람은 땀이 나는데, 세 대가 들어가고 네 대가 들어가요. 네 대가 그 안에서 막 도는 거예요. 그 철 공 안에서 오토바이 네 대가 막 도는 거예요. 그러더니 마지막에 네 대가 차례차례 나오는데 박수가 절로 나오는 거예요. 대단했어요. 원래 중국 사람들이 과장이 심하잖아요. 중국영화 한 번 보십시오. 한 사람이 오백 명도 바람 날리듯 다 날려버리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보고 시원하면서도 참 저 사람들은 뻥도 세다 했어요.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중국 서커스단의 남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팔이 없고 한 사람은 다리가 없어요.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이 발레를 하는데 기가 막혀요.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까지 완벽한 기계로 만들어서 훈련을 시킬까? 감동을 넘어서서 무섭더라고요. 전율이 흐르더라고요. 

하나님은 그것을 더 넘어선 거예요. 그래서 우리 믿음에 갈등이 있는 거예요.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얘기를 하셨어요. 지금 예수님이 선포한 얘기를 들어보세요.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심지어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은 예수님 앞에서 다 쓰레기 같았다고 하는 거예요.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비교해보니 쓰레기 같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지식과 학식과 모든 경험은 복음을 위해서 아주 소중하게 쓰이는 것이 됐죠. 그리스도라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골로새서 1 15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아니한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신 분이다. 골로새서 2 3절에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취어 있다.’ 빌립보서 4 13절에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필요한 건 모두 다 구하는 대로 얻는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죠. 그건 틀린 해석이죠. 그 말이 아니고 로마감옥에 들어가 있는 절대 고독과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그것을 넉넉히 이기고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있다, 그런 말이에요.  

우리가 자본주의 시대에 살다 보니까 너무 자본주의에 물들어 버렸어요. 잘 먹고 잘 살아야 그게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하나님의 복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지금 내 상황,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이 상황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있고 은혜가 있을 때 그게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거예요.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순풍이거나 원치 않게도 여러 가지 환란과 풍랑 속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죠.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건강하고 부하게 산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죽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모든 것 다 내려놓고 가야 되지 않습니까? 절대 허무잖아요. 그런데 그 죽음 끝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부활과 생명의 약속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님을 의지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그래요.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맛보다가 말년에 예수 믿어야지 그런 분이 있어요.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평소에 찬양도 열심히 하고 늘 우리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야 돼요. 그야말로 무의식 중에라도 할렐루야가 나와야 돼요. 애 낳으면서 여자분들이 힘들면 남편을 욕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의식 중에 나오는 거잖아요.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주님의 환한 빛을 누릴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 호흡할 때마다 주님을 노래하고 찬양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질서가 있어요. 영적인 공식이 있어요.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셔요. ‘네가 믿으면 알게 되리라.’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주님, 뭔가를 좀 느끼게 해주시고 체험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거예요. 제가 눈 수정체 수술을 했습니다만 수술이랄 것도 없더라고요. 7분 만에 끝났으니. 그래도 침대 위에 눕고 눈에 칼이 닿는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불안하기도 하잖아요. 그 의사가 최고 권위자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손끝이 믿을만합니까? 아차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의사 집사님이 마지막 순간에 칼을 들기 전에 기도합시다.” 기도하는데 얼마나 간절한 기도가 되는지 몰라요. 그분이 기도하는데 제가 아멘하더라고요. 한 순간이라도 잘못되면 안되잖아요. 그 기도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분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구나.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이 이분을 붙여주셔서 이제 나를 치유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요. ‘믿으면 알게 되리라.’ 하나님의 영적인 공식을 여러분 임의로 바꾸지 마세요. ‘뭘 보여주시면 내가 믿겠습니다.’ 아니요, 그 순서를 바꾸면 안돼요. 그래서 선택해야 돼요. ‘말씀을 믿기로 선택하라들은 말씀을 순종하기로 선택하라. 그러면 주님을 알게 되리라. 알게 되리라.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했어요. 저는 그 단어를 야하게 알다이렇게 외웠어요. 왜냐하면 동침하다라는 말하고 알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똑같이 쓰거든요. 동침할 정도로 아는 거예요. 인격적으로 아는 거예요. 우리가 어설프게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내 몸과 마음에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 ‘선택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다 예수님을 따라온 게 아니에요. 요한복음 6장 마지막에 보면,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 떡을 먹고 예수님을 구름떼 같이 찾아 왔던 사람들이 정작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아니 하리라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말씀이 어렵다며 다 떠나갔어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묻죠. ‘너희도 가려느냐?’ 그랬더니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자인 것을 믿고 알았삽나이다.’ 여러분, 말씀을 믿을 때 알게 되고 주의 이름을 알게 될 때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