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최근에 서울대 졸업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화제가 되었어요. 그는 재학 중에 미국 대학의 교환학생으로도 다녀오고 자기가 속해 있던 동아리의 회장도 하고 아주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다 라는 평을 받았는데 고시에 실패하고 취업에 실패했을 때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조용히 가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형제들에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오늘 나의 이 모습을 내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미안하다. 용서하라고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깜짝 놀란 것은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여러 가지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1년에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300명이라고, 30명이라고 해도 놀랄 판인데 300명이라니요. 서울대학생도 자살을 해야 되는 사회라면 다 죽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연히 이렇게 저렇게 많은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어떤 분들은 그 자라나는 과정 속에서 위기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또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경험과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 그렇게 얘기합니다만 그러나 또 하나 놓쳐서는 안될 것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거지요. 그만한 대학을 나왔으면 이만큼은 해야 되는 것 아니냐 라고 하는 기대감이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지요. 사실은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제가 심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식사 같은 것은 생략하고 시간은 좀 짧지만 우리 교우들 가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만 제가 심방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좀처럼 마음을 열고 그 가정에 있는 문제를 서로 나누기가 어렵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밥을 안 먹겠다고 하는 이유가 저를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이 잘 먹여 보내야 되는 사람 같이 하는 것은 심방의 본질을 벗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 밥 먹으러 심방 하십니까? 그거 아니잖아요. 병들고 연약하고 어려운 문제가 누구에게나 다 있지요. 그런 것을 가서 함께 나누면서 우리 주님께 함께 내어 맡기고 말씀을 찾고 그 길을 찾아보자 라고 하는데 뜻이 있지요. 그래서 제가 가능한 한 식사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식사 준비하라고 하면 마음이 온통 다른데 가 있거든요. 한끼 잘 먹여서 보내야 된다 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수님은 성경에 보면 늘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는 자들을 만나주세요. 대표적인 것이 병든 자고요. 어떤 죄의식에 눌린 자들이에요. 알 수 없는 귀신 같은 이런 악한 영들에 매여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서 만나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장 무거운 우리를 억매는 것은 허위의식이지요. 어찌 우리가 번듯하고 그럴듯하게만 살겠습니까? 아니요, 우리가 우리자신을 다 알아요. 허물이 있고 연약함이 있어요. 우리 남편을 향해서든 아내를 향해서든 우리 자식도 다 연약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겪으면서 살아오고 있어요. 마치 환자가 의사 앞에 가서 그러한 것들을 다 이야기 함으로써 정확한 진단이 나오고 처방을 받고 약을 쓰고 치료를 받고 고침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서 일상을 회복하듯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죠.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더 가두어 놓는 굴레가 되는 것이지요. 허위의식을 벗어버려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교회는 병원이라고 이해하시면 정확해요. 병원이에요. 우리 다 나름대로 내가 알고 모르는 또 남이 알고 모르는 다 나름대로의 문제와 아픔과 갈등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대신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지금 만져 주시고 고쳐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남의 허물을 흉할 이유가 없어요. 병원에서 환자들이 다 모이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요. 너는 여기에 왜 여기에 그렇게 다리가 부러져서 왔느냐고 야단할 사람이 누가 있고 너는 왜 머리가 깨어져서 왔느냐고 얘기할 사람이 뭐가 있겠어요. 병원은 의례 그런 곳인 것처럼 교회도 그런 곳이에요.
