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07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후 3:12-18)
성경본문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나라의 아파트의 역사를 보면은 1958년 서울 종암동에 시작한 아파트가 효시입니다. 1964년에는 마포에 아파트 단지가 생겼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파트는 지역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다 1970년 본격적으로 강남이 개발되면서 '현대아파트' 이제는 기업이름이 붙었어요. 1990년대에 분당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더 다양해지고, 더 복잡해지면서 '엘지수지아파트' 기업과 지역이름이 결합된 형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하나의 상품이 되기 시작한 것은 IMF이후에 건설회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 경기를 살려보려고 분양가를 자율화하고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경쟁이 심화됐습니다. 그때부터 드디어 아파트에도 브랜드가 붙기 시작했어요. 오늘날 아파트를 선택하는 소비자들의 기준은 어떤 투자가치, 교통, 조건 이런 것보다도 압도적으로 브랜드를 보고 선택한다고 하는 거지요. 그럴 때 가격 프리미엄도 있고 또 하나 어떤 아파트에 산다 라고 하는 것이 주는 사회적 신분 상승효과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 만든 브랜드 하나가 잘 지은 아파트 열 채보다 낫다.' 그 중에 하나 고객만족도 1위가 삼성 래미안 아파트예요. 처음에 그 이름이 잘 외워지지가 않더라고요. 어떻게 저렇게 지었을까? 우리가 한자로 미래할 때 래來자를 쓰고,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고, 안녕할 때 안安자를 써요. 미래지향적이고, 아름답고, 편안한 아파트 그런 뜻이에요. 이름이 좀 이상해요. 그런데 이름이 이상해도 괜찮아요. 삼성이 지었으니까, 바로 이거잖아요. 믿기 때문에 마음을 주는 것이지요. 사실은 교회야말로 사회에서 그런 신뢰를 얻어야 되는 거지요. 단순히 신앙에만 플러스(+) 신뢰가 아니라 경제도 신뢰가 무너지니까 출렁거리는 거예요. 정치도 신뢰의 문제예요. 특별히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전도전략 차원에서 이 신뢰라고 하는 것 브랜드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연일 뉴스에 보도 되듯이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 문제가 굉장히 심각해지고 있지요. 소위 그런 경우를 '승자의 저주'라고 얘기해요. 도요타가 드디어 미국에 GM 제너럴모터스를 따돌리고 세계 제1위 자동차업계로 막 발돋움하면서 그 부품을 일본 내에서 다른 여러 나라로 다 하청을 준거에요. 전략이 1위를 고수하려고 질보다 양에 치중했던 거예요. 그러면서 그만 일본이 자랑하던 그러한 질적인 완성도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승자의 저주'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교회에 여러 가지 좋은 소문이 나는 건 중요하지요. 그러나 먼저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해봐야 되지요. 신앙에도 그래프가 있어요. 어떤 분을 보면 열심히 신앙생활 합니다. 좋은 이미지를 주지요. 또 어떤 분은 성실합니다. 어떤 분은 아주 지혜롭습니다. 또 세련된 교회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거는 저 문을 건너서기 전까지의 일이에요. 문을 건넌 후에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돼요. 하나님께서 어떤 신앙을 찾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십자가에 은혜가 있어요. 이걸 모르면 안 돼요.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라고 하는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나를 봐야 돼요. 어떤 관계로 봐야 되는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아시지요? 그가 40대에 그만 암살당한 비운의 대통령이었기에 우리의 뇌리 속에도 강하게 남아 있어요. 그런데 그가 남긴 여러 사진 중에 한 장을 제가 잊을 수 없어요. 대통령 집무실에 어린 아들이 아빠 테이블 위에 턱 올라가 앉아 있어요. 그리고 아빠는 고개를 숙이고 그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애가 지금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면서 부자가 서로를 보는 그러한 장면이 담겨있는 사진이에요. 여러분 대통령 집무실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어요? 어림없는 얘기죠? 또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을 때 여러분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온종일 단장을 하고 들어가지 않겠어요. 무슨 얘기가 나올는지 긴장을 하고 듣지 않겠어요? 그러나 적어도 어린 아들이 자기 아빠가 일하는 그 사무실 책상 위에 앉아서 아빠하고 이야기 하는 그 장면에서는 그런 긴장감은 전혀 없어요. 너무 행복하고, 너무 밝고, 너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게 바로 은총이라는 거예요. 오늘 성경이 말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수건을 벗은 얼굴로 나아가라' 여기에는 출애굽기 34장에 스토리가 담겨 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어요. 