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1205 삶의 울타리가 무너질 때(욥 1:6-12)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6. 14:33

101205 삶의 울타리가 무너질 때 ( 1:6-12)

성경본문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이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고난에 관한 말씀을 드릴 때마다 생각나는 유머가 있습니다. 소위 고구마집사 이야기. 어느 시골의 한 남자 집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배가 출출한 거예요. 고구마 밭을 지나다가 고구마 하나만 먹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고구마 하나를 뽑다 보니까 줄줄이 달려 나오지 않겠어요. ‘주님의 뜻이라면 할 수 없지하고 다 망태기에 걷어 담다가 그만 주인에게 걸렸어요. 늘씬하게 두들겨 맞은 거예요. 겨우 집으로 돌아오면서 참 주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리고는 드러누웠습니다. 그 소문이 목사님의 귀에 들어갔어요.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자초지종을 다 전해 들었어요. 자기 잘못이죠. 그러나 목사님이 심방을 안 갈수는 없으니까 갔는데 딱히 해줄 말도 없어요. 예배 드린 후 몸조리 잘 하시라고 위로하고 일어나 돌아서는데 거기다 대고 집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얘기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거 다 자기가 미련해서 자초한 거예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구덩이에 빠진 것이건만 그 사건을 통해서 또 다시 한 번 주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시는 분이에요.

오늘 본문에 욥의 고난이 나옵니다.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주 단순 명쾌하게 욥의 고난을 의인의 고난으로 분류해요. 하나님이 직접 욥을 보시고 저렇게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아들 일곱에다가 딸 셋, 양이 칠천, 낙타가 삼천, 소가 오천, 암나귀가 오천, 수많은 종을 거느린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요, 의인이었다고 하는 거죠. 이런 욥에게 고난이 왔다고 하는 거예요.

욥기는 42장까지 되어있습니다만 우리가 흔히 욥기 1장과 2, 42 7절 이후의 결말부분만 알고 있어요. 이 부분은 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욥기 3장부터 42 6절까지는 시로 되어 있어요. 이야기로 되어 있는 부분은 욥이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고난을 당했지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하나님께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시로 되어 있는 3장부터 42 6절까지 사실상 욥기의 대부분인데, 그 분위기는 전혀 달라요. 거기에는 욥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이렇게 자기의 출생을 저주하고 있어요. 고통하고 있어요. 전혀 다른 이야기죠.

고난의 이야기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우리 주위에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럴 때에 고통을 위로하러 찾아가는 사람이나 또 고통 속에 있는 사람 모두 생각할 것이 있어요. 오래 전 일인데요, 10년 전에 서울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에 현대 아산병원에 심방을 가게 됐습니다. 거기에 한 50중반의 사장님이 입원하고 계셨던 거죠. 가족을 통해서 어떤 상황인지를 들었어요. 그랬더니 이 분은 아주 의지가 굳센 분이에요, 기업을 잘 키워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건강관리에 완벽한 분이었는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암이 발견됐지요. 미국 휴스턴의 유명한 암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괜찮다는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어요. 이렇게 잘 관리를 해서 깨끗하게 해결하고 다시 현업에 복귀했다고 생각했는데 반 년 후에 또 다시 발견된 거죠. 다시 입원한 상태였어요. 그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가서 그 눈빛을 보니까 말해봐야 한 마디도 먹혀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시편 2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성경을 한 구절 읽어드리고 짧게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분이 별로 얘기도 안 해요. 자기 고통이 너무 심해 괴로운데 옆에서 이야기한다고 들리겠어요? 눈도 잘 안 뜨시더라고요. 그 마음의 아픔을 알겠더라고요. 한 주일에 2번씩 갔습니다. 잠깐 앉아서 성경 한 구절 읽어드리고 잠깐 기도하고 돌아오기를 한 달쯤 하니까 이분이 조금씩 마음을 여시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아기 밥 떠먹이듯이 조금씩 먹을 만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구나 삶에 대한 의지가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하고 타협하지 않으셔요. 내가 떼를 쓴다고 하나님이 연장하지 않으셔요. 어느 날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몸부림 쳐서 될 일이 아니로구나,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의 의지와 열심과 수고로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해요. 그럴 때 계산법이 달라지니까 결과도 달라져요. ‘나는 그 많은 세월 동안 하나님 만날 기회를 다 놓치고 살아 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놓지 않으시고 붙들어주시는구나.’ 믿음으로 수용하면서부터 원망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뭘 크게 해봐야 하나님은 별로 관심이 없으셔요.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과연 너에게 허락한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걸 묻고 계시는 거예요. ‘Yes’라는 답을 얻는다면 그는 그 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거예요. 이 분의 계산법이 바뀐 거예요. 야망을 가지고 청춘을 불사르면서 기업을 일으키고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촛불같이 흔들리는 인생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열었어요.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다 은혜로 받습니다. 석 달째 갔을 때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저는 이제 가고 싶습니다. 하늘나라로 어서 빨리 가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돌아가셨어요.

