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508 어머니의 하나님(룻 1:15-22)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5. 14:22

110508 어머니의 하나님 ( 1:15~22)

성경본문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종로3  파고다공원은 노인들의 공원이죠. 종로3가 스타벅스에는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분들에게 물어보니까 호텔 커피숍은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다방으로 가기에는 노인냄새가 나서 싫고, 또 다방과 달리 스타벅스 같은 데서는 쫓아와서 뭘 마시겠느냐 성화를 안부리니 좋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 함께 젊어지는 것 같아서 너무나 좋다. , 이게 노년을 맞는 분들의 현실이죠.

그러나 얼마 전 부모들에게 물었습니다. ‘나중에 노후에 자기 자녀들과 함께 살고 싶냐?’는 물음에 90%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따로 떨어져서 살고 싶다. 현실이 갈등을 낳는 것이죠. 세대가 단절되는 거죠. 이렇게 세대가 단절되면서 오는 여러 가지 위기 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적 위기는 신앙이 전수되지 못하고 끊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더 풍족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대를 이어서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것이죠. 영적 암흑기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이야기이며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영적 암흑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흉년이 들었어요. 나오미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이웃나라 모압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가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요. 서둘러서 두 아들을 장가들입니다. 모압의 처녀들을 며느리로 맞아들여요. 그러나 모압에서 10년 사는 동안 그 두 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을 남기지 못합니다. 모압생활 10년에 세 과부만 남았어요. 드디어 고향 유대 땅에 하나님께서 풍년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모압에서 고생하며 살기보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가기로 했습니다만 걸음이 무겁습니다. 이제 돌아간다면 나는 내 고향으로 가는 것이지만 청상과부인 두 모압며느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서 먹고 살 일도 막막하고 모압며느리들이 그 속에 들어가서 차별 받으며 살아야 할 것도 막막하고. 고민이 아닐 수 없어요.

고향 가다 말고 멈춰서서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 신에게로 돌아가라.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붙들고 그럴 수 없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하고 붙들죠. 그 때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너희는 돌아가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유대 땅에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옮겨 온 것, 어찌 보면 먹고 살기 위한 당연한 결정인 것 같지만 모압에서의 10년은 더 피폐하고 곤고하고 어려운 삶이었어요. 그것이 마음에 걸려요. 믿음으로 결정한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 모압 땅에 와서 살아보려고 할 때는 손에 쥔 것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빈 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구나.’ 빈 손보다 더 마음이 무거운 것은 이제까지 1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살지 못하였기에 오늘 이 고난과 고통이 내게 왔구나 라고 하는 죄의식이죠. ‘그러므로 하나님께 매맞은 나를 더 이상 따라오지 말아라. 너희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원래 나오미라고 하는 말은 기쁨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나오미가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서 아니, 이 사람이 누구냐? 나오미 아니냐?’고 말했을 때 나오미가 말합니다. ‘어찌 나를 나오미 라고 부르느냐. 나를 나오미 라고 부르지 말아라. 나를 마라 라고 불러라.’ ‘마라라는 말은 쓰다는 말이에요. ‘고통이란 말이에요. 이게 나오미의 괴로운 고백입니다.

두 며느리 중에 하나는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끝까지 남습니다.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는 이제 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그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요. 룻이 언제 하나님을 믿었는가는 성경에 드러나있지 않아요. 그러나 이 집에 시집와서 10년을 사는 동안 어느덧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거죠. 아마도 나오미와 며느리들이 서로 이별을 아파하는 모습이나 룻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쫓는 모습을 볼 때 적어도 그들의 관계는 좋았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너무나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을 하는 며느리가 너무 애처로워서 고마웠는지도 몰라요. 우리가 결혼하고 아들 딸들 시집 장가 보낼 때 서로 비슷한 분위기와 수준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요. 여러분, 새 사람이 와서 우리 집안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 또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새식구로 받아주는 가정에 대한 감사, 이런 것을 놓쳐버린다면 중요한 본질을 놓치는 거죠. 시어머니와 며느리, 나오미와 룻의 관계는 좋은 관계였어요. 가난하지만 화목했어요. 그러기에 슬며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 것이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빈 손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여기서 나오미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있어요. 결국 빈 손이 아니었어요. 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소중한 한 가지를 얻었어요. 이방여인, 모압여인 며느리 룻에게 믿음이 심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나오미의 믿음이 좋다고 얘기할 수 없어요. 그는 어쩌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으로 흉년을 피해서 이웃 나라로 와서 10년을 사는 동안에 더 피폐해진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씨앗이 룻에게 심겨졌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해요. 사실 우리가 잘 믿어서 우리 후대들이 잘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비록 온전하게 믿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 우리 후대들에게 믿음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나기도 해요.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낯선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룻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셔요. 시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믿음을 통해서 무너진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룻이 세운다기 보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살아가는 기회를 주시는 거죠. 여러분, 구레네 시몬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에 자기의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시다가 넘어졌어요. 채찍에 두들겨 맞아서 예수님은 이미 숨이 다 넘어가는 지경이었어요. 자기가 매달릴 나무 하나도 메고 갈 수가 없었어요. 그때에 예수님이 쓰러지자 로마 군병이 주위에 둘러선 구경꾼 중에 건장해 보이는 한 남자를 끌어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메게 하고 골고다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에요. 북아프리카 구레네 지방에서 왔던 시몬이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그가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로 그 가정에 예수 복음이 들어오게 되요. 그의 아들들 가운데 알렉산더와 루포가 있는데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알렉산더와 루포는 교회의 일꾼이요, 그들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다라고 말해요.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속에 그 가정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 가정들이 다 화목하지 못해요.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 까닭에, 예수는 예수대로 믿으면서 싸우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사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가정이죠.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다 벌거벗고 사는 가정에서 믿음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하루에 12번도 더 넘어져요.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요. 여러분,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한 두마디 해서 정신차리고 다 알아들을 사람들이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없어요. 끝없이 넘어지기에 아예 생명을 주신 거예요. 넘어질 때마다 그래,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순간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과 기질과 이런 모든 것으로 인하여 늘 그릇 판단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지만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생명의 은혜로 우리를 덮어주셨지.’ 그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나는 것이죠. 놀라운 은총이죠.

