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313 열매 맺는 인생(요 15:1-8)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4:05

110313 열매 맺는 인생 (15:1~8)

성경본문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며칠 전 일본에 강진과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이고 그만큼 준비가 잘 된 나라였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해일 경보가 울린 지 10분만에 해안가에 해일이 밀어닥친 것이죠. 시속 600km라고 했습니다. 그걸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순식간에 엄청난 규모로 번졌습니다. 천 년 동안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이었다고 해요. 항상 다음 지진이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 예측하던 일본은 도쿄 동남쪽에 있는 바다를 늘 주시했는데 엉뚱하게 동북쪽에서 터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과학이 많이 발달했지만 자연은 예측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의 고통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 이미 사망실종자가 천 명이 넘어서고 행방불명된 자가 해안가 도시에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재난을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심판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죠. 단순한 재난이 아니고 심판이죠. 첫째는 아주 홀연히 닥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누가복음 17 26절에서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그때는 노아홍수가 날 때와 같을 것이고 소돔고모라가 멸망할 때와 같을 것이다.’ 노아홍수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소돔고모라 때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농작물을 심고 집을 짓더니 한 순간에 홀연히 종말이 닥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 재난을 심판이라고 생각할 때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홀연히 한 순간 재앙에 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실종됐는데 그들이 과연 그만큼 죄인인가? 과연 그들이 그렇게 타락했는가? 물론 들춰내 보면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일본뿐 아니라 어디나 다 가득한 것이죠. 그러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적타락이에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 땅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기 뜻대로 자기 열심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창세기 6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자기 멋대로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므로 저들은 이제 육신이 되었구나.’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몸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자기 본능을 좇아서 살아가는 모습을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달라요.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기에 비슷비슷하게 죄 가운데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서로 구별하지 못해요. 별로 차이점을 느끼지 못해요. 얼마나 무뎌졌는지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아요. 죄라고 느끼지 않아요.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이 볼 때에는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어그러진 채로 살아가는 존재에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죠. 노아홍수가 있기 전에 오랫동안 홍수를 예고했어요. 또 소돔고모라 멸망 때에도 아브라함에게 그 뜻을 미리 알리셨어요.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았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듣지 못하는 둔한 마음이 되었던 거죠.

여러분, 저도 뉴스를 반복해서 계속 보았습니다. 달리던 차가 순식간에 덮치는 물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다가 물에 휩쓸려 버리는 모습들. 만약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마지막으로 무슨 고백을 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집단적인 재난만 재난이라고 얘기할 게 아니에요. 그것만 심판이라고 얘기할 게 아니에요. ‘침묵의 살인자라고 할까요? 개인적인 종말이 있어요. 이번에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이 아침 새날을 보지 못하고 지난 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거죠. 날마다 어찌 보면 재난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죠. 준비되지 않은 채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는 재난이고 심판이죠. 내 개인적인 종말을 놓쳐서는 안 돼요. 준비해야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감당 못해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여인들이 눈물을 뿌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누가복음 2337절에서 38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곧 심판의 날이 이를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셨어요.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여러분의 종말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베풀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왜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풀어주시는 가운데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얘기한 것입니다. 원래 유월절 만찬을 나눌 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네 번 포도주 잔을 든다고 합니다. 네 번 마시게 되어 있어요. 유월절이란 애굽에 종살이 하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으로 구원해 내신 것을 기억하는 사건 아닙니까. 출애굽기 6 6절에서 8절 말씀을 읽으면서 중요한 동사가 나올 때마다 잔을 들어서 함께 마시면서 기억하는 것이죠.

첫 번째는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 빼어내리라그러면서 한 잔 마시는 거죠. ‘그들이 너희에게 떠안겼던 무거운 짐으로부터 건져내리라또 한 잔 마시고. ‘내가 너희를 자유인이 되게 하리라. 속량하리라또 한 잔 마시겠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리라그리고 또 한 잔 마시죠. 그들이 어떻게 마셨을까 하는 것이 충분히 상상이 돼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고 하는 러시아 유대인공동체 영화를 보면 억눌림과 곤고한 삶 속에서도 얼마나 낙천적인 사람들인지 몰라요. 틀림없이 그들이 유월절 만찬을 지킬 때에 아마 랍비가 이 말씀을 한 구절 외우면 모두 다 건배하듯이 쨍하고 부딪히면서 할렐루야하면서 한 잔 마시고 하면서 넉 잔을 마셨을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취하지 않았대요. 취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면 하나님의 고귀한 뜻이 깨어질까봐 그렇게 마시는 넉 잔에는 한 잔 술에 물을 세 배 부어서 희석시켜가지고 취하지 않도록 한 잔의 효과만 냈다고 하는 것이죠.