오늘 본문을 읽어보니 예수님이 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리고로 돌아서 지금 예루삼렘에 들어오신다는 이야기에요. 왜냐면 유월절이기 때문에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오래 전에 애굽의 종살이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 구원해주신 그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종이 되었던 사람을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해방을 주시고 경제적 자유를 주시고 사회적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나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그 유월절의 해방의 감격을 잊지 않으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한 주간 그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때 또 한번 해방되었다 해가지고 지금도 자유롭고 해방이 되었느냐 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삶이 어느 곳에서나 늘 얽매이는 곳이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애굽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이웃의 많은 사람들과 이웃나라들과 갈등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나라 안으로나 밖으로 또 다른 부조리와 갈등과 아픔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그날의 해방을 기억하면서 오늘 다시 우리의 삶을 얽매고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으려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거예요. 갈릴리에서 그 여리고 까지 100킬로 미터입니다. 그리고 다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언덕길을 쭉 올라오는데 20킬로 미터라고 해요. 모두 120킬로 미터예요. 유대인들은 당시에 하루 길을 40킬로 미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므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삼렘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리는 길이예요. 그리고 여리고에서 50리 길이예요. 여리고에서 50리 길이니까 우리가 한 시간에 10리를 걷나요? 한나절 부지런히 걸어야 예루살렘에 들어가겠지요. 오늘 보니 이제 예루살렘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야트막한 감람산 그 동네만 넘어서면 이제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감람산에 가까이 오면 벳바게라고 하는 무화가 나무가 무성한 마을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예루살렘 5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베다니 라고 하는 동네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여기까지 오셨어요. 이미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을 때에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국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 앞부분을 읽어보면 이미 여리고를 거칠 때에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그 당시 주목 받는 인물이었어요. 많은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이고 그가 선포하신 말씀이 권세 있고 새로운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지금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다고 하는 것은 당시에 뉴스거리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는 거지요. 드디어 베다니에 왔습니다. 이제 5리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잠깐 걸음을 멈추시더니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킵니다. 저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 마을에 들어가면 들어가자 마자 문가에 매어놓은 나귀새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나귀새끼는 아직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다. 그것을 끌고 와라. 그런데 혹시 어떤 사람들이 지켜보다가 ‘아니 왜 남의 나귀새끼를 만집니까?뭐 하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 ’주님이 쓰시겠다.’라고 말하라. 헬라어로 말하면 이 나귀새끼의 주인의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라. 그러면 허락해줄 것이다. 그러면 즉시 그 나귀새끼를 이리로 보내리라.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상하지 않아요? 멀쩡히 길가 문가에 매어놓은 나귀새끼를 풀어가겠다는데 그 왜 그러십니까? ‘주님이 쓰시겠다.’하라 이건 아주 담대한 선포지요. 왕의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들이 보내줄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만 ‘그들이 보내줄 것이다’라는 표현을 성경원어에서 달리 표현 할 수 있어요.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그리고 곧 쓴 다음에 돌려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더 합리적으로 해석 놓았어요. 나귀새끼를 끌고 왔다는 거예요. 이제 주님이 그 나귀새끼 위에 올라 타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주목하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드디어 왕으로 들어가심을 보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가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가지고 길에다가 펴고 그것을 밟고 가시게 왕 앞에 양탄자를 펴듯이 준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서 왕대신 주님의 그 길을 예배했다라고 하는 뜻으로 그 종려 주일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왕으로 들어가실 때 나귀새끼를 타셨다. 이것은 구약성경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의 말씀이 있어요. 오늘 우리가 교독문으로 같이 읽었어요. 시온에 따라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에 따라 찬송할지어다. 내 왕이 들어가신다. 내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신 분이어서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신다. 칼을 휘두르는 왕으로 백마를 타고 들어가시지 아니하시고 나귀새끼를 타고 겸손의 왕으로 들어가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가실 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주님이심을 선포하셨어요. 주님이 쓰시겠다 여기에 나귀새끼가 쓰였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왕으로 들어가는 대목에 정작 사람보다 나귀새끼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상세하게 나와있어요. 이건 뭘 말하느냐 가장 연약하고 작은 것을 주님이 선택하셔서 주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데 쓰고 계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높아지기를 원하고 잘되기를 원합니다. 많이 배우기를 원하고 많이 가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저도 그렇습니다만 간혹 스스로 좀 웃음이 날 때가 있어요.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웃을 때가 있어요. 어떤 경우냐 하면 서로 시간을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 자신을 드러내어 이야기 하다 보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가장 잘하고 가장 멋있는 이야기만 해요. 내가 이런 사람이다 이거죠. 나 좀 똑바로 알라 이거죠. 그런 유혹으로부터 저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내가 왜 이렇게 얘기 할까? 그거 열등의식이에요. 어떻게 사는 동안 그렇게 독수리 날개 치며 날아 가듯이 성공만했겠어요.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건 자기 방어예요. 자신감이 없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이지요. 있는 대로 다 툴툴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사람이에요. 너무 자기 잘 한 것만 얘기 하는 사람 약간 병든 사람이에요. 알고 얘기 하시기 바랍니다.
