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27 하늘에 올라앉은 인생(엡 2:1-10)
성경본문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에 다보탑, 석가탑이 세워지는 바로 그 때 이 곳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사일렌드라 불교왕국 시대에 세워진 유명한 건축물이 바로 보로부두르 사원입니다. 족자의 보로부두르 사원을 다녀오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올라가서 살펴보면 '참, 어떻게 이런걸 이렇게 만들었을까?'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족자 보로부두르에 가서 보신 분들에게 하나 권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 가까이 따만 미니에 가서 <인도네시아 인다(Indonesia indah)>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홍보영화를 보면 항공사진으로 사원을 위에서 찍었어요. 그 전체적인 기하하적 구도가 한눈에 들어와요. 바로 이런 오묘한 원리를 가지고 만들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이제까지 못 보던 것을 보게 되는 거예요. 입체적 관점을 가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빈 해리스라고 하는 인류학자가 쓴 책인데 거기에 보면 인도의 힌두교인들은 소를 신성시 하지요. 소를 먹는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유대교나 이슬람교도들은 돼지를 금기시해요. 절대 먹지 않아요. 그래서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섞여 살았던 해방 전 인도에서는 서로의 종교를 모독하느라고 소나 돼지를 잡아먹고 이것이 상대방을 격분시켜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보면 다 이유가 있어요. 인도의 농경사회 속에서는 소를 냉큼 잡아다가 목을 쳐서 고기로 먹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거예요. 소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천천히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소는 영원히 살겠습니까? 언젠가는 쓰러지죠. 그런 소를 도살하는 카스트 집단이 있는 거예요. 도살하고 그들의 시장을 통해 그 고기를 내다파는 거지요. 하나의 사이클 속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치를 얻어내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중요한 거예요. 중동의 기후조건 속에서 돼지를 치는 건 너무나 투자비용이 높은 거예요. 돼지고기는 맛있습니다마는 보관문제도 있고 또 사육을 할 때 얻는 거에 비해서 너무나 들어가는 게 많아요. 결국 나중에는 종교적 금기가 되고 율법화 된 거에요. 그 밑바닥에 숨어있는 경제적 이유와 구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또한 어떻게 봐야 되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다' 이 말을 쉽게 풀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지요. 첫 사람인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오셔서 묻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담이 뭐라고 대답했어요? "하나님 당신이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이게 인간의 죄인 된 모습이에요. 또 아담과 하와의 자식으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가인에게 찾아와서 묻지요?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네 형제가 어디에 있느냐? 네 이웃이 어디에 있느냐? 네 남편이 어디에 있느냐? 네 아내가 어디에 있느냐?" 물었을 때 동생을 죽이고 그 칼에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가인은 분노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습니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이 그 상황 속에서 나에게 물을 때 "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 않아요. 이게 인간의 실존이에요.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부부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나뉘어져 있고 깨어져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사회 속에서 확대되어 서로를 편 가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라는 미명아래 상대방을 죽이는데 주저하지 않는 거죠. 이러한 인간의 타락은 결국 만물의 타락을 가져와요.
지난 여름 한국은 너무 뜨거웠습니다. 지난 겨울은 또 너무나 추웠습니다. 눈 폭탄을 백년 만에 경험했어요. 눈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요. 구제역도 있었지요. 예전에 광우병도 있었고 AI 조류독감도 있었는데 그저 단순한 재난이 아니지요. 성경 로마서 8장 21절을 보면 모든 만물들이 그 눌림과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했어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만물이 함께 겪고 있는 거지요. 인간의 죄와 끝없는 탐욕이 오늘날 이런 기후 변화와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다' 세상 풍조를 쫓아 사는데 돈을 쫓아 우상을 섬기며 사는 그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욕심을 쫓아 행하고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지요. 제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빗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거지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되고 모든 문제해결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한들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거지요.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가 꼭 필요한 거지요.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제사장이 필요한 것이고, 우상과 돈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역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왕이 필요한 것이고, 길을 알지 못해서 욕심을 좇아 이리저리 헤매는 우리들에게 분명한 인생의 길을 밝혀주는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사장이요, 왕이요, 선지자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바로 메시아이시다' 이렇게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 것과 합작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그 구원은 유감스럽게도 불완전한 구원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얼마 전에 로켓을 쏘아 올렸는데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의 기술 지원을 받았는데 실패하고 엉뚱한데 떨어지는 바람에 책임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그 실패라는 것이 말이죠. 과학자들이 그렇게 연구하면서도 쏘아 올리기 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미묘한 부분에서 어그러지는데 우주에서는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우리의 노력이 섞인 구원이라면 불완전한 구원이 되요. 우리는 늘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 만큼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구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말이에요.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지혜로 십자가를 세우시고 우리 앞에 펼쳐 주신 거예요.
