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316 내 영혼의 노래(시 42:1-5)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4:03

110306 내 영혼의 노래 (42:1~5)

성경본문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이 궁금해 하실까봐 먼저 알려 드립니다. 어제 CBMC가 주최한 한인교회대항 탁구대회에 우리교회는 8강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8강에 진출한 것은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어요. 탁구대회를 CBMC가 주최하지만 이왕 한인교회의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거라면 진정한 축제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새벽마다 모임마다 한 달 보름간 계속 기도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과연 그 일이 잘 진행되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많은 교회, 많은 분들이 오셨고 아주 기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다들 이제까지 살면서 이런 일이 없었다, 얼마나 좋은가.’ 그 바람에 그 자리에서 매년 하는 걸로 결정났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우승을 목표로 준비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겐 다 열망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내가 예전에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면서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며 기쁨과 감사의 좋은 시절을 보냈었는데 요새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구나하면서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조금만 눈 뜨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해도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 1 365일 양력도 있고 음력도 있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력이라는 게 있어요. 또 다른 말로 예배력이라고 해요. 크리스마스 예수님 탄생과 그 앞에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이 있고, 그 이후에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건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짚어보면 이번 주 수요일부터는 사순절에 들어가는 거예요. ’사순절이라는 것은 부활절 전까지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해요. 40일 동안 뭐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교도들이 라마단 한 달 금식하듯이 원래 우리도 금식했었던 거예요. 초대교회, 중세교회는 1 40일씩 금식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세속문화의 옷을 입으면서 옛 관습을 다 벗어버린 거예요. 세속화된 거죠. 

그런데 중세교회에서 강제로 40일을 금식시키려 하니 사람들의 반발이 있지 않겠어요?  그걸 달래느라고 뭘 만들었느냐 하면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며칠 동안, 보통 3~4일 동안 축제를 허용했어요. 그 축제가 바로 사육제(謝肉祭)’라는 거예요. ‘카니발이란 말입니다.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그 전통이 이어져온 거예요. 광란이잖아요. 해방을 선포했어요. 일탈이에요. 모든 질서를 뒤집어 놨어요. 가장무도회를 하고, 얼굴을 가려야 부끄러운 짓을 할 것 아니에요. 얼굴을 가려야 옷을 벗을 것 아니에요. 가장행렬을 한 거예요.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은 안 된다 해서 교회에서는 금지했어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톨릭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요즘 리우 카니발이 한창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사건입니까?  1 365일 신앙절기에 맞춰서 예배력을 지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험하고 어려운 세상을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그런데 사순절을 고통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얄팍한 사람의 마음을 달래느라고 사육제, 카니발을 만들어서 일탈을 선포하고 마음대로 방탕하게 했던 거죠. 그게 지금도 내려오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러분, 어제 CBMC탁구대회는 예사롭지 않은 거예요. 믿는 사람들의 카니발이었던 거예요. 시작할 땐 미처 생각지 못했죠.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던지, 이렇게 교회가 연합할 수 있는데 왜 우리가 진작에 못했을까. 참 즐겁고 멋있는 축제였어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요. 여러분 인생의 시간표는 교회의 시간표하고 일치해야 해요. 응답도 이 시간에 받아야 되는 거예요. 사업의 응답도 이 시간에 받아야 되는 거고 자녀의 문제도 이 시간에 받아야 되는 거예요. 죄의 문제와 여러분의 모든 문제는 이 시간에 응답을 받는 게 하나님의 법칙이에요. 하나님의 시간표에요. 학생이 공부한다고 하는데, 뭐 혹시 똑똑하면 검정고시로 공부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공부라는 게 책만 들여다 보는 게 공부가 아니잖아요. 학교에 가서 주어진 시간표대로 열심히 어우러지면서 삶을 배우는 거잖아요. 여러분이 사업을 크게 하던 작게 하던, 여러분 성격이 못돼 먹었던 좀 괜찮던, 그런 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시간표는 교회의 시간표화 일치해야 하는 거예요. 같이 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우리가 이번에 CBMC 탁구대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만 누가 우승하고 준우승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어요. 한인선교40주년 첫 해를 맞아서 중보기도집회를 통해서 인도네시아 300, 한인 300인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때 우리도 문고리라도 잡고 같이 열었어요. 앞으로 부활절연합예배와 40주년 감사예배와 내년도에 있을 전세계 수천 명이 모일 세계중보기도집회(WPA)까지 하나님의 시간계획이 분명히 있는데 우리는 이 시간표를 따라가는 거죠.

