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410 여인이 자식을 잊을지라도(사 49:14-19)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4:14

110410 여인이 자식을 잊을지라도 (49:14~19)

성경본문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여러분, 시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려 말 스님이었던 나옹선사의 시죠. 아주 전형적인 불교 사상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날마다 햇빛같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 명절을 맞아서 한 주간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리던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흩어지려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모였습니다. 절기를 지키고 형식을 지키지만 속 깊은 곳에 목마름이 있습니다. 빈자리가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끊임 없이 생수가 흘러나올 것이다.’

이런 약속이 있고 은혜가 있건만 그 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죠. 성경은 그것을 쓴 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더럽게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안에 쓴 뿌리가 있어서 자기를 괴롭게 하고 옆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쓴 뿌리는 어디서 비롯됐습니까? 삶 속에서 입은 상처를 통해서 나도 모르게 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흔히 우리 사회의 불공평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부당한 일들을 고쳐나가야 하죠.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것을 다 고친다고 하더라도 내 속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자유함은 없는 것이죠.

작년에 우리 나라에 <정의란 무엇인가?>하는 책이 아주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덜 교수의 명강의를 책으로 엮고 부록으로 강의 한 장면을 DVD로 해서 출판되었죠. DVD를 보니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한 가족의 형제 중에서도 몇 번째로 태어났느냐, 이 출생순위가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제 중에서 첫째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손을 들더라고요. 교수가 웃으면서 나도 첫째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어떻습니까? 부모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아요? 명문대학에 어떻게든지 많이 투자를 해서 학교를 보내는 거죠. 물론 둘째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는 첫째에게 쏟는 마음이 각별하지 않습니까.

첫째와 둘째가 달라요. 위치가 달라요. 1위와 2위는 생존방식이 다른 거예요. 1위는 넉넉한 여유로움을 가지고 자기가 잘났다고 살아가죠. 그러나 둘째는 기어코 자기 몫을 되찾으려는 욕망이 있기에 혼자서는 안 되니까 연합하는 거예요. 생존전략이 달라요. 성경에도 보면 둘째들에게 하나님이 기회를 많이 주시는 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습니다만 심지어는 하나님이 뭐라고까지 얘기하시느냐 하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했노라이런 표현을 썼어요. 이것은 하나의 과장법이죠. 첫째에게 모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 속에 둘째들에게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기회를 주시고 막내에게도 기회를 주셔요. 우리는 이 조건을 비교하면서 불공평하다고 얘기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렇게 높다고 했어요. 불공평하고 억울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거예요.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을 보면 이것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장면이에요. 첫째만 해방시킵니까? 아니요, 둘째에게도 자유를 주고 막내에게도 자유를 주고 모든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는 거예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오늘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때이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고난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셨도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아기를 잊어버릴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이 말씀이 믿어져야 돼요. 이 시간 그게 받아들여지고 믿어져야 그게 믿음이에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하나님 어머니는 안됩니까?” 아니 왜 안됩니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기록되었던 가부장적 질서와 사회의 사고방식 속에서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설정한 것이지만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의 조건에 매여 아버지로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죠. 아버지며 동시에 어머니시죠. 젖 먹는 아기를 어찌 그 여인이 잊을 수 있겠느냐. 그는 혹시 잊어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잊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아기를 향한 엄마의 마음은 참 생명같이 귀한 것이죠.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그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다고 말이죠.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세요.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세요. 하나님을 엄마로 이해하세요. 최근에 작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초판에 10만부가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엄마라고 하는 이름이 갖는 공감이 문화와 언어를 넘어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죠.

