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01 어린이와 같아야 (눅 18:15~17)
성경본문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제 인생의 첫 무대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성경학교 때 아이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전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여서 선생님이 이번에 나가서 노래 한 번 해보라고 몇 번을 권유하셔가지고 아주 조심스럽게 나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노래, ‘사과 같은 내 얼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에 전혀 안 맞는 노래였습니다만 그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선물로 공책을 한 권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저에게 있어서는 제 인생에 아주 소중한 경험이고 드디어 무대에 서기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던 거죠. 그 이후에는 성탄축하예배 때에 아이들이 여러 가지 많은 순서를 준비할 때 늘 참여해서 성경암송을 한다든지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이 물에 젖듯이 서서히 신앙 속에 들어가게 된 거죠. 아까 강준이 나와서 노래를 했는데 이건 대단한 기회에요. 아마 강준의 인생 속에 오늘은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겁니다.
우리 신앙은 평생신앙이에요. 지난 주간에 제이틴즈 학생부 아이들 영성캠프가 있었습니다. 다녀 온 학생들의 소감문을 제가 읽어보면서 뭘 느꼈냐 하면 ‘그래, 그렇지.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가 있을까?’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말씀이든 기도든 어린 아이가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먹다가 밥을 먹고 이렇게 하면서 서서히 음식을 취하고 하루 세 끼 먹으면서 부지런히 자라서 그가 온전한 인간이 되고 인격이 되듯이 우리 신앙도 그 과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어려서부터 신앙을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생은 가시밭길이에요. 나이 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알고 보면 다 그 나이 때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는 거예요. 부모가 다 헤아려주지 못하고 해결해주지 못해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습니까?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하고 마주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그때 첫사랑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울적해져서 사람은 왜 사는 건가요, 그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님이 그때 몇이셨는가 나이를 헤아려보니까 우리 어머니 나이가 그때 서른여덟이셨더라고요. “너는 별걸 다 묻는구나” 하고 슬쩍 피해가셨습니다만 우리의 삶의 마디마디마다 그런 고민과 갈등이 있어요. 부모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런 내 속 깊은 물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그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몸부림이죠. 그럴 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건 좀 극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여러 번 소개해드린 실로암 안과병원의 ‘김선태’ 목사님, 나이 10살에 6.25 전쟁을 만납니다. 폭격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다 한 순간에 돌아가셨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들과 함께 불발탄을 만지고 놀다가 터져가지고 친구들은 다 죽고 자기는 시력을 잃었어요. 눈 먼 고아가 됐어요. 전쟁 그 와중에 별 볼일 없는 한 아이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어요. 그는 서울과 부산에서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거지로 살았어요. 그런데 그 비참한 상황 속에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 교회를 나갔다가 선생님께 들은 한 말씀을 마음에 기억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네가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단다. 네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너를 꼭 기억하시고 지켜주신단다’ 라고 하는 그 말 한 마디를 기억하고 깡통을 끌어안고 구걸하며 살아야 하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작정해요.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에 하나님 앞에 꼭 나가서 예배하겠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뻐하셨는지 그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셔서 오늘 자기와 같이 시력을 잃고 고통 당하는 많은 사람들, 또 백내장으로 고통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큰 병원을 이루고 그들을 무료 진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분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서 자기 눈을 고칠 수 있지만 자기는 고치지 않겠다고 얘기해요. 다른 사람들이 다 고친 다음에 내가 하겠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만큼 하나님의 깊은 은총을 경험한 거죠. 어린 시절에…
오늘 우리시대의 위기는 먹는 것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죠. 아모스서에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같이 오늘의 이 굶주림은 먹고 마시는 굶주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목마름이다’라고 말해요. 사사기를 흔히 영적인 암흑시대라고 말해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왔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왔어요. 그러나 놀랍게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렸어요. 사사기 2장 7절로 10절에 보면 세 시대로 구분합니다. ‘여호수아 세대’가 있어요.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했던 여호수아 세대가 있어요.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에는 ‘장로들의 세대’라고 했어요. 장로들의 세대는 여호수아 때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는 것을 경험했던 세대에요. 그래서 그들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섬겼듯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 다음 세대, 그 이후에 일어난 세대, 세 번째 세대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말해요. 그 세대부터는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는 그런 고통을 받는 세대가 됐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 세대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자녀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지난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하게 베풀어줘요. 공부도 많이 시켜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어요. 오늘의 교회 위기는 지금 교회 구조가 교회 출석인원을 보면 세대가 내려갈수록 급격히 수가 줄어들고 있는 역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어요. 이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위기에요. 우리들의 책임이에요.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의 기독교 100년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가 근 100세 가까이 사시기도 하셨고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물려주고 가셨어요. 그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배우고 그를 본 받아서 자라나고 그래서 오늘 세대를 이루고 있어요. 한경직 목사님도 하나님이 불러 가셨고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하나님이 다 우리 곁에서 불러가셨어요. 이제는 우리가 이 세대의 주역이 되어서 교회를 지키고 있고 강단을 지키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만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를 지금 부지런히 길러야 하는 것이죠. 여기에 위기가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이 위기는 말이죠 그 안에 해답도 있어요.