능력이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것은 모두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되라는 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한 달란트를 받은 자의 오해잖아요. ‘다섯 달란트에 비해서 내가 너무나 작구나. 부끄럽구나그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에요. 그건 지극히 세상적인 생각이요, 마귀적인 생각이에요. 받은 대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에요.

남편과 아내로 몇 십 년 살았으면 이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잖아요. 이제는 좀 내버려두세요.  그 마음을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 교만이고 무지에요. 내가 은혜 받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내 눈에 은혜의 눈물이 맺힐 때에 은총이 넘치고 하나님의 뜻이 보여지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언젠가 한 번 TV에서 신승훈이란 가수를 봤어요. 알고 보니 발라드의 황제라는데 작년에 데뷔 20주년이었대요. 그 젊은 사람이 벌써 데뷔 20주년 이래요. 그러면서 처음 히트 쳤던 그 노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부르더라고요. 그런데 사회자가 그 노래를 다 듣더니 신승훈씨, 20년 전에 데뷔할 때 그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 우리 한 번 볼까요?” 그러면서 20년 전에 데뷔하면서 불렀던 똑 같은 노래를 보여주는데 그걸 보면서 저는 깜짝 놀랬어요. 20년 세월만큼 기교가 늘었더라고요. 저는 20년 전의 노래가 훨씬 순수하고 좋던데요. 그런데 20년 동안 부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기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꽉 차버렸어요. 제가 왜 이걸 기억하느냐 하면 저 자신을 생각해봤어요. 제가 목회를 20년 했어요.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목회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런 걸 소위 전문가적 변형이라고 해요. 처음 의사로 되었을 땐 얼마나 떨립니까? 첫 수술, 그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노련해진 건 좋았는데 감격을 잃어버렸어요. 자칫 이제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남들은 가지지 못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이용해서 내 밥벌이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나는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이에요.

얼마 전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시던 분이 안 보이시더라고요. 한번 연락해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미루다가 좀 늦게 전화를 드렸어요.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목사님 말씀은 좋지요, 저도 고생을 할 만큼 했는데, 교회에 나가보니 사업이고 뭐고 되는 일이 있어야 남들 앞에 얼굴을 내밀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물러났다는 거예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또 그게 현실이지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저 먹고 사는 일에 매여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을까?

오늘 시편에 시인이 말합니다. 실패가 왔어요. 사업이 부도났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거예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 밤낮 하는 일이 그 모양인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나의 무능력 때문이고 나의 무지 때문이고 나의 연약함 때문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그마한 고백은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세속적인 가치와 기준에 매몰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를 좀 돌아보아주십시오. 예전에 주일에 나가는 게 그렇게 기쁘고 사람들에게 나가자고 권고하고 찬송하고 기뻐했던 그 일이 오늘 나에게 더 뼈아픈 눈물이 되고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마지막 대목에 놀라운 표현을 써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라.’ 자기와 자기의 영혼을 객관화시켜서 얘기하고 있어요. 독특한 표현법이죠.  여러분, 여기서 내 영혼아라고 얘기하는 것은 나의 본래적인 자아의 모습이에요. 죄와 허물 뿐이에요. 있으면 교만하고 없으면 낙망하고, 이게 내 본래적인 자아의 모습이에요. 이전 사람은 이 세상 험한 파도 속에서 흔들리며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자신을 가리켜요.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은혜를 경험한 나를 말하는 거예요. 내가 내 영혼에게 말하는 거예요. ‘너는 지금 낙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고 얼굴을 들어서 주님을 바라보라.’

