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08 제사와 효도 (고전 10:14-22)
성경본문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 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우리 한국 교회 초기에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술과 담배 피는 일, 그리고 조상 제사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100년 세월이 흐르면서 술 담배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선 건강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데 공감하고 있습니다. 조상 제사 문제는 상황이 좀 다르지요. 그것은 공동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따르게 되면서 그러한 관습을 끊어야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다고 했던 거죠.
이제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소수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술 담배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아직 제사를 지내는 경우일지라도 먼저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를 믿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순서를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잘 섬기고자 하는 효도를 담은 제사가 어찌 미신이냐 라는 의문과 그것으로 비롯되는 거부감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 원래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죠. 고려 말 혼란기에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는 이념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선왕조는 유교, 특별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사상이념을 가지고 있죠. 유교는 철저하게 현실을 다스리는 질서요 도덕윤리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논어 수리편에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괴이한 일들, 이상한 힘을 쓰는 이야기들, 신하가 왕을 뒤집어 엎는 문란한 일들, 귀신에 관한 일들은 나에게 묻지 말아라. 살아생전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은 후의 일을 알겠느냐고 이야기했지요. 철저히 현실적인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 통치이념이 될 때에 백성의 영적 욕구와 갈망을 외면할 수 없어 서서히 종교화되기 시작하죠.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윤리로 나라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질서였던 유교가, 서서히 밑바닥 민중들의 무속신앙과 결합하면서 종교화되고 미신화된 것입니다. 무당을 불러서 귀신을 내쫓고, 병을 치료하고 액운을 막는 신앙과 결합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자기가 살던 곳을 배회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제사양식이 들어오자, 신주를 만들면 거기에 부모의 영혼이 깃들게 되고 그들에게 봉양하면 자손들에게 복을 내린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든 유교든 어떤 의식이 반복될 때 종종 그 의식자체가 교리화되면서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여러분, 아이들이 재미있게 부르는 노래 아시죠.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아이들의 창의력을 길러주는 데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노래입니다만, 알고 보면 어른들도 본래의 의미를 놓치면 원숭이 똥구멍이 백두산이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한국교회가 부흥하면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인이 계속 늘어나니까 예배시간을 분리해서 드리게 된 거예요. 이제까지는 아침 11시에 예배를 드렸는데 9시 예배도 모입시다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떻게 9시에 예배를 드리느냐. 그렇게 까지 생각이 굳어지게 된 거예요.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자고 하는 거지만 우리 상황은 늘 변하지 않겠어요? 지금은 여러 번 예배 드리는 것이 보편화되어 아무도 그런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지만.
또 반대로 얘기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일 저녁 예배가 있었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를 다닐 때에 제 동생들을 다 데리고 주일 오후 5시 어린이 예배도 가고 수요일 오후 5시 어린이 예배도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서서히 어린이 예배부터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수요일 예배가 없어지더니, 지금 주일 오후 어린이 예배도 없어졌어요. 또 어른 예배도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교회보다는 드리지 않는 교회가 더 많아졌어요. 상황이 변하고 있는 거죠. 옛날에는 볼 게 별로 없었어요. 교회에서 영화를 한다든지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만 지금은 TV가 집마다 있고 방마다 있어요. 개인의 삶이 훨씬 더 복잡해졌어요. 그러므로 단순히 한 장소에 사람을 많이 모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올바른 신앙의 형태일 수는 없는 거죠. 어떡하든지 예배의 본뜻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죠.
정통파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지키고 있어요. 안식일 규례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요. 이스라엘에서는 호텔 엘리베이터가 안식일에는 층마다 서게 되어 있어요. 버튼을 누르는 게 허용되지 않아요. 노동이에요. 안식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안식일에는 모든 장치들을 다 타이머로 조정해서 자동으로 켜지고 꺼지도록 되어 있어요. 그들의 이론은 이거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한 가지라도 양보하면 마치 댐의 구멍과 같아서 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해요. 진주가 있어요. 많은 진주를 한 줄에 꿰어서 진주 목걸이를 했어요. 줄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주가 다 흩어지고 망가지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수천 년 전 형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거죠. 참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본뜻은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총을 기뻐하고 감사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병 든 사람이 있다. 안식일의 규례를 따르면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치료는 허용하지만 병이 낫는 치료는 허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이런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거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면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만약에 안식일에 나귀가 구덩이에 빠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주인이 당장 끄집어내지 않겠느냐. 하물며 나귀보다 천만 배 귀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 당하는데 어찌 안식일이라고 고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병자를 고치셨어요.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고 생각이 얼마나 굳어져 있는지, 그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전통적인 안식일 규례를 무너뜨리려 하는 예수를 죽여야 된다며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어요. 한 사람은 고침 받았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악한 길로 나아갔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규례의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을 창조적으로 생각해야 돼요. 그런데 창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기계적인 것보다 더 어려운 거예요. 기계적이라는 것은 그저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돌아가잖아요. 예배만 해도 그래요. ‘오늘 내가 그래도 늦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았으니 됐다’ 라고 생각하는 분은 스스로를 기계적인 상태로 내버려두는 거예요. 아니요,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육신의 복잡한 일에 갇혀 있던 생각의 허물을 다 씻어내고, 눈 앞에 열리는 하늘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깨닫고 결단하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의지와 나의 의지가 묶어져서 새로운 삶을 펼쳐나가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제사보다 긍휼이다, 사랑이다. 