유대민족의 역사를 여러분이 다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종말을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 종말이 구체적으로 가르친 시대는 AD 70년, 로마에 의해서 유대가 완전히 멸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은 다 고향에서 추방됩니다. 그때부터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로 다 쫓겨나가서 2,000년을 방황하며 살게 돼요. 2,000 년 동안 나라를 잃고 2,000 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민족이 없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느냐 하면 그들은 어느 나라에 흘러 들어가든지 그들의 고유한 안식일을 중심으로 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죠.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신명기 6장 7절에서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자녀에게 이것을 부지런히 가르쳐라. 집에서도 가르치고 나가서도 가르치고 앉든지 서든지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항상 자녀에게 가르치라.’ 이것을 굳게 지키고 2,000년 동안 살았던 거예요. 나라는 다 허물어졌지만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요, 나라였던 것이죠.
그래서 정통파 유대인들이 선택하는 가장 살기 좋은 동네는 어디냐 하면 회당이 가까이 있는 곳이에요. 안식일에 회당에 걸어나갈 만큼 그렇게 가까이 있는 곳이에요.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는 다 학군이 좋은 곳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잘못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한 가지 더 생각할게 있어요. 정말 자녀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가정을 위해서 교회중심으로 집을 선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철저하게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을 가르치는 일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에 오늘 유대민족이 2,000 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뒤에서 다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 유대인인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예수가 없다>는 책을 읽어보면 유대인들의 신앙교육과 그들의 의식구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걸 읽어보면 두 손을 들게 돼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이 민족을 당할 민족이 없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기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아이들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을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할까 봐 쫓아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내게 나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그리고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이런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다.’ 여기 보면 ‘자기 아기를’이라고 했어요.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어요. 물론 여기 헬라어로는 표현이 다르죠. 아이라는 말은 ‘파이디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라고 하는 단어는 ‘브레포스’라고 해서 또 다른 언어를 썼어요. 이것은 의도가 어떤 의도가 있느냐면 예수님께 나아갈 때 철들어서 다 큰 아이만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젖먹이 어린 아기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의 입맛은 4살 이전에 엄마가 먹여 주는 대로 다 결정된다고 해요. 사실 우리의 삶은 우리 부모로부터 그 유전인자의 결합을 통해서 다 만들어져서 나왔어요. 결정되어서 나왔어요. 그런데다가 그 어린 시절의 입맛부터 시작해서 모든 습관들이 다 그때 엄마 품속에서 결정돼요. 사실 학교에 들어갈 때쯤 되면 다 만들어진 것에 포장을 하는 것 이외에 없어요. 신앙은 엄마 품에 있을 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중요해요. 사실 뒤늦게 30, 40대, 50대에 예수를 믿으려니까 이게 믿어지기 어려운 거예요. 조금 늦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은 심하게 그런 얘기도 해요. 오십이 넘은 사람은 성경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안 고친다는 거예요. 자기 고집이 있어서 안 고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또 다음주부터 오십이 넘었다고 잽싸게 적용하시는 분은 악한 겁니다. 그 말은 뭐에요? 그게 실상이라는 거죠. 사실이 그래요.