나귀새끼를 주님이 쓰실 때 그 나귀새끼는 지상에 있던 수많은 나귀와는 다른 거예요. 왕을 모셨던 나귀새끼예요. 간혹 연예인들이 자선경매를 하기 위해서 자기가 쓰던 물품들을 내놓지 않습니까? 그러면 팬들이 몰려가 비싼 값을 주고 사잖아요. 아니 그 티 시장에 가면 몇만 원짜리 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큰돈을 주고 산다는 거예요. 그러고도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가 입었던 옷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은 다 연약해요.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부름에 응해서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삶을 드릴 때 그때 귀해지는 거예요.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중요하지 않아요. 여러분, 주님이 쓰시냐 안 쓰시느냐가 중요해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아주 세심하게 지켜보시다가 그를 부르셔요. 이미 베다니에 오기 전에 여리고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여리고를 돌아 나오실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나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여리고에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라고 하는 맹인이 있었어요. 그 맹인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소리쳐서 부르짖지 않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마가복음을 읽다 보면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제대로 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앞을 못 보는 절망 속에 있던 바디메오는 여리고라고 하는 이 도시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이 교통의 모퉁이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 얘기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그야말로 나를 고치실수 있는 분이라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그 눈먼 자가 예수님 앞에 찾아 나온 거예요. 그것도 말이지요 드라마로 말하면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막 나가실 때에 이제 예수님이 여리고를 나가시면 그분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는 거예요. 마지막 기회였어요. 예수께서 그 무리와 함께 나가실 때에 부르짖어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칩니다. 그것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라 하세요. 무엇을 원하느냐 보기를 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눈을 열고 돌아가라. 그랬더니 그 바디메오가 눈을 열게 되고 그 마지막 구절을 보니까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길에서 예수를 쫓았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와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정말 예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바디메오밖에 없었어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올라가셔요.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왕 되심을 제대로 알아차리면서 호산나를 부르짖은 사람은 몇 사람 없었어요. 왜 그러냐? 모두 다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니 우리를 정치, 경제, 사회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우리를 다 뒤집어 놓으실 구세주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겸손하셔서 왕으로 들어가시고 성전을 들어가 보시고 성전을 다 둘러 보셨어요. 예수님의 목표는 어디에 있느냐 로마를 내 쫓는데 있지 않았어요. 성전을 회복하는데 있었어요. 세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때까지 46년 동안 거대하게 지어져 가고 있었어요. 화려한 것을 추구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세상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성전을 쌓아가고 있고 그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는 그 허위에 빠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려고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 하셨죠. 그리고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씀의 뜻을 아무도 알지 못했어요.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맛보도록 그 어떤 것으로부터 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도록.
여러분 그 김응용이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하셔요? 우리나라 예전에 천재로 유명했잖아요. 그 사람이 올해 49살이래요. 그 기록을 보니 대단했어요. 이미 5살 때 4개 국어를 했고 6살 때 일본 후지티비에 출연해서 아주 고등 미적분을 풀어냈고요. 아이큐 진단을 받았는데 그때 인간 최고 치수가 200이었는데 그 기계로 더 측정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판명해서 상징적으로 거기다 10점을 더 붙여서 아이큐 210이라고 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머리라는 뜻이에요. 7살에 대학을 들어갔고 8살에 미국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미국 나사에 들어가서 연구원이 됐어요. 16살 때까지 미국나사에서 물리학을 연구했다는 거예요. 그 어려운 것 들을 풀어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더 놀라운 일이 있어요. 16살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신문에서 다 ‘왜 돌아왔느냐’ 그러고는 ‘실패한 천재’ 그랬어요. 그런데 그는 모든 비난을 묵묵히 이겨내고 검정고시로 다시 시험을 준비해서 지방의 충북대학에 입학을 했어요. 토목공학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그 근처에 개발공사에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가 살면서 제일 어려웠던 게 어떤 거냐. 자기가 그 미국에 가서 풀려고 하는 문제를 풀면서도 왜 내가 이것을 해야 하는지 몰랐대요 문제를 내 주니까 문제는 풀었지만 내가 왜 이거를 풀어야 하는지 몰랐대요. 그러다가 ‘이거는 내 길이 아니다’ 라고 판단하고 자기의 어려움과 고충을 얘기하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기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대요. ‘아니 천재가 왜 그러냐’. 그리고 자기가 묵묵히 돌아와서 대학을 들어가서 공부하고 가는데 내가 정말 이제야 행복하다라고 얘기하면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대요. 거 왜 남이 행복하다는 데도 못 믿어 주면서 너는 그럴 리가 없다고 너는 지금 저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되어야 된다 라고 주장했던 주위의 많은 시선을 견뎌내기가 어려웠다는 거예요. 그는 지금 이렇게 얘기해요. 지금 자기는 너무 행복하데요. 아들하고 공차는 게 행복하고 퇴근길에 대포한잔 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데요. 여러분 쫓아가서 그 사람 말리지 마세요. 돌아보세요. 여러분 우리도 그 허위를 벗어야 해요. 자녀들을 얽매지 마세요. 그 자녀들 안에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인생이 있고 그 꿈이 있어요. 그걸 키우고 살려줘야지.
여러분 나귀새끼라도 주님이 부르셔서 그 나귀새끼를 타실 때에 그는 가장 행복한 나귀새끼가 된 거예요. 우리 인생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쓰시는데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호산나 찬송을 할 때 자기 흥분에 겨워가지고 찬송하면 안돼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그것을 알아야 해요.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다 둘러 보시고는 ‘이제 가자’ 그러고는 해가 저물매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베다니로 철수 하셨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거예요. 주님의 시간표가 있어요. 주님의 마음이 있어요. 이번 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고난 주간이에요. 우리가 다른 때는 몰라도 고난주간만큼은 적어도 짧은 시간이라도 주님께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그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깊이 발견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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