제물보다 온전한 순종이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제사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첫 번째는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성자도 아니에요. 위인도 아니에요.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니에요. 모든 인생,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마태복음 22장에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두개인들, 영혼의 부활을 부정하고 영 자체를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나와서 아주 절묘한 문제를 던지지 않습니까?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큰 형이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농경사회에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게 있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있었잖아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서 형의 집안을 세워준다. 그 규례를 따라서 둘째가 형수를 취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둘째가 먼저 죽었어요. 이렇게 하면서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나중에 인간이 부활한다면 그 집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오해하였도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천사들과 같으니라.’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몸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시고 생명을 이어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부모 형제 자매가 된 거예요. 그 관계는 소중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면 아마도 완전히 새로운 관계 속에 갈 겁니다. 살아생전에 부모형제였던 것은 사실이고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사랑이 넘치는 삶을 다 기억할 것입니다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와 관계가 올 것이라는 것이에요. 죽은 조상의 영혼이 살던 곳을 배회하다가 음식을 준비하고 절을 하면 찾아와서 그것을 먹고 마신다며 밥과 국을 준비하고 술을 붓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꿈에 조상이 나타났다고 흔히 그렇게 얘기하죠.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영혼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죠.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2천 년 전 당시에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가 유교의 효 윤리와 무속신앙이 결합한 형태인 것을 기억하고 잘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조상제사는 윤리적 요소가 흐려졌어요. 죽은 조상을 잘 섬김으로 자손들이 복 받는다고 생각해서 명당을 써서 부모의 무덤 자리를 찾는다든지 하는 다분히 미신적인 형태로 흘러간 것이 오늘의 현실이죠. 사랑과 용서라든지 정의와 진리라든지 하는 윤리는 많이 흐려졌어요.
어떤 분은 이렇게 묻습니다. “성경에도 제사가 있던데요.” 성경에도 제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제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하는 것이죠. 또 성경의 제사는 제물을 잡아서 그것을 죽여서 피를 뿌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 다 불태워 드림으로 회개와 속죄의 제사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제물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의 제사는 더 이상 드리지 않아요. 왜 그러냐?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였어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좍 찢어져 나뉘었어요.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제사를 드리지 않아요. 간혹 기도할 때에 혹시 하나의 표현으로 쓰지만 더 이상 제단이나 제사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단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완전히 드리셨으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려요. 제사는 이제 예배가 됐어요.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이 의미를 더 살리기 위해서 성찬식을 하는 거잖아요. 물론 가톨릭에서는 말씀보다도 미사 성찬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말씀으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찬으로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죠. 예수께서 단번에 자기의 삶을 제물로 드리셨다. 구약에는 죄를 범하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지고 와서 제사장 앞에 죄를 다 고한 다음에 제물에 손을 얹을 때에 그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옮겨진다고 생각했어요. 제물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태워버림으로 내 죄사함을 받았던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제물로 삼으셨다.
‘현길언’이라고 하는 제주 출신의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의 단편소설 <사제와 제물>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 노동운동 지도자가 있어요. 회사측에 대항해서 노동쟁의를 주도하고 있어요. 우리가 아시다시피 70, 80년대에는 국가를 상대로 하거나 회사를 상대로 한 아주 극렬한 노동투쟁들이 있었죠. 거기 한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것들을 많이 보아왔어요. 일제 말에 교장선생님이 자기 학교 선배가 징병되어 나갈 때에 그를 많은 학생들 앞에 세워 놓고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천황폐하를 위하여 이렇게 전쟁터에 나가니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 이렇게 높였던 거죠. 어린 마음에 그게 부러워서 나도 저 형과 같이 저렇게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를 놓쳤어요. 전쟁이 끝났어요. 그 형은 결국 죽어서 유골로 돌아왔어요. 기억해보니 우리 사회는 선동하는 자들에 의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거죠.
진정한 사제는 누구냐? 다른 사람을 선동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먼저 제물로 내어놓을 때에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 아주 인상적인 소설이었기에 기억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고 제물로 삼고 자기가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지혜 있는 여러분에게 이 말을 전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행하십시오.’ 제사에 담겨있는 미신적인 모든 것들을 정리하세요. 이제는 사회가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분이 지혜롭게 처신하고 주도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효도는 어떻게 되느냐? 성경적인 효도는 에베소서 6장1절에 있어요.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교회에서는 추도예배를 드리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추도예식에 관한 지침과 안내문을 우리가 준비해놨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하나씩 가져가셔서 활용하시면 되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효도는 살아계실 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를 위해 기도하고 종종 안부전화를 드리는 거예요. 그게 효도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발 더 나간 효도는 용돈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효도를 하되 아내의 손길을 통해서 하는 사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그런데 영어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지요. 영어에는 지름길이 없어요. 열심히 공부해야 영어를 잘 하듯이 효도도 마찬가지에요. 평소에 잘해야 돼요. 평소에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섬기고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기쁘게 해야 그 마음이 열려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지혜롭게 남편과 아내를 위하고 그 마음을 사서 그 손길을 통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드리는 것, 그것이 성경적인 효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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