자기의 어린 아기일지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젖먹이 어린 아기일지라도 예수님 품 안에 그 아이를 맡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제가 할머니 등에 엎드려서 밤낮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그 찬송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때 다 결정된 거예요.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교육하지 않는 민족은 곧 망하게 돼요. 그러나 반대로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든지 자기 자녀를 위해서 신앙교육에 결단을 하고 어린 아기 때부터 아이를 예수님께 내어 그 품에 안겨드리는 그 신앙교육은 민족을 살리는 해답이고 열쇠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시대는 영적 암흑시대였어요. 그때 보면 ‘한나’라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때는 일부다처사회였었는데 한나는 아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금식을 하며 기도합니다. 성전에서 며칠을 머물면서 울부짖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물으셨어요. ‘너 아이를 준다면 뭐하겠느냐? 지금 이 땅에 이렇게 아이가 많고 이렇게 남자아이가 많은데 또 아이를 구해서 무엇하겠느냐?’ 그때 한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어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이 풍요의 땅,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서 다 헛된 길로 살아가는 이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남자들, 수많은 아들들, 그런데 나는 왜 하나님께 또 아들을 구하는가? 내가 가정에서 사랑 받고 대접받기 위하여 아들을 구하는 것인가? 그런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너는 왜 아들을 구하느냐고 물으시는가? 이 세상에 어둠을 밝힐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한나가 기도를 바꾸죠. ‘하나님, 내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내가 하나님께 다시 되돌려드려서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그를 영적 어둠을 밝히는,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어요. 그래서 그에게 아들을 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사무엘이에요. 사무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뜻이에요. 그 사무엘을 잘 길러서 하나님 성전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내어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다시 다섯 아이를 더 선물로 주셨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절대로 대충대충 일하시지 않아요. 아무리 세상이 고통스럽고 어려워서 구원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한 방법대로 하지 않고는 구원의 길은 열리지 않아요. 어둠의 세상, 영적 암흑시대에 하나님께서 한나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기도하는 그 여인을 깨우쳐주시고 그 여인이 깨닫고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고 길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서 그가 그 나라를 이끄는 인물이 되었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무엘상 7장13절에 보면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못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한 사람이 우뚝 설 때까지 그 시대의 고통은 그치지 않는 것이죠.
여러분, 자녀신앙교육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해요. 가시고기를 아십니까? TV에 보면 가시고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고기들이 그렇죠. 알을 품고 암컷 수컷 부화하고 그 알을 지키기 위해서 암컷이든 수컷이든 자기 몸이 다 걸레같이 너덜너덜 헤어져서 죽을 때까지 끝까지 그 알을 지키다가 결국은 죽잖아요. 심지어는 그 치어들이 부화돼서 죽은 어미 아비를 뜯어 먹고 자라요. 그게 생명의 원리에요. 결국은 우리 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다 주는 거예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을 그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에 여러분과 함께 이런 비전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유대인이 철저하게 가정중심으로 신앙교육하고 자녀들을 기르는 그 방법이 정말 완벽한 방법이에요. 제가 보기엔 한국사람이 그걸 따라가기는 정말 어려워요. 우리의 삶의 구조 자체가 너무 자본주의적이고 너무 세속주의적이어서 그런 신앙적 원리를 가정이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어요. 어려워요. 그러면 대안이 뭐냐? 교회중심으로 자녀를 기르는 거예요. 혼자 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요? 우리가 연합하면서 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교회에 보내주시고 교회에서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아이들에 관한 것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리고 여러분은 있는 힘을 다해서 같이 돕고 그렇게 해야 되는 거죠.
