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0509 계명과 전통(막 7:9-14)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6. 14:28

100509 계명과 전통 (7:9-14)

성경본문

또 이으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여러분, 고려장高麗葬이 무엇인지는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그런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이 고려장에 관한 내용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는, 1882년 구한말에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화학과 교수였던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동양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역사도 쓰고, 또 우리나라에는 와 본 적은 없습니다만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관한 글을 썼죠. <은둔의 나라 한국>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 고려장이 한국의 관습으로 나와 있죠.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그것은 불경에 나와 있는 기로국棄老國 설화’, 노인을 버린다는 그런 설화에 기초했다고 보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는 자녀들의 교육 목적을 위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지 그것을 실제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게 왜 하필이면 고려장이 돼가지고 우리나라 이름이 붙었는가 해서 부끄러워하지만 그러한 습속習俗에 관한 기록은 전 세계 문화 속에 다 나오는 거죠. 그것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더 연구해봐야 할 일이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문명사회라는 오늘날에도 고려장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서울대 사회발전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사회의 노인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프고 지치고 외롭다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사대상자  72%는 만성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42%는 질병 때문에 사회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합니다. 39%는 치료비를 어떻게 해결할 길이 없어 걱정이라고 합니다. 35%는 아무도 자기를 도울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죠.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 십계명 가운데 유일하게 약속이 실려있는 계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모세는 말하기를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리거나 훼방하면…’ 훼방이라는 것은 저주하거나 욕하면 그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23 22절에서 25절 말씀을 보니까 너 낳은 아버지에게 청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고 네 부모를 즐거워하며 네 낳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으로 강조하고 이렇게 말씀으로 강조하는 것은 말이죠, 그게 잘 안 된다는 뜻이죠. ‘침 뱉지 마시오그게 무슨 말이에요? ‘담벼락에 오줌 싸지 마시오그거 뭐예요? 그게 잘 안 된다는 얘기잖아요.

오늘 예수님이 예수님 당시에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비판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고르반이라고 하는 전통이 있어요. 희생, 희생제물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고르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고 하는 서원이기도 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교묘한지 부모님을 섬겨야 되는데 그게 싫어서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습니다. 한 번 맹세한 것은 깨뜨릴 수 없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들이 해석해놓은 유전으로, 자기들이 해석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5 8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가족이나 친척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이다.’ ? 하나님의 계명을 번연히 알면서도 지키지 않고, 지키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가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어제 어떤 선교사님이 아들을 장가보냈어요. 그 신혼부부가 인도네시아에 여행을 왔어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가까이 하는 선교사님 몇 가정을 식당으로 초대해서 인사도 시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아들 며느리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얘기하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시부모와 친정부모에게 십일조를 하도록 해라.” 여러분, 그거 대단한 거 아니에요? 내일은 못 지킬지라도 오늘 그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는 거 그거 대단한 거예요. 전 여러분에게 그렇게까지 하라고는 얘기 안 하겠어요. 용돈은 드리세요. 그런 유머가 있잖아요.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네 가지. 첫째 돈, 두 번째 화폐, 세 번째 수표, 네 번째 머니. 나이 들어서 돈 없으면 너무 어려워요. 그렇잖아요. 아이들 자꾸 레슨 시키려고 하지 말고 욕심에 이것저것 덧붙이지 말고 과감하게 하나 끊고 그 대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세요.

요즘은 또 얼마나 전화하기도 좋습니까.  전화비도 별로 안 나오잖아요. 저도 부지런히 전화를 드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제가 보니까 일주일에 두 번, 잘 하면 세 번 전화를 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전화를 드리면 늘 하시던 얘기 또 해요. 그러나 듣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말씀이 늘 내 마음을 울려요. 언제부턴가 말이죠, 꼭 그런 말씀을 하셔요. ‘전화해줘서 정말 고맙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다음에 또 전화해라 그런 얘기 아니겠어요. 얼마나 전화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한편 사람이기에 받은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어요. 그러나 전화할 때는 말이죠, 좋은 말씀만 드리는 거예요. 칭찬해 드리고 위로해 드리고 감사했습니다.’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간혹 가족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딪히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아들을 내게 바치라고 까지 한 말씀은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한 거죠. 또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나보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나를 따라올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혼돈을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 그건 본능이죠. 우리 안에 꺼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사랑이죠. 그러니 백 세에 얻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사랑이에요. 예수님이 기도응답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주지 않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그 원초적이고 가장 뜨거운 인간의 사랑을 넘어서는 더 뜨거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으로 아들을 내어놓으라고 한 거죠. 그건 아들을 기대하는 게 아니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거죠.