유월절 만찬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사건이에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베푸시면서 구약에 드러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사건을 설명해주셔요. 애굽에 종살이 하던 사람들을 건져내는 정치적 해방,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해방,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찾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회복시켜 주셨지만 예수님께서 한 가지 더 말씀하셔요.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지음 받은 존재로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현실 속에 실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셔요. 십자가 사건은 첫째, 죄로부터의 해방이에요. 두 번째, 모든 죄인에게는 죄의 결과로 저주가 있어요. 저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그리고 죄와 저주로 고통 당하는 자에게 진노가 있어요. 심판이 있어요. 심판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또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어 오히려 우리로 더 죽을 죄인이 되게 하고 더 진노 가운데 놓이게 해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히브리서에 보면 모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했어요. 해방이요, 마지막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생을 사로잡고 있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이에요. 이게 바로 영적 현실이에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정치, 경제, 사회적 해방,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실재하는 영적인 해방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 이런 것을 대개 잘 모르죠. 교회 밖에서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듣겠어요. 모르는 거예요. 배우지 못했어요. 알지 못했어요. 깨닫지 못했어요.

데이빗 시멘스라고 하는 기독교 상담가는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 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나름대로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아들을 주시면서까지 십자가에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무한한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 하면 세상은 철저하게 자기가 땀 흘리고 수고한 노력의 대가만큼 먹는 세상이므로, 이 세상의 논리에 매여가지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깨닫지 못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제가 그랬어요. 예전에 그걸 몰랐어요.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되는 줄로만 알았어요.

여러분 어떻게 해야 천국을 갈까요?” 선생님이 물었더니 꼬맹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죄를 지어야 됩니다그러더래요. 깜짝 놀라서 선생님이 왜 그러냐 물었더니 죄를 지어야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어요.” 아주 단수가 높은 애죠. 어떻게 해야 천국을 갑니까? “착하게 살아야 됩니다.” 틀렸어요. 그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천국을 갑니까?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믿고 의지함으로 생명을 얻고 천국에 가는 거예요. ‘주 예수여 나를 구원해주소서이게 우리가 해야 할 말이에요.

두 번째는 그런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나눌 줄 모른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재는 거예요. 이 잣대도 얼마나 자의적인지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해요. 예배시간에 늦었다면 늦을만한 불가피한 이유가 다 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은 용납할 수 없어요. 그게 우리의 이중적인 잣대에요. 그러나 성경이 말해요. 십자가의 무한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용서를.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청나라 말기에 마지막 왕은 부이였는데 3살 때 왕이 됐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데려다가 왕을 세웠어요. 세월이 흘러서 이제 청년이 됐어요. 그런데 그 동생이 왕궁에 들어가서 왕이 된 형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말로만 듣다가 드디어 자기 친형인 왕을 만나게 됐어요. 자금성 그 넓은 궁에서 왕을 만나게 됐어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왕이 잘못하면 어떻게 되죠?” “보여줄까?” 그러더니 옆에 많은 시종들이 있는데 아주 귀한 꽃병을 하나 내리쳐서 깨뜨립니다. 옆에 서있던 시종장이 깜짝 놀래더니 옆에 늘어서서 머리 숙이고 있는 종 하나에게 눈길을 주니까 종이 나와요. 그 종을 때립니다. 왕이 잘못하면 종이 맞아요. 이게 왕의 논리에요. 그러나 복음은 반대에요. 종이 잘못했는데 왕이 벌을 받는 거예요.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생각의 프레임을 바꿔야 돼요.

