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424 부활의 은총(막 16:1-8)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4:18

110424 부활의 은총 ( 16:1-8)

성경본문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 많은 나라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영국은 끝까지 미국을 응원했습니다. 그래서 영국과의 관계가 좋았지요. 영국의 수상 토니 블레어가 미국을 방문했고 미국의 의회를 방문했을 때 아주 의회에서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그가 연설을 하려고 섰을 때에 한 의원이 짓궂게 묻습니다. "그런데 수상, 250년 전 영국군이 바로 우리 의회 도서관을 불태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토니 블레어가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과 드립니다." 분위기를 바꿨던 거지요. 사람과 사람은 말이 통해야 돼요.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도 말이 통할 때 살맛이 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하나님과 사람이 말이 통하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이요 믿음이라고 할 터인데 신앙을 갖는 첫걸음에 그게 어려워요. 매사에 이해가 안 돼요.

예를 들어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예수님에게 나와 "이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예수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인들을 조용히 불러가지고 사람들이 그 집에 들어올 때 손을 씻게 돼 있어요. "손 씻는 큰 돌 항아리가 있는데 거기다가 물을 가득 부어라. 그걸 다 채운 다음에 그것을 떠다가 주인에게 갖다 주어라." 그랬더니 그것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그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안 돼요. 아마 하인들이니까 '에이, 나는 모르겠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한다.' 하고 갖다 주었더니 포도주가 되었을 겁니다. 속는 셈 치고 따랐더니 포도주가 되더란 말입니다. 그런 사건들이 성경에는 가득해요. 때로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들도 많이 있지요.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하나님 자기 자신을 믿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셔요. 아브라함에게는 기껏 100세에 아들을 하나 주시더니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가지고 우리 제이틴즈 학생부 친구들만큼 자라니까 그 금같이 길렀던 아들을 마치 양이나 소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듯이 그렇게 아들을 바쳐라.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양보를 안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바치라는 거예요. 여기에 갈등이 있어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너무나 명백한 모순이고 너무나 명백하게 하나님이 틀렸기 때문에.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요. 갈등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예요. 고민에 빠트리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을 내가 믿습니다.' 하고 자기를 한 번 더 던질 때에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셨단 말이에요. 한번 그 모리야산을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이 지금 아들을 끌고 모리야산에 단둘이 올라갑니다. 얼마나 발걸음이 무겁겠어요. '정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인가?' 라고 하는 이런 갈등 속에 올라가는 거예요. 앞이 캄캄해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마지막까지 순종해서 산 정상에 설 때에 놀랍게 저쪽에서는 하나님이 양을 끌고 올라오고 계셨어요. 아브라함이 아들의 손을 잡고 이 산기슭에서 정상을 향하여 올라갈 때 똑같은 높이만큼 저쪽에서 양을 끌고 올라오셨어요. 올라가고 있는 동안에 보이지 않았어요. 정상에서 만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고백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모든 길을 준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돼요.

여러분, 신앙은 이해문제가 아니에요. 한번은 믿음으로 넘어서야 돼요. 당장 여기 중국집만 가도 얘기가 다르잖아요. 자장면이에요? 짬뽕이에요? 그저 밤낮 고민하잖아요. 두 개다 좋지요. 그러나 하나 선택해야지요. 박지성이에요? 박찬호에요? 채널을 돌리려면 결정해야 되잖아요. 누구하고 결혼할 거예요? 미스터 김이에요? 미스터 리에요? 둘 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그 중에 한 사람과 결정하는 거지요. 선을 백 번이나 본 남자가 있어요. 그래서 친구가 물었어요. "넌 도대체 무슨 선을 그렇게 보냐? 그랬더니 자기는 완벽한 여자를 찾겠다고 그리고 세월이 흘렀어요. 나이 마흔이 되어 그 친구가 다시 만나서 물어봤어요. "아니 아직도 결혼을 못했느냐? 물었더니 아직 결혼 못했대요. "아직도 완벽한 여자를 못 만났어?" 그랬더니 아니 만났대요. "아니 그런데 왜 결혼 안 했어?" ", 글쎄 그 여자가 완벽한 남자를 찾잖아." 결혼 못해요. 한번은 결정해야 돼요. 오늘 세례를 받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고 세례 받지 못해요. 믿음이 겨자씨같이 조그만 믿음이 있어요. 그러나 이게 살아있는 믿음이에요. 그것을 의지하고 세례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라는 거예요.