이어령 교수가 칠십이 훨씬 넘어가지고 뒤늦게 회심을 했어요. 대표적인 무신론자였는데 그가 몇 년 전에 회심을 했어요. 그리고 최근에 회심을 경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어요. <지성에서 영성으로> 거기에 보면 그가 11살에 해방 전에 그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마음에 늘 후회가 되는 것은 아마도 어머님이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수술을 받으러 서울로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막내 아들에게 내 다리 좀 주물러 다오했다는 거예요. 그랬는데 철이 없어서 그게 싫었던 거에요. 그래서 나 바빠요하고 거절했는데 그게 그렇게 두고두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죠.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년 후에 부활하신 어머님을 만났다고 얘기해요.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년 후, 여전히 학교를 다닐 때, 온천 읍내로 난 신작로 길을 따라서 부지런히 책보를 둘러매고 학교에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인력거꾼이 끄는 인력거가 자기 앞을 휙 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인력거를 보니까 어머님이 마지막 수술을 받으러 서울로 떠나실 때도 인력거를 타고 가셨던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를 앞서 지나쳤던 인력거가 저 앞에서 멈추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주 잘 차려 입은 귀부인이 내리시는 거예요. 자기를 주목해 보더니 다가오시는 거예요. 인력거꾼이 말합니다. “마님, 기차시간 늦습니다.” 이렇게 재촉을 하는데도 아랑곳없이 잠깐 기다렸다가 가까이 다가온 자기를 만나시는 거예요. “네가 용인댁 막내 아들이구나. 어디보자.” 그리고는 자기가 둘러매고 있는 책보를 끌러가지고, 옛날에는 그랬잖아요. 책은 몇 권 없고 도시락 하나 덜렁 있잖아요. 도시락을 열어보는 거예요. 두루두루 살펴보는 거예요. 밥도 들여다 보고 반찬도 들여다 보고. 그리고는 다시 뚜껑을 닫고 책보를 다시 둘러매게 하고는 말합니다. “그래, 너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거라. 네 어머니가 너를 지켜보고 있지 않니.” 그러고는 다시 인력거에 올라서 떠나가셨어요.

  갑자기 당한 일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한 거예요. 자기는 그분을 처음 봤어요.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사시는 분인지도 몰라요. 아마도 어머니를 아시는 분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낱낱이 아는 분이었기에 지나가다가 그 어린 아이가 책보를 둘러매고 학교를 가는 그 모습에 그만 마음이 울컥해서 멈추셨겠죠.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오늘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한 마음에 책보를 끌러보고 도시락을 열어보고 혹시 어머니 없이 지내면서 어려움이 없는가 하는 마음에 살펴보신 거죠.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말해요. 그날 그 일은 부활하신 어머님을 만난 것,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나를 만났어도 책보를 끌러보고 도시락을 열어보고 나를 품어주었을 터인데 저 분은 제 자식이 아니지만 내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나를 살펴주신 것이로구나. 그렇게 남의 자식까지도 살피는 여인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이야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마음이요, 우주적인 마음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 짓고 계시는 자기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난 거예요. ‘어머니, 주위를 보십시오.’ 그 주위에 제자 요한이 있잖아요. ‘당신의 아들입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가장으로서 집안일을 하다가 나이 삼십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집을 떠나왔기에 아마도 마음에 짐이 있었을 거예요. 마음에 빚이 있었을 거예요. 이제 죽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대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 상황은 한 순간 눈물이나 절망의 상황이 아닙니다. 어머니 눈을 들어서 하늘의 소망을 보십시오. 주위에 아들들을 보십시오. 당신이 나를 향해 베풀었던 그 사랑은 이제 다시 주위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흘러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제자 요한에게 말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다.’ 그날 이후로 요한은 그 어머니를 모시고 한평생 살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핏덩이로 이어진 가족의 원초적 사랑을 넘어 더 활짝 열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내 부모요 내 자녀요,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같이 흘러 나가도록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내 신앙의 바로미터는 다른 데 있지 않아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기준일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기준이 있어요. 내가 내 부모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 은혜를 잊고 살았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만큼 어그러진 거예요. 내 남편과 내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게 내 신앙의 바로미터에요. 내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과연 내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못 다 이룬 꿈을 자녀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대리만족으로 자녀를 기르려 한다면 그것도 또한 빗나가는 거예요.

최근에 책을 한 권 읽었어요. <내 사랑 황하를 흘러>라고 하는 책이에요. 여러분, 대천덕 신부님을 아시잖아요. 한평생 한국에 와서 강원도 황지 골짜기에서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한국교회를 향해서 예언적인 많은 말씀을 펼치셨던 분이에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죠. 그런데 그 집안은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이 똑같아요. 할아버지도 르우벤 아처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아버지도 르우벤 아처 토레이에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르우벤 아처 토레이 1, 아버지는 2, 자기는 3. <내 사랑 황하를 흘러>라고 하는 책은 그 가운데 르우벤 아처 토레이 2, 대천덕 신부의 아버지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 분이 26살에 중국 선교사로 와요. 1913년 중국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가장 어지럽고 혼란할 때 중국 선교사로 오게 돼요. 중국에서 37년간 선교를 하는데 끝내 공산화되면서 추방돼요. 중국 선교 말년에 그만 교통사고로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요. 그리고는 1952년 한국전쟁 통에 한국에 다시 선교사로 오게 돼요. 특별히 전쟁 때문에 팔다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재활치료를 위해, 의수족센터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한국에서 7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들 집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뭘 느꼈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넓게 해석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다오 하는 부모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그것은 곧 믿음의 가정을 세워서 대를 이어나가라고 하는 것이죠.