어느 날, 회당으로 가고 있던 두 유대인이 서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보게, 내가 갑자기 궁금한데 기도하다가 담배를 펴도 되는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랍비에게 물어보지.” 친구가 랍비에게 물어봤어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담배를 펴도 됩니까?” 랍비가 정색을 하면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어떻게 담배를 필 수 있습니까?” 무안해져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친구에게 얘기를 하니까 친구가 가만히 듣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잘못 물어본 것 같네. 내가 다시 가서 물어보지.” 그러고는 묻습니다. “랍비님, 담배를 필 때는 기도하면 안되겠지요?” 그랬더니 랍비가 말하기를 아니요, 기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물어보셔야 돼요. 똑같은 말이라도 생각의 프레임을 바꿔야 돼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내가 열심히 교회의 규율을 지키는 것, 겉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십자가에 나타난 그 어마어마한 사랑, 그 무한한 사랑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거기에 비밀이 있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건 다른 거 아니에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했을까요? 그건 분리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뭐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번 사순절에 여러분을 위해서 더도 말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를 하루에 두 장, 석 장만 읽으면 다 읽을 수 있도록 표를 만들어 드렸어요. 이것은 바쁘다고 하시는 남자분들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오고 가는 출퇴근 시간에 갈 때 한 장, 올 때 한 장만 읽으시라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사순절 사십 일을 보내보시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마음에 새로운 은혜를 주셔요.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 이거로구나!’하는 은혜를 깨달을 때 인생이 변해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원래 어려서부터 유약하고 자신감이 없어가지고 사진을 찍어도 웃는 얼굴이 없었어요. 그런데 군에 갔어요. 군생활에 무슨 낙이 있겠어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말씀을 읽고 설교집을 읽다가 어느 날 제 마음을 탁 치는 말씀을 발견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가 영원히 해결되었구나.’ 거 이상하죠. 늘 듣던 말씀이 그날은 내 마음을 찌르고 들어왔어요. 그 순간부터 변한 게 있어요. 그때가 일병 갓 달았을 때니까 가장 곤고하고 어려운 시절이지만 잊어버릴 수 없는 사진 한 장이 있어요. 본부 막사 앞에서 고참들이 안 볼 때 얼른 찍으라고 하고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어요. 그때부터 제 얼굴 속에 웃음이 있었어요. 제 마음 속에 기쁨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도 살면서 어려운 일이 많이 있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망과 기쁨은 부인할 수 없었어요. 그게 만들어낸 웃음이 아니에요. 말씀을 듣다가 깨달아지는 순간에 그 웃음은 영원히 나를 떠나가지 않았어요. 말씀의 능력이에요.

골로새서 2 3절에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애들이 소풍가면 보물찾기를 너무 좋아하잖아요. 성경은 보물섬이에요. 그리스도는 보물이에요.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보세요. 하나님, 하나님의 빛을 나에게 드러내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해요.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여러분을 고치셔요. 헬라어로 기쁨을 카라라고 해요. 은혜를 카리스라고 해요. 어원이 같은 말이에요.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을 때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친다고 하는 말이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말씀을 통해 놀랍게도 사명을 발견해요. 왜 살아야 하는가 이유를 발견해요.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매여가지고 왜 살아야 되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건 지워진 시간이에요. 잊혀진 세월이에요. 잃어버린 시간들이에요. 

여러분, ‘꽃밭에서라는 노래 좋아하시죠? 정훈희 노래로 좋아합니까, 조관우 노래로 좋아합니까? 계층별로 다르겠지만 그 가사를 보면 참 아름다운 싯귀에요.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놀랍게도 이 아름다운 싯구가 조선 세종대왕 때 유생이던 최한경이 쓴 한시에요. <좌중화원,坐中花園>, 그야말로 꽃밭에 앉아서라는 시를 현대어로 번역해서 곡을 붙인 거죠. 최한경이라는 선비가 어떤 여인을 연모하는 거죠. 시대는 흘러도 사랑의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요. 사랑이 있으므로 그는 행복해요.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도 이렇게 시대를 넘어서 전달이 된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깊이를 새로운 눈으로 발견할 때 영원한 삶의 소망을 발견해요. 왜 사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칠십, 팔십, 백을 살건 때로는 원치 않게도 건강치 못해서 병들어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하고 그 사랑의 눈길로 사람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지요.

여기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CBMC가 있어요. 흔히 기독실업인회라고 하죠. CBMC가 뭡니까? ‘Christian Business Men’s Committee’ 기독실업인회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이 말을 새롭게 바꿨어요. ‘Connecting(연결한다), Business & Market Place(사업과 사업장을), to Christ(그리스도에게로)’ 그저 돈 버는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사업장을 주님이 일하시는 일터로, 주님과 함께 일하는 곳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는 곳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곳으로, 내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는 하나의 일터로 바꾸겠다고 하는 거예요. CBMC회원이던 아니던 간에 바로 이런 정신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죠. 아주 멋있는 표어가 있어요. ‘하늘에 뿌리 내린 기업’. 포스터를 보니까 나무를 거꾸로 하늘에다 심어놨어요. 하늘에 뿌리 내린 기업, 하늘에 뿌리 내린 인생, 그게 우리 삶의 모습이에요.

이제 사순절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가고 있어요. 이 사순절에는 마음을 모아서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것을 넘어선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고 부활의 고백을 가지고 부활절 연합예배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그게 사순절 기간을 맞는 우리의 시간표에요.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