여러분, 생명은 선물이에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기가 태어났어요. 너무 신기해요.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그 부모를 통해서 온전히 만들어진 거예요. 구원은 생명이에요. 구원은 노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거기다 섞으면 그게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선물은 선물로 받아야 선물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이걸 왜 받아야 되느냐? 이게 바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선물로 받을 때 진정한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선물로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세상 윤리 가운데 예의라는 게 있지요. 특별히 일본사람들은 얼마나 엄격합니까? 남에게 선물을 받는다든지 할 때 그걸 빚으로 생각해서 반드시 갚아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에 비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융통성이 있고 편합니까? 빌려준 건 잘 기억해도 받은 건 잘 잊어버려요. 얼마나 편리한 구조인지 몰라요. 그러나 저는 그런 게 좋더라고요. 저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게 참 좋아요. 친구 사이에도 수없이 인사를 반복하며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겠어요. 왜 일본여자들이 한국의 젊은 가수들에게 푹 빠지는지 아세요? 남편과도 거리를 유지하며 살았던 심리구조로부터 자유하기를 갈망하는 거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이죠. 조금 표현을 과하게 하면 뻔뻔스러워야 돼요. 하나님께 마음껏 복을 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다 받아야 돼요.
저도 두 딸이 있습니다만 아주 대조적 이예요. 한 아이는 시시때때로 달라고 요청해요. 딸이니까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그런데 또 한 아이는 이상하게 요구하지를 않아요. 그러면 안타까워서 필요한 거 없냐고 제가 직접 부릅니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돈을 줍니다. 그게 아빠의 마음이잖아요. 하나님이 그러하셔요. 여러분, 믿음을 가지세요. 생명도 믿음으로 시작 했다면 죽는 그날까지 온전히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는데도 내 능력으로 얼마나 잘 운영하겠어요? IMF때 수많은 재벌기업들이 무너진 걸 보셨잖아요.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세계에서 지금 있는 기업들 가운데 백년을 유지하리라고 기대되는 기업이 몇 개 없어요.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야곱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욕심을 내고 구하는 자를 들어 쓰셔요. 이 믿음의 오묘한 이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위에 앉으셨다' 여러분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생명을 얻어요. 또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죽더라도 부활해서 영생을 얻게 되요. 더 놀라운 건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 예수님이 앉아 계신 자리에 우리도 함께 앉아요. 정작 이 에베소서를 쓴 사도바울은 이 시간 로마감옥에 갇혀 있어요. 차디찬 로마감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겉으로 가장 불쌍한 인생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판단을 거부합니다. 자기의 신분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 죽더라도 부활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고 선포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이에요.
여러분, 지금 어디에 앉아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노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누가복음 22장 30절에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나에게 주셔서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던 것 같이 이제 나도 너희에게 내 나라를 줄 것이다. 너희는 곧 나와 함께 열두 보좌에 앉아서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누렸던 그 모든 자유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환하게 자유인으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 까지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살았던 그 용기를 우리들에게 주신다는 거예요.
지난 2004년 말에 아체에 쓰나미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수십만 명이 죽었어요. 우리 교단에서도 긴급히 구호금을 보내서 피해지역을 돕는 일을 했었습니다. 일 년에 걸쳐서 아체의 믈라보 지역에 임시병원을 세워서 주민들을 돕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우리 교단 선교부의 회계였어요. 나중에 과연 그 돈이 제대로 쓰여 졌는지 현장을 가보는 일이 있었습니다. 메단에서 믈라보를 들어가는데 큰 비행기는 없고 경비행기에요. 한 열 명 정도 밖에 못타더라고요. 조종사 옆에 타고 날았는데요. 그거 타 볼만 하더라고요. 비행기가 너무 높이 뜨면 아래에 있는 게 아무것도 안보이잖아요. 경비행기는 적당한 높이로 뜨니까 말이죠,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아주 장관이에요. 운전은 조정사가 합니다. 저는 옆에 앉아서 그 신비한 광경들을 한참 보다가 한 시간 만에 내렸어요.