며칠 전에 TV 채널을 돌리다 보니까 군장병들을 위문하는 프로가 나오더라고요. ‘아직도 이런 게 있구나하고 들여다 봤는데요, 예전하고 많이 달라져서 날씬한 걸그룹 아가씨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니까 장병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난리가 났어요. 그러나 늘 마무리는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도 보셨듯이 엄마가 생각날 때하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오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자기엄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더니 구름떼 같이 나옵니다. 한 사람씩 떨어져 나가더니 드디어 마지막에 그 아들이 남고 엄마가 무대 뒤에서 나오잖아요. 젊은 장병들이 자기 엄마도 아닌데 벌써 엄마라고 하니까 달라지지 않습니까? 아들과 엄마, 영원한 관계죠.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은혜로운 교회가 어디냐? 논산훈련소 입소하기 직전에 대기하는 수용연대교회에요. 저도 수용연대에서 한 20일 대기했습니다만 그 교회 목사님이 제일 부러워요. 설교하다가 어머니하면 엉엉하고 장병들이 우는 거예요. 저도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성경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조곤조곤 하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어머니로 이해했구나 하는 것을 느껴요. 보통 아들들이 아버지하고 잘 얘기하지 않잖아요. 사무적인 얘기나 하고 필요한 얘기나 하잖아요. 반면 엄마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어머니니까 가능한 일이죠. 예수님도 하나님을 이해하실 때에 아버지라는 면도 있지만 더 깊게는 어머니라고 이해했어요. 반면에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아버지로 이해했어요.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이해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신앙의 자유가 있겠어요. 자유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어머니에요.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적치유에 관한 책이에요. 우리가 부모 손아래에서 자라나고 장성해서는 또 자식을 낳고 살아갑니다만 놀랍게도 우리의 삶에는 속사람의 신비한 사정들이 있어요. 교회를 잘 섬기는 나이가 많은 안수집사님이 계셔요. 이 분이 내적치유 세미나를 참석하고 배우면서 자기를 발견하게 돼요. 뭔가 자기의 속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움직이는 존재를 발견해요. 도대체 이게 뭔가? 그것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가 없지 않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나도 아버지가 있었지만 사실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다. 나도 아버지가 없었다.’ 주님이 자기의 깊은 아픔에 공감하시는 것을 발견해요. 예수님의 그런 손길을 발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을 생각할 때에 환한 빛이 나타나서 자기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던 어두운 것이 다 드러나고 벗겨지게 돼요.  알고 보니 그것은 자기의 속사람이었어요.

그분의 어머니가 22살에 남편을 잃고, 이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자라면서 혹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한평생 살아왔던 거예요. 알고 보니 그것이 자기의 삶을 아주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부분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를 알고 있고 너를 지키노라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이제까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면서도 마음의 평안과 자유가 없었음을 깨닫게 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것이 하나의 추상이 아니라 내가 미쳐 잘 알지 못하는 과거까지도 다 해결한 사건임을 발견하게돼요.

윤희라는 아가씨의 이야기가 있어요. 그는 늘 엄마와 부딪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엄마에게 잘 해야지 하다가도 엄마를 대면하면 말이 빗나가고 싸움이 되고 갈등하게 돼요. 내가 왜 이럴까? 그러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의 희미한 그림을 발견하게 돼요. 세 살 때의 일이 생각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재판을 받는 날이에요. 온 가족들이 집에서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린 자기가 막 울어대는 거예요. 견디다 못한 집안 식구들이 짜증을 내는 거예요. 아들이 아니라고 구박했던 할머니가 모질게 우는 아이를 번쩍 들어다가 대문 앞 비가 쏟아지는 진흙탕에다가 내던졌어요. 그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때 울고불고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울면서 엄마에게 구원을 요청할 때 엄마도 지쳤는지 시집살이가 너무나 힘들었는지 애가 그렇게 울어대는 데도 외면하는 모습을 세 살 배기 어린 아이가 순간 그것을 기억한 거예요. 그것이 평생 마음 깊은 곳에 찌르는 바늘이 되어서 엄마와 상대할 때 자기도 모르는 그 기억이 비수가 되어서 자기를 찔렀다는 거죠. 내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장면이 다시 보이는데 진흙탕 바닥에서 울고 있는 자기 옆에 주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씀하셔요. ‘엄마를 용서해라. 내가 너를 지켜주고 있잖니. 네가 이제까지 가족들에게 배척당하는 아픔을 겪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내가 너를 붙들고 지켜주었기 때문이 아니냐. 내가 너와 함께 한단다. 네 엄마를 용서해라.’

여러분, 우리가 다 잘 믿으려고 하고 잘 하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원인도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에, 심지어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에 겪었던 기억과 모든 것에도 원인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 거예요.

지난 주 토요일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개막했죠. TV를 켰더니 프로야구 중계를 하더라고요. 마침 유명해설가가 해설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잘 들어봤습니다. 야구를 좀 배우려고요. 제가 야구를 모르거든요. 마침 해설을 잘 한다는 분이 설명을 한다니까 좀 들어보자. 사람들이 축구보다 야구가 훨씬 재미있다고 하고 실제로 프로축구 관중보다 프로야구 관중이 훨씬 많잖아요. 한참 집중해서 들었는데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채널을 돌려버렸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저는 축구는 해봤어도 야구는 해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야구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축구하는 것을 보면 공감할 수 있지만 야구는 많은 작전이 재미있다고 하지만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하고 말아요. 그러니까 야구는 하이라이트만 보고 점수 내는 장면만 보고 말아요. 사이비죠.

여러분, 우리 신앙도 그래요. 논리와 이성으로만, 머리로만 따지려 하지 마세요. 우리의 삶과 똑같아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생명이 잉태되고 생명이 자라나고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듯이 우리의 신앙도 주님의 사랑을 두 팔을 벌리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리고 순종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고쳐주리라.’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