얼마 전에 이동대 장로님이란 분이 저에게 책을 하나 전해주셨어요. <나의 손을 잡아주신 주님>이란 책인데 그 책을 읽다가 밤 샜어요. ‘, 그렇구나. 한 사람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은퇴하기까지 삶의 고비, 마디를 너무 절절하게 잘 쓰셨더라고요. 그분이 경상도 시골 가난한 집에 태어난 거예요. 아버지가 6.25때 실종되셨어요. 나이 10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어요. 그러니 가난을 벗지 못하는 거예요. 군에 가게 될 때 해병대를 갔어요. 남자답게 해병대에 갔는데 그 당시 해병대가 어떻습니까? 이를 악물고 매를 견디며 제대를 했어요. 제대하고 다시 농촌으로 돌아왔어요. 한심한 현실이에요. 그런데 자기 친구이면서 매부가 되는 사람이 어느 날 자기를 불러서 한마디 한 거예요. “, 너 논 몇 마지기 때문에 촌놈 되지 마라. 도시로 나가라.” 가난한 동생들과 어머니를 두고 부산으로 뛰어나간 거예요. ‘그래, 내가 여기 앉아있어 가지고는 우리 집은 영영 이 가난을 벗지 못한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겨우 뭔가 사업이라고 시작한 게 약국이었어요. 그런데 약국에 손님이 없는 거예요. 부부가 고민을 하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약국 앞에 교회가 있거든요. “여보, 우리 저 교회라도 다닙시다. 교회를 다니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상부상조한다는데 적어도 교회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약을 사지 않겠어요?” 그래도 사나이 자존심에 당신이 한 번 가보구려.” 그래서 부인을 먼저 보냈어요. 부인이 가서 등록하고 왔어요. 그 다음주부터 같이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시작했어요. 여러분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했으니 관심이 딴 데 있는 거죠. 들으나 들리지 않는 거죠. 한창 포항이 개발될 때 건설업에 뛰어들어서 제법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젊은 나이에 돈을 버니까 얼마나 신이 납니까? 사람은 그러면 자만해져요. 어느 날, 호텔 카지노 오락실에 가서 슬롯머신을 밤새도록 하고는 돌아와서 누워 자고 있는데 식모아이가 그만 주전자 고리가 빠지는 바람에 뜨거운 물을 15개월 된   아이에게 쏟아서 화상을 입었어요. 자다 말고 놀래서 아이를 끌어안고 병원에 갔어요. 의사의 진단은 어렵다는 거예요. 빨리 서울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너무 다급한 거예요. 그런데 교회 식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쳤어요. 그리고는 막 기도를 하는 거예요. 이 분은 속에 불이 나는 거예요. 지금 애가 죽느냐 사느냐인데 기도가 다 뭐냐, 빨리 올라가야지. 여전도사님이 간절히 기도하는데   기도가 너무 긴 거예요. ‘아니 남의 집 애가 아프다는데 자기들이 왜 울고 난리야.’ 기도가 끝나니까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시는 거예요. 막 속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 이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설교가 끝나는 순간 그들이 쏟아 붓는 기도와 간절한 간구에 이분의 마음이 열렸어요. 다 끝나고 목사님이 이 아이에게 물을 한 번 먹여 봅시다.” 전혀 물을 마시지 못하는 그 아이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물을 입술에 넣어 주었어요. 처음에는 몇 번 내뱉더니 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예요. 계속해서 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요. 병원 원장은 빨리 서울에 가야 된다고 눈치를 주는데 이젠 그거 다 잊어버렸어요. 계속해서 물을 먹이다가 드디어 며칠 후에 퇴원을 했어요. 일주일 동안 씨름을 하다 지쳐 부부가 곯아 떨어져서 자고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아침에 보니까 아이의 몸에서 비늘 같은 것이 홀랑 벗겨지면서 깨끗하게 회복된 거예요. 이적을 체험한 거죠. 이분의 신앙이 확 바뀌었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구나. 그 다음부터는 부부가 맨 앞자리에 앉는 거예요. 교회 나온 지 얼마 안됐지만 무조건 앞자리에 앉는 거예요. 여러분 앞자리에 앉으셔야 되요. 뒷자리에 앉는 분들은 진짜 계산 잘못하는 거예요.