이사야 55 8절에서 9절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래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하셔요. 요한복음 14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이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 그래서 부활의 첫 새벽에도 오늘 말씀 보니까 여인들이 향유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려고 그걸 고이 준비했다가 동도 트기 전 이른 새벽 캄캄한 밤에 나갑니다. 그러면서 걱정해요. '돌무덤에 어마어마한 돌을 누가 굴리지?' 그거는 장정들이 다 덤벼들어도 겨우 열수 있는 것인데 나약한 여자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남자들은 아무도 안가요. 가보나마나 돌을 굴릴 수가 없을뿐더러 거기 가면 안돼요. 그건 봉인되어 있고 로마 군병들이 지키고 있어요. 거기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붙들려 갈 거예요. 그런데 여자들은 모르는 거 아니에요.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하는 마음에 가는 거예요. 이게 여인들의 사랑이겠죠. 그러나 정작 그들이 빈 무덤을 보게 되고 천사를 보게 될 때 너무나 놀랍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마지막 절에 보니까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너무나 놀라서 떨면서 도망했다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 ? 초자연적 경험이니까. 희망하고 바라기는 했지만 막상 경험하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도망가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 믿음이 없다는 것도 아니에요. 정상이에요. 믿지 못하는 거예요.

또 말합니다. '말씀대로 주님은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리라 너희는 거기에 가서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날 만날 때 '너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제자들이 너무나 놀래잖아요. 귀신인 줄 알잖아요. 그래서 손과 발을 보이면서 말하죠. ", 내 손과 발을 보라 귀신에게는 없지만 나에게는 이와 같이 뼈와 살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무슨 먹을 것이 없느냐?" 구워 놓은 생선 한 마리 드리니까 그것을 제자들 앞에서 먹었다는 거예요. 그건 무엇을 말해요? 배고파서 드시기도 했겠지만 어떤 의미가 있어요? 귀신이 아니라는 거지요. 변화된 몸으로 이렇게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런데도 참 믿음을 가지기 어려웠어요. 오늘 마가복음을 쭉 읽어보면 참 놀라운 부분이 있어요. 제자들이 여전히 믿지 못해요. 특별히 마가복음에서는 아무도 그 부활을 믿었다는 사람이 없이 마가복음이 끝나 버려요. 막달라 마리아가 와가지고 '내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얘기하는데도 제자들이 믿지 못했다' 그래요. 임마누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밤에 돌아가 가지고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라고 말하는데도 제자들이 믿지 못해요.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야단하셔요. 믿지 않는 것과 마음이 각박한 거, 마음이 둔한 것, 굳어진 것을 야단하셔요. 저 같으면 아예 상대도 안하고 가버릴 텐데 놀라움이 일어났어요. 여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셔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이 뭐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라고 하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증거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라 특별히 베드로에게 반드시 이야기를 전하라'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에요? 예수님 부인하고 나중에는 저주하고 나는 결단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맹세까지 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을 잘라버려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니요 오히려 그렇게 믿음에 실패한 베드로를 특별히 챙기시면서 부르셨어요. 그에게 이야기 하라고 했어요. 내가 그를 통해서 역사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게 부활의 은총이에요.

예수님을 믿는다. 어떤 사람은 그러죠? "나는 예수님은 믿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못 믿겠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 말은 그분의 말씀, 그분이 이루신 모든 일을 다 믿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믿느냐? 오늘 말씀하는 거예요.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께 오늘 순종하지 않는 것, 이것이 신앙의 모순 이예요. 부활하신 주님께 순종하면 돼요. 오늘 마가복음 마지막에 보니까 부활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자기의 일을 증거 하셨다. 우리가 순종하면서 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일을 이루셔요.

저는 근초고왕이라는 드라마를 참 재미있게 가끔 봅니다. 그런데 나라를 새롭게 하려고 하는 뜻을 가지고 그 복잡한 신하들의 이해관계를 한 몸에다 끌어안고 백제중흥을 위해서 일어나는 패기가 너무 멋있어요. 그래서 성을 뺏어야 되잖아요. 군대를 보내가지고 성을 뺏잖아요. 그런데 요즈음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셔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동문이에요.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만 순종하고 끝까지 가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문을 여셔요. 그게 바로 가나안 땅 여리고성의 싸움의 비밀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고 순종하고 따라 나가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그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놀라운 현장을 보게 하셔요. 그런 은총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넘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