그래서 모세 홀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받아요. 그리고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말씀을 전해주려 할 때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어요. 모세얼굴에 너무나 광채가 났기 때문에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가 감히 두려워서 당신의 얼굴조차도 우리가 바로 바라볼 수 없사오니 그 얼굴의 광채를 가려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얼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 그 얼굴에 너울을 써서 광채를 가렸다. 왜?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구약적인 사고방식이에요.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해요. '그 수건을 벗고 너울을 벗고 하나님께 나아가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자에게 이런 복이 열린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던 모세의 너울을 벗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는 히브리서 4장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놓은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둘로 쫙 갈라졌어요.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
여러분 우리 신앙은 열심히 일하기 이전에 첫째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중요해요. ‘하나님’ 하고 내가 부를 때 과연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그분이 두려우신 분으로 떠오른다면 아직 건강한 신앙은 아니에요. 그런데 말이예요. 사람은 별수 없어요. 어려서 자라날 때 아버지가 무서웠다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하나님의 이미지는 내가 두려워했던 아버지의 이미지와 겹치게 돼요. 제가 감사하는 게 뭐냐 하면, 저희 아버님은 참 부드러우신 분이었어요, 어지간해서 화를 안 내시는 분이었어요, 끝까지 들어주시는 분이고 자그마한 일이 있어도 격려해 주시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그래도 건강한 편이에요. 그게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 줄 몰라요. 두 번째는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나의 모습, 그게 내가 믿음으로 붙들어야 할 나의 모습이에요. 사람이 자라나면서 누구나 다 실패도 있었어요, 좌절이 있었어요, 상처가 있었어요, 눈물이 있었어요. 그게 다 내 마음의 몸에 새겨져 있어요. 그것을 씻어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셔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요. "나는 너에게서 화려한 것을 찾지 않는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승리를 찾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상한 마음이라고 했어요. 나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 외에는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내어 놓는 것, 수건을 벗은 얼굴로 나아간다는 게 무엇입니까? 나의 허물과 실패와 상처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어린아이같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니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주님을 본다' 그런 표현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면 안돼요. 오늘날의 거울과 2000년 전 사도 바울 그 시대에 거울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 시대 거울은 사람 모습이 그렇게 깨끗하게 보이지 않아요. 희미해요. 그럴 수밖에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 주님을 만나는 그날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같이 밝게 보리라." 그 당시에 거울이라는 건 그냥 대충 보는 거예요. 희미했단 말이에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는 분들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어요. 다 내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거는 너무 부족하지 않는가? 열심도 없고, 그러나 기억하세요. 오늘 놀라운 말씀이에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주의 형상을 바라본다' 희미하게나마 주님을 바라본다는 건 굉장한 사건이에요. 희미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에요. 변화의 시작이에요. '나는 왜 이럴까?' 라고 하는 때로는 그것이 좀 심해져서 자기를 정죄에 빠뜨리는 그 정죄감까지도 알고 보면 새로운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에요. 열망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까? 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변화의 시작이에요.