지난 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사건은 참 역사적인 사건이었는데요, 더 의미가 있었던 것은 흑인인권운동을 부르짖었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지 딱 만 40년 만에 최초의 미국 흑인대통령이 들어섰어요. 마틴 루터 킹이 그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가지고 민권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어요. 그때 한 세대 전에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고 피를 뿌리면서 쓰러지기까지 흑인들의 권리를 부르짖었던 사람이 있었기에 40년 만에 대통령이 있을 수 있는 거죠. 투자 없이 결과는 없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어른들이 예배를 번듯하게 잘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녀들이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해요. 우리 교회의 책임이에요. 교회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지금 우리는 시대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선교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데,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물결을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Four Fourteen Windows’라고 말합니다. 4살부터 14살까지, 유치부 아이들부터 중학생들까지, 이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으켜 세워야 할 세대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때 아이들을 신앙으로 잘 길러놓으면 다음 시대에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맛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라고 하는 게 먼 아프리카를 가고 다른 나라를 가고 다른 문화를 가고 이런 것도 다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알고 보니 우리 가정 안에 4살부터 14살까지의 우리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방치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을 일으켜 세우자고 하는 게 지금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선교의 새로운 Movement, 운동이에요. 우리도 같이 해야죠.
제가 여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게 9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만 제가 와서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 신앙교육을 위해서 이렇게 개별적인 교회가 나뉘어 가지고 소수의 학생들을 끌어안고 하는 것으로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다. 어떻게 하든지 이 아이들을 한데 묶어가지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최고로 가장 좋은 신앙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된다고 늘 생각하고 말하고 기도하고 그런 길이 없을까 늘 생각했었죠.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미 자카르타에 중고등학생들을 위해서는 ‘Youth Kosta’라고 해서 청소년 지도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들이 매년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 강사들이 인도네시아에 찾아와서 매년 겨울에 아이들을 위해서 수련회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자카르타에 있는 모든 교회와 또 인도네시아 전 지역의 선교사 자녀들까지 매년 600명에서 650명의 자녀들이 함께 참여해서 수련회를 3박4일 동안 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고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연합하면 모두에게 유익이 돼요. 이제는 여기 우리 자카르타 교회들이 그거 하나 알았어요. 이게 얼마나 좋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바라기는 중고등부는 그렇게 시작이 됐으니까 이제 우리 아동부 아이들도 어떻게 하든지 같이 모여서 여름성경학교든 수련회든 같이 모여서 좋은 강사를 초빙해서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경험하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그리고 그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쓰다듬어 주셨어요.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셨어요.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를 얻지 못한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할 때 그 핵심은 뭡니까? 유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어린 아이에게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는 자기를 환영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내어 맡기는 전적인 신뢰를 말하는 거죠. 전적인 신뢰를 말해요. 그래서 사무엘은 어려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랐기에 말씀을 보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하는 것을 사무엘은 구체적으로 알았어요. 성경에 놀라운 표현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기도는 한 마디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사무엘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에요. 이것을,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여러분의 기도는 왜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까? 그것은 땅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을 거기에 합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기도해놓고 의심하는 사람의 기도는 무효에요.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인도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죠.
또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세요. 아주 푹 빠져서 몰입해가지고 놀지 않습니까? 해가 떨어져서 엄마가 들어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정신 없이 빠져서 몰입해서 놀고 있는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몰입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다윗의 장점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다 부어드렸다고 하는 것이죠. 세상을 살 때 자기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는 것이다 라고 하는 그 원리를 반드시 알아야 돼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능력으로 살았습니까?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분명히 고백해요. 세상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눈 뜨고 잠들고 일어나서 움직이고 하는 이 모든 것 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사는 것이죠. 그럴 때에 우리에게 혹 어려운 고난이 있을지라도 요셉과 같이, 요셉이라는 이름은 더한다는 뜻이에요. Plus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요셉에게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더하셨어요. 남다른 고난을 더하셨어요. 그러나 그 고난 속에는 남다른 은총이 있었어요. 혹 여러분 자녀가 남보다 더 어려운 길을 걸어간다고 여러분 탄식하지 마세요. 기도를 바꾸세요. 자녀가 원치 않게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저에게 고난을 더하시는 만큼 저에게 은총을 더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살아계신다고 하는 것을 내 자녀가 고백하게 해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가장 멋있는 사람이냐?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살아계심을 고백하는 자녀, 이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승리자에요. 이런 자녀로 기를 수 있도록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가 꿈과 비전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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