우리가 고난 당한 자를 대할 때에 성경에 있는 말씀을 수학공식 들이대듯이 함부로 얘기할 것이 아니죠. 그 사람의 아픔을 한번 헤아려 보고 공감해야죠. 너무 쉽게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거에요.” 말은 다 맞죠. 그러나 그가 정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생각하면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또 고난 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어요. 욥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고난이 어디서 왔는지. 입은 다물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지는 않습니다만 욥도 인간이기에 마음은 혼돈의 극치를 달리고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오늘 욥은 몸부림치고 있지만, 놀랍게도 무대 저 뒤에서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계획되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옛날 이야기 같은 표현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은 주도권을 가지고 이 고난을 허용하셨어요.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사탄이 하나님에게 욥을 고소하지 않습니까. ‘욥이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건강과 부와 모든 것을 안겨주시고 울타리를 쳐서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하시는데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 울타리를 한번 다 치워 보십시오. 저가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저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어요. ‘그럼 한번 해봐라.’ 그러면서 욥의 삶에 고난이 온 것이죠. 

벌써 꽤 오래 됐습니다. 수십 년 전 사건인데,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이름 있는 원로 물리학자가 실종됐어요. 집을 나갔는데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한 일주일 후에 산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어요. 왜 그렇게 됐는가? 그가 뛰어난 물리학자였지만 나이 들어 후진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뒤로 물러앉을 때, 자기 무력감에 빠져서 견디지 못했다는 거예요. 늘 앞장서서 새로운 것들을 연구하고 발견하고 발표해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삶의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은 여러 가지죠. 가정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질 수도 있고. 건강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확인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욥에게 고난을 준 첫 번째 이유는 과연 하나님을 왜 믿는가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저에게 복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가. 욥의 신앙의 동기는 무엇인가. 여러분, 우리 신앙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소위 보상신앙이라는 게 있잖아요. 하나님 믿으면 복 받는다, 이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죠. 욥과 친구들과의 고난 논쟁에서 친구들이 말은 많이 했습니다만 그걸 한 마디로 줄이면 이유 없는 고난은 없다. 고난은 너의 죄 때문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네가 지금 비록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너의 죄 때문에 이 고난이 있는 것이므로 너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라.’ 그런데 욥은 나는 죄가 없다는 거에요. 나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했다는 거예요. 내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신앙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명기적 신앙이라고 얘기해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떡 반죽그릇이 복을 받고 들의 소와 양이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을 받는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면 반대로 너는 들어와도 나가도 너와 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신명기 신학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삶이 무너지고 사업이 파탄나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가정이 깨어지고 하는 것은 너의 죄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우리가 워낙 허물이 많으니까 대부분의 고난이 우리의 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다 죄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어요. 여기 중요한 것이 있어요. 신명기적 신앙관 외에 성경이 말하는 더 큰 신앙관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돼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시고 자기의 형상대로 인생을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우리를 지으시면서 복을 주셨어요. 우상 장수의 아들이었던 아브라함을 그 우상의 도시에서 불러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가리키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어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에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와 똑같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불러 내시고 저의 인생을 복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리고 그를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그럴 때에 아브라함이 때로는 순종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인지라 환경을 보고 넘어지고 물러나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부인하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번 저를 향하여 세우신 뜻을 끝까지 아름답게 이루어가시는 거예요. 아기를 낳은 부모들이 아기를 품에 안는 순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아이와 영원한 약속을 하는 거잖아요. 너는 내 아들, 내 딸이니, 내 생명이니 나의 모든 것을 가지고 내 한평생 너를 사랑하며 너와 함께 살아가며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주겠노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창세기의 신학이에요.

성경은 두 가지를 얘기해요. 조건적인 축복이 있어요. 우리가 순종할 때 주시는 복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축복이 있어요. 하나님이 그 엄청난 사랑으로 사랑하며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그저 순종하면 복 주고 불순종하면 벌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신 창세기의 복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그저 내가 열심히 하는 대로 하나님이 복 주시니까 더 열심히 한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아직도 깨닫지 못해 불순종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를 자녀로 품에 안으셨어요. 순종하는 자녀는 기뻐하시며 사랑하고 불순종하는 자녀는 섭섭해하면서 기다리면서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걸 놓쳐서는 안돼요.