르우벤 아처 토레이 1세는 무디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무디와 더불어 미국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분이에요. 목사이며 학자였어요. 그래서 무디 성경학교의 초대 교장이었어요. 이미 시중에 그분의 책이 많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은 중국 선교사였어요. 그 손자는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서 이렇게 보낸 거예요. 이들은 미국 중국 한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았어요. 여기에 혈육으로 이어진 건강한 만남이 있고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가는 건강한 떠남이 있어요.

여러분, 성경 창세기 2 24절에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사람이 결혼하면서 부모를 떠나는데 건강하게 떠나야 돼요. 두 사람이 만나면 두 집안의 문화가 만나잖아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만 제가 결혼하고 보니까 제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안 개더라고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에 이까짓 거쯤이야 하고 이불을 갰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의문이 떠오르는 거예요. ‘왜 그럴까? 우리 집안은 자기가 이불을 개는데 저 집안은 왜 그럴까?’ 그랬더니 그 집안의 관습이에요. 부지런한 장인이 딸들을 깨워서 얼른 세수하라고 내보내고는 아버지가 이불을 개서 올리는 게 뼈에 밴 거예요. 문화가 다르잖아요. 제가 짜증도 내고 그랬죠. 왜 당신 이불을 당신이 안 개냐? 나중에 알았어요. 그 집안의 문화였어요. 문화가 달라요. 문화적 떠남. 두 사람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가는 거예요.

또 하나, 정서적으로도 잘 떠나야 돼요.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돼요. 그럴 때 내 아버지, 어머니 나의 원래 가족과 건강하게 화해하며 떠나야 돼요. 용서해야 돼요. 그 짐을 가지고 새로운 가정에 들어가게 되면 평생 멍에가 되는 거예요. 대부분 그런 상처들을 가지고 결혼하면서 갈등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잘 떠나야 되죠. 독립해야 되죠. 부모가 도와주는 거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도 버릇되면 큰일 나는 거예요. 과감히 거절하고 독립해야 되는 것이죠.

토레이 가족을 보니 미국 중국 한국으로 참 건강하게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중국에서 혼란기에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16살짜리 아들을 아버지가 과감하게 평양에 있는 선교사 자녀학교로 떠나 보내요.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한국으로 떠나 보내요. 이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하면서 때가 되었을 때 저를 떼어 보내는 거예요. 건강한 떠남이 꼭 필요해요. 그 전에 반드시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돼요. 우리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똑똑한 것, 우리 부모들의 소원이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하나님이 복 주실 때 그의 인생이 열리는 거예요. 그래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야 돼요. 격려해야 돼요. 신앙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되는 거예요.

흔히 효도하라고 말하는데 성경을 면밀히 읽어보면 그 효도는 부부중심으로 서서 효도해야 돼요. 가족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있고 자녀와의 관계가 있고 부부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하나를 이룰지니라.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보다 아내를 우선해야 돼요. 그게 성경말씀이에요. 두 사람이 온전히 하나가 된 다음에 아내의 손길을 통하여 부모를 섬기고 효도하는 것, 그런데 이게 어렵잖아요. 고부갈등 문제 해결의 열쇠는 남편이 쥐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서 타박할 수 있어요. 그럴 때 잘 받아들여야 돼요. ‘어머니, 그렇죠.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집사람이 잘 몰라서 그래요.’ 다 받아주고. 아내가 또 얘기하면, ‘그렇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어머니 피를 이어받은 나도 어머니를 잘 모르는데 시집 온 아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유를 묻지 말고 다 받아줘야 돼요. 저도 그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만 뭐라고 얘기하면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데?’ 빨리 결론부터 얘기하자는 거죠. 빨리빨리 일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죠. 그런데 이게 잘못된 거예요. 남자들을 뭐든지 문제로 파악하고 해결을 하겠다고 하는데, 여자분들의 의도는 그게 아니죠. 그저 공감해달라는 거잖아요. 나 이렇게 아프니까 공감해달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 방법은 뭐예요? 그냥 들어주는 거죠. ‘, 그랬구만.’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더라고요.

제가 어떤 책을 읽다가 정말 은혜 받았어요. ‘아내 사랑은 남편의 사명이다.’ 사업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내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 사실은 거기서부터 사업이고 뭐고 다 시작되기 때문이죠. 여러분,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건 하나님의 계명이에요.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부모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행복하고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