여러분, 하늘보좌 우편에 우리 주님이 계셔요. 주님이 모든 걸 운전하셔요.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어요. 땅을 걸어 다니고 땅을 밟을 때는 보지 못했던 신기한 광경들과 길들을 알 수 있어요. '하늘 보좌 우편에 앉는다.' 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훤히 알게 되고 우리 인생에 펼쳐놓으신 길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이지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라고 하는 미래학자가, 이제는 고인이 됐습니다만 이런 말을 했어요. "헬리콥터 마인드를 가져야 된다." 헬리콥터는 뭡니까? 비행기는 높이 뜰 수 있어 멀리 볼 수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해요. 자동차는 가까이 갈수는 있지만 높이 떠서 전체적인 것을 조망하진 못해요. 그러나 헬리콥터는 원하는 대로 가까이 가서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리기도 하고 제법 높이 떠서 전체적인 것을 보기도 해요. 입체적 사고를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내 자식이 소중하고 남편과 아내가 소중해요. 하루 세끼 밥 먹는 거 이건 다 소중한 일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다 소중한 일이에요. 친구하고 만나서 웃고 떠드는 일도 아주 소중한 일이에요. 그러나 동시에 놓쳐선 안 될게 있어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은 어디로 움직이고 계신가? 하나님의 시간표가 몇 시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에 있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삼일절 기념예배예요.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오는 데도 거저 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수많은 희생과 피 흘림이 있었어요. 전쟁이 있었고 가난이 있었어요. 경제부흥과 이만큼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일들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오늘 여기까지 온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삼일절 그러면 유관순 누나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2학년으로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가 결국은 목숨을 나라에 내어놓은 귀한 사람이지요.
비슷한 시기에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었어요. 이분은 조지아 공대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이에요.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오라고 했습니다마는 그는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선교사로 자원합니다. 1912년 22세 나이에 최연소 선교사로 뽑혀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게 되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 일하는 동안에 삼일운동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의 고통을 직시 하게 되요. 1919년 삼일운동 직후에 안식년을 맞아 돌아가면서 '내가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뜻을 정하게 됩니다. 교육에 뜻을 세우고 그는 돌아가서 신학공부도 하고 교육학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6.25 전쟁 와중에도 노력해 1959년 한남대학을 대전에 설립하게 됩니다.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고 1960년 70세로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이 집안은 윌리엄 린튼의 장인 이였던 유진 벨을 비롯해 4대까지 지금까지도 한국을 사랑하고 또 북한에서 결핵을 퇴치하는 일을 하는 유진벨 재단을 만들어서 한국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민족이 눈물을 뿌리고 고통을 당할 때 유관순 같이 목숨을 던져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또한 자기 나라가 아니면서도 이 나라에 와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배움을 통해서 독립을 찾아주고 자유를 찾아주려고 대학을 설립하고 인재들을 기르는 일에 평생을 바친 분이 있는 거죠.
며칠 전에 인터넷을 보니 아프리카 남단에 말라위라는 나라가 있어요. 얼마나 상황이 열악한지 인구 5만 명당 의사는 한사람이래요. 백영심이라는 올해 마흔아홉의 여자 분이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합니다. '말라위의 천사'라는 이야기를 듣는답니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 간호공부를 하다가 뜻을 세우고 1990년 스물여덟 나이에 아프리카로 들어갔어요. 21년째 그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치료하고 있어요. 이웃이 되어서 살아가요. 30평 진료소를 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업혀온 다섯 살짜리 아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안타까워하는 동안에 그 아이가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요. 하나님 길을 열어주십시오.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들도 보내주시고 병원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느 한 한국 기업가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셨어요. 그 분이 젊을 때 하나님께 서원한 게 있어요. '내가 큰 돈을 벌면 저 무지하고 어려운 아프리카를 돕겠다.' 그 분이 소식을 듣고는 33억을 투자해서 200병상의 병동을 세웠다고 하는 거지요.
'말라위의 천사 시스터 백'이라는 별명이 붙은 백영심 간호사는 일에 지쳐 돌아와서 검진해보니까 암이 드러났어요. 수술했습니다. 아직 연약하지만 그런 몸으로 내 고향으로 가겠노라. 아프리카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죽고 사는 건 하나님 손안에 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하나님이 내 인생의 길을 보여주신 대로 자유함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힘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십자가로 모든 인생을 덮으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 사랑으로 이웃을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멀리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도하며 우리의 물질을 나누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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