지난번에 성지순례를 가서 로마의 카타콤이라고 하는 공동묘지 지하무덤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지하 8층 깊이나 돼요. 땅이 희한해요. 다 파낼 수 있대요. 로마 박해시대에 그 깊은 곳에 들어가서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거예요. 거기서 태어나고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어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도대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뭘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살았는가. 오늘 자그마한 성공과 성취를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시켜서 신앙을 측량하려고 하는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어그러지고 잘못된 생각인가 하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무채색으로 어두컴컴한,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돼요. 때에 따라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도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자를 놀라운 구원의 손길로 붙드시지만, 우리의 평범한 일상, 가정생활을 통하여, 부부관계를 통하여, 부모자녀관계를 통하여, 일터 속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살아가는 이 모든 만남을 통해서도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무대와 환경이 바뀌는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밝을 때는 밝은 대로, 흐릴 때는 흐린 대로, 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고난 속에 있으면 누구나 다 하나님께 부르짖게 돼요. 문제는 고난이 지나간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일상을 회복해주셨을 때, 어떻게 사는가 예요. 그것이 너무나 중요해요. 고난을 통해서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게 돼요. 고난을 통해서 욥이 발견한 건, 성경이 기록했던 하나님은 이제까지는 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그것은 나의 하나님이 됐어요. 나의 이야기가 된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것이 그때는 참 뼈아팠지만 두고두고 하나님께 감사해요. 저는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람을 우습게 보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이해가 되더라고요. 사업에 실패해보았다면, 사업이라는 게 사람의 능력이나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만 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거죠. 원치 않게도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깨어짐이 있을 때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는 것 같이.

사극 드라마를 볼 때마다 무릎을 칩니다. PD들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대학교 때까지 국사를 배워도 학생들이 잘 몰라요. 그렇게 잘 모르는 학생들이 사극 드라마에 빠져 들거든요. 얼마나 연출이 훌륭해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스스로 PD가 되어보세요.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이야기는 결코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나와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창조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이 고난을 통해서 욥이 발견한 게 뭔지 아십니까. 욥기 마지막 대목을 보면 욥이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끝까지 그렇게 주장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패를 딱 보여 주셔요. 하나님이 지으신 어마어마한 창조세계를 보여주셔요. 그것을 보는 순간 욥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어요. 뭐가 죄인지 아세요? 욥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했어요.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소떼, 양떼 그 숫자만 헤아렸어요. 자기 의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창조세계를 보는 순간 좁아진 생각과 어두운 눈, 그것 자체가 고난의 씨앗임을 깨달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서울 구로에서 박람회가 열렸어요. 6학년이 다 그날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 가는데, 저는 기차가 역에서 기적을 울리며 출발할 때 깼어요. 그래서 기차를 놓쳤잖아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계셔요. 그거 놓치면 안돼요. 그거 놓치는 사람이 죄인이에요. 거기에 고난이 있는 거예요. 고난은 다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일하시는 데 자기 혼자 저쪽에 가 있는 사람. 거기서부터 고난이 시작되는 거예요. 서울에 처음 올라온 사람은 어디가 어딘지 동서남북 헷갈리잖아요. 어디를 가든지 불안하잖아요. , 길을 놓칠까 봐. 길을 알고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때 평안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오늘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너만 쳐다보지 말고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바라보라는 뜻이에요. 그걸 욥이 깨달은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 나의 삶과 가정과 일터와 건강과 이 모든 것을 다 오병이어 같이 주님 손에 올려 드릴 때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양식이 되고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과 뜻대로 살았느냐?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열렸는가 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부터예요. 나의 고집도 좀 내려놓으세요. 이제 그만 내려놓을 때도 됐잖아요. 하나님하고 씨름도 이제 그만하세요. 우리 교회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잘 봐야 돼요. 굉장히 중요한 때에요. 같이 마음을 모으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기쁨을 맛보고 같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시간은 연대기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20, 30년 우리는 그걸 중요하게 여겨요. 또 실제로 중요해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결정적인 시간이에요. ‘카이로스라는 시간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돌리는 순간에 놀랍게도 이제까지의 실패와 허물과 고통과 눈물이 하나님 안에서 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변화돼요.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돌아설 때 나의 과거를 하나님이 다 회복시켜 주셔요.

욥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기 중심, 축복 중심의 신앙관을 깨뜨리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 속에 자기의 삶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이 갑절의 축복을 주셨어요. 여기서 갑절의 축복이란 단순히 물질을 배나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바로 섬으로 말미암아 삶이 더 넉넉해지고 풍성해졌다고 하는 거예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내 자식 잘 되는 것 등등을 더 구하지 마세요. 이미 부모세대보다 넉넉하게 잘 살고 있는 거예요. 성경이 말한 대로 더 이상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구하지 말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그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필요를 다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맛봄으로 말미암아 꼭 붙들어야 할 영원한 은혜를 놓치지 않고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