이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세요. 룻이 유대땅으로 갔습니다. 거기는 낯선 땅이에요. 언제 한 번 TV에 보니까 우리나라에 다문화가정들이 많이 있잖아요. 어느 필리핀 여인이 한국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한국에 왔어요. 딸 둘을 낳았는데 둘째를 낳자마자 건강하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끝내는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어요. 그야말로 청상과부가 됐어요.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함께 두 딸들을 기르면서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가 나와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룻의 상황이에요.

고향에 돌아왔습니다만 나오미는 용기를 내지 못해요. 나를 마라라 부르라. 고통과 고난이라고 불러달라고 할 만큼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갖고 있어요. 룻이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밭에 나가서 일하겠습니다. 지금 보리 추수를 할 때니까 여기 가난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보리 추수하는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워 가지고 오겠습니다하고 나가요.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어서 어느 밭에서라도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오늘 양식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담대하게 말도 불편할텐데 낯선 문화와 차별을 각오하면서 일터로 나가요. 어떤 밭에 나가서 일을 하죠. 그런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일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연이라고 표현해요. 사람은 자기 앞길을 모르니까 우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룻기 전체를 읽어보면 그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보아스를 만납니다. 보아스의 호의를 입습니다.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 모압여인으로 하여금 이삭을 줍게 하라. 저 연약한 여자를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켜주라. 물도 마시게 하라.’ 또 식탁을 베풀고 불러서 함께 먹게 하고 먹을 것을 풍족하게 나누어줍니다. 모압여인 룻이 너무 놀라서 어찌 이름없고 천한 계집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그때 보아스가 말합니다. ‘이 조그마한 베들레헴이란 동네에 당신의 소문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당신이 시어머니에게 했던 선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가 다 들었습니다. 당신이 자기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나서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날개 아래 살고자 들어왔으니 하나님이 당신을 보호해 주시고 은혜를 덧입혀 주시고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 룻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작동하느냐? 룻이 시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고향과 자기 민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붙드는 룻의 사랑, 룻의 헤세드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은 다시 보아스의 호의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보아스의 헤세드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자그마한 관심과 배려와 친절, 희생이 씨앗이 되어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 삶 가운데 넘치게 하는 것이죠. 돌고 도는 헤세드에요.

저는 두 주 전에 귀한 손님을 맞았어요. 토요일 아침에 제 사무실에 있을 때 노크를 하더니 어떤 분이 들어오셔요. 50대 되신 남자분인데 보니 제가 아는 집사님이에요. “아니, 왠일이십니까?” 했더니만 그 옆에 연로하신 어머님이 계시더라고요. 어머님도 오셨다는 거예요. 어머님과 같이 잠깐 집을 나섰다가 발길이 가는 대로 왔는데 저에게 오신 거예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여든이 훨씬 넘으신 분이세요. 어머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서른여덟에 남편을 잃고 다섯 남매와 함께 남았는데 옛날 벌이도 시원찮을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정말로 답답하고 어려워서 날마다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기도가 오늘까지 45년이에요.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자기의 답답한 사정과 형편, 날마다 먹고 살아야 할 일들,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쳐야 할 일들을 놓고 기도합니다마는 결국에는 곧 교회를 위한 기도가 되고 목사님을 위한 기도가 되고 그 교회의 모든 일들을 품고 기도하게 되었노라고 얘기해요.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섬기는 교회가 고려대 앞에 있다고 해요. 그런데 살다 보니 형편이 어려워져서 부천으로 이사갔어요. 그런데도 날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그 먼 거리의 새벽기도를 다닌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오 남매를 다 먹이고 입히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다. 더 감사한 것은 이렇게 효자 아들을 주셨다. 아들을 칭찬하는 거예요. 그 아들은 말합니다. 너무 집안이 어려워서 엄마가 다 챙길 수 없어서 자기를 외가에다 맡겼다는 거예요. 외가에 맡겨서 입이라도 하나 덜게. 일찍이 집을 떠나서 외가에 맡겨져서 살았는데 외가도 사업이 어려워져서 아주 어려웠다는 거예요. 남들같이 순탄하게 공부하지 못하고 어렵게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 대학에 다니다가 인도네시아에 들어와서 일한 지 20여 년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네시아의 삶 속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돈도 벌 수 있게 해주시고. 날마다 새벽기도를 다니시는 어머님이 어떻게든지 편안하게 교회를 다니실 수 있도록 교회 근처에 집을 마련해드렸고 이제는 노년이 되어서 연약하신 어머님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어머니에게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 모시고 들어왔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말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지만 어머니와 집사님 두 분이야말로 성공한 분입니다.” 한평생 살면서 가난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인하여 어머니를 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고 늙으신 어머니를 높이고 그의 노후를 살피는 그 아들, 성공한 아들이죠. 또 어머니도 일찍 남편을 잃고 고생을 하면서도 한평생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면서 제가 말했어요. “두 분이야 말로 제 방에 들어온 많은 분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귀한 손님들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정말로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무엇 하러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부모자녀도 돈 때문에 갈라서는 세태 속에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서로를 보듬어 주고 세워주고 사랑하고 있다면 이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하나님, 그분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에요. 지난 날 우리의 어그러진 것을 나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회복시켜 주시고자 오늘도 내 마음을 흔들고 계시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