이분이 사업을 해요. 보니까 큰 사업을 하셨어요.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교회건축 하는데도 헌금하고 경상북도 도의원까지 한 분이니까 여러 가지 단체의 회장도 하고 그런 거죠. 그런데 사업이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IMF 때 그냥 무너졌어요. 부도가 났어요. 수십억 재산이 한 순간에 날라 가버렸어요. 세 번이나 유서를 써놓고 죽으려고 했어요. 억울하게 감옥에도 들어가요. 백 일을 갇혀있게 되요. 탄식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왜 내가 이런 곳에그런데 기도가 바뀌어요. 그 차디찬 감옥에서 뭘 할까? 성경을 붙들고 읽기 시작해요. ‘그래, 내가 예수 믿고 장로 된지 20년인데 성경을 한 번 못 읽었구나.’ 그 상황 속에서 성경이 꿀맛이 되는 거예요. 성경을 세 번이나 다 읽고 은혜가 가득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오게 하시고 사람을 붙여주셔서 사업을 다시 일으켜 주시는 거예요. 나이 칠십에 은퇴하기까지 사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얻어 큰 돈도 벌고 그러다가 한 순간에 부도가 나서 망해버리기도 하고 죽을 위기까지 몰리기도 하고 감옥에도 들어가는 파란만장한 모든 일을 겪고 나서 그분이 내린 결론은 뭐냐? ‘,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그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응답되는 게 은혜가 아니라, 잘 되든지 못 되든지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시는 것 그게 은혜구나. 그것을 아는 것이 은혜구나.’ 그래서 그분이 나의 등 뒤에서라는 찬양만 들으면 그때 그 은혜가 되살아난대요. 저도 사실 이 찬양을 꽤나 좋아합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저도 이 노래밖에는 위로 받을 것이 없는 뼈 아픈 시절이 있었어요.

그분이 이제 은퇴하셨어요. 책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몇 년 전이죠. 잘 아는 회장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러 서울에 올라왔어요. 서울 지리가 좀 헷갈리니까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어디서 찬송가가 들려요.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같은 고생이라보니까 나무판에 온몸을 다 싣고 두 다리도 없고 팔만 하나 남은 장애인이 널빤지에 바퀴를 달고 그걸 밀면서 이 찬양을 틀고서 사람들을 헤치고 오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주머니를 뒤지면서 동전을 찾는 거예요. 겨우 500원짜리 동전을 하나 넣었는데도 그 장애인이 고맙습니다.” 그러는데 바로 앞에 서 있는 한 고등학생이 지갑을 열더니 만 원짜리를 꺼내가지고 넣어주면서 아저씨 힘내세요.” 이 장로님이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을 숨길 수가 없었대요. ‘내가 50년 예수를 믿고도 이 모양이로구나. ’

여러분, 우리의 능력 우리의 허물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한다는 것, 그게 은혜에요. 그저 나 원하는 대로 이것만 해결해주세요. 아니요, 인생에 순풍도 있고 역풍도 있어요, 죽을 때까지. 오늘 잘 나가고 있나요? 기억하세요. 역풍도 있는 거예요.

 

내 영혼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할머니 등짝에서 들은 찬송,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뜻도 모를 때부터 늘 들었어요. 100여 년 전에 미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찬송이에요. 작사, 작곡자 이름은 있는데 책을 뒤져보니까 사실은 그것도 분명하지 않은 거래요. 원래 찬송가 작사, 작곡에는 다 사람이 있고 뒷이야기도 있는 법인데 이상하게 이건 없다는 거예요. 무명작가예요. 오히려 그런 게 더 깊은 은혜에 감격해서 이름조차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무명으로 내놓은 거죠. 그 가사가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몰라요.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이게 내 영혼의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