여러분, 인터넷에서 그거 보셨나 모르겠습니다. 패트릭 휴즈(Patrick Hughes)라고 하는 대학생 이야기예요. 태어날 때 눈이 없었어요. 눈으로 못 보는 게 아니라 눈의 알맹이가 없었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첫아들을 기다리던 부모들이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참 고통스러웠겠지요. 그런데 어찌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를 젊은 부모가 피아노 앞에 앉혀요. 그리고 '띵똥띵똥' 하는 것을 들려줘요. 그리고 애가 건반을 가지고 장난하게 해요. 그러더니 돌이 되기 전에 애가 이제 기억해서 쳐요. 미미미자로 끝나는 말은 이렇게 요런 정도로 쳐요. 두 돌이 되기 전에는 드디어 아빠가 "you are my sunshine 한번 쳐봐." 그랬더니 어설프지만 치는 거예요. 날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 피아노를 가지고 놀아요. 드디어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요. 지금 대학생이에요. 대학생인데 이제 피아노만 연주하는 게 아니고 트럼펫도 잘 불어요. 그래가지고 루이벨 대학에 다니는데 루이벨 대학에 고적대가 있어요. marching 밴드 아니에요.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불어 대는 거 아니에요. 거기에 트럼펫을 해요. 그 아버지가 그 아들과 함께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바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밴드의 일원이 되어가지고 연습을 해요. 그에게 물어요. "장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랬더니 "저는 더 이상 저의 조건을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더 많은 가능성을 펼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나의 영웅입니다. 그를 통해서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다니지요. 아들은 꼼짝 못하니까.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어가지고 그와 함께 생활을 하는 거지요. 여러분 희미하지만 중요한 거예요. 희미하지만 주님을 계속 바라볼 때 거기에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말씀을 주목해서 계속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거예요. 중학생에게 이런 시험문제를 냈어요. '오복이 뭐냐?' 그랬더니 이렇게 답안지에 썼어요. '초복, 중복, 말복, 8.15광복, 9.28수복' 우리 동양적으로 오복은 '수壽' 오래 사는 것, '부富' 부자로 사는 것, '강녕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평안한 것, '유호덕攸好德' 덕을 베푸는 것, 선행을 하는 것, '고종명考終命' 편안히 죽는 것, 그게 오복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복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이미지로 우리의 삶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성화라고 얘기해요. 거룩해진다. 그런데 교회가 얘기하는 어떤 규칙을 열심히 지키는 것 그거 잘하는 거지만 그 안에 더 본질적인 게 있어요. 지키는 것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의 발판일 뿐이에요. 주님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 그 열애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끝까지 눈길을 놓치지 않잖아요. 서로를 바라보잖아요. 그게 사랑이잖아요. 신앙생활은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겨자씨 같은 믿음 이야기하잖아요. 겨자씨는 정말 작은 씨앗이에요. 그러나 제법 그것이 자라가지고 나무를 이루듯이 자그마한 시작을 귀하게 여기고 크게 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여러분 자그마한 시작 소중한 거예요.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에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이루시리라' 이게 하나님의 열망이에요. 주님을 계속 바라보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나아갈 때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드디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고난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올바로 해석하게 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그리고 오늘의 절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주신다. 이것을 먼저 경험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의 앞에 있는 것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희미한 것을 무시하지 마세요. 아주 소중한 거예요. 오늘 한 시간의 예배에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담겨있어요. 희미한 것으로부터 한걸음 나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그의 영광이 내게 내 마음을 비추게 돼요. 그래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어떤 분은 얘기해보면 말이 안 통하는 분이 있어요. 왜 말이 안 통하는가? 들은 게 너무 없으면 아무리 얘기해봐야 못 알아듣잖아요. 사람이 뭔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들은 게 있어야 새로운 지식이 들어올 때 그걸 연결해주잖아요.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오늘 하루 잘 들을 때 내일 듣는 말씀을 또 이해할 수 있어요. 오늘 놓치면 내일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거예요.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닥다리 하나 빠진 것쯤이야 조금 영차 하고 넘어 갈수 있어요. 그러나 사다리가 두 개만 빠져도 올라가기 힘들어요. 희미한 것으로부터 밝은 것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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