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28) 2) 바울의 신앙경주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20

" 바울의 신앙경주①"

빌립보서 3장 12~16절
석원태 목사


  3) 바울의 신앙 경주(빌 3:12-16)

  바울 자신을 참 할례당이라고 했다. 그 내용은 성령으로 봉사(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결코 육체를 신뢰하지 않음(빌 3:3)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뢰할 만한 육체적 특권들을 모조리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다. 그 큰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 때문이라고 했다. 그 고상한 지식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의 지식이요, 우리의 현재적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득하는 지식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아는 지식이고, 또한 최후 영화로운 부활에 이르는 지식이라고 했다.
  이제 빌립보서 3장 12-16절의 부분에 와서는 바울 자신의 새로운 도약을 말하고 있다. 곧 신앙의 전진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소유한 후에 새로운 추구를 위하여 출발하고 전진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다.

  첫째, 바울의 신앙 경주는 그 주체가 그리스도 예수였다.

  빌립보서 3장 12절 후반절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다. 여기 ‘좇아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오코’(diw,kw)인데, 흔히 ‘박해’, ‘핍박’ 등에 사용된 말로(마 5:10, 12, 계 12:13), 마치 사냥개가 토끼를 사냥하는 경우를 두고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본문의 경우는 바울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 경주자의 모습으로 말한 것이다. 전인적인 자기 추구, 결사적인 추구, 용감한 추구를 말하는 것이다. 불퇴적이고, 불사조적인 자기 전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자기 전진의 추구는 자신의 결심이나, 힘이나, 용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메섹 박해의 도상에서 겪은 생생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초자연적인 빛 속에서 눈이 어두워져 땅에 엎드려져 버린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다.
  바로 그때부터 바울 자신의 추구는 멈추어지고, 끝나 버렸다.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 의하여 안수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알려 주신 말씀으로 바울 자신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택한 나의 그릇’이란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행 9:1-18).
  그때부터 그는 주님에게 붙잡혔다. 자기가 주님을 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붙잡은 것이라고 했다. 주님은 바울을 포로처럼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세계 복음화를 위한 주님 자신의 비전과 목적을 알려 준 것이다. 그래서 그후로 바울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과 목적과 계획을 실현시키는데 자기의 전 삶을 추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포로로 전진한 것이다.
  주께서 바울에게 행한 주권적 행사였다. 일방적 행사였다. 선수적 행사였다. 초자연적 행사였다. 선택적 행사였다. 불가항력적 붙잡힘이었다. 주께서 그에게 행하신 은혜였다. 그래서 그 날 그 시간 이후로 그의 삶의 B. C.는 끝이 났고, A. D.가 시작되는 새 원년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잡았을 때, 바울은 주님을 붙잡을 수 있었다. 바울이 주님께 붙잡히는 방법은 ‘믿음’이었다(고전 12:3). 그 믿음은 그의 말씀을 들음에서 났다(롬 10:17, 행 13:48). 지음받은 사람은 붙잡혀야 살 수 있는 ‘의존적 피조물’이었다. 그것이 바로 에덴에서의 아담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붙잡혀 있지 않고, 마귀에게 붙잡혔을 때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든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다.
  ‘내가…예수 그리스도께 잡혔다!’ 실로 놀라운 독백적 간증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그의 서신들의 서두 인사에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의 종이 되고,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갈 1:1).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시는 주님 자신의 직접적 계시로 말미암아 예수에게 붙잡힌 예수의 종, 예수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적 목적과 가치와 내용과 방향이 모조리 주님의 것이었다.
  비단 사도 바울 뿐만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잡힌 사람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어떤 목적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의 꿈’이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붙잡고, 자기의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쓰시고 있다. 혹은 농부로, 혹은 광부로, 혹은 어부로, 혹은 정치인으로, 혹은 문화예술인으로, 혹은 교육자로, 혹은 실업인으로, 혹은 과학자로, 혹은 공무원으로…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예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 의미 있는 존재들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예수에게 붙잡혀서 움직이는 예수의 영예로운 종들이요, 포로들이다.
  그 다음 오직 내가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다.
  잡힌 바 된 ‘그것’이 무엇일까?
  최우선적인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은 자신의 구원이다. 그 다음에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자기 사명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무의미한 삶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타고난 그리스도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경주하는 인생이다. 우리의 신앙 경주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나를 붙잡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엔 그 어떤 운명이란 말이나 숙명은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