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26) 2) 그리스도를 위한 포기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19

" 2) 그리스도를 위한 포기(빌 3:7-11)"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1)
빌립보서 3장4~11절
석원태 목사


  3.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린 바울의 특권들(빌 3:4-11)

  1) 바울의 육체적 특권들(빌 3:4-5)

  2) 그리스도를 위한 포기(빌 3:7-11)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1)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J. Calvin)은 인생을 풍랑 중에 있는 배에 비유했다.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배 안에 있는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중해도, 사람의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서는 그 모든 것들을 바닷물 가운데 던져 버려야 한다. 그와 같이 최악의 풍파 가운데 처한 나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의 지식(생명)을 얻으려면, 이 세상에 좋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려야 한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라고 하였다.
  지금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영감은 거짓 교사, 이른바 개들, 행악자, 손 할례당을 향한 경고와 경계를 한 다음에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영적으로 참 할례당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은 언제나 육체주의로 임한다고 했다. 만약에 육체를 신뢰한다고 하면 바울 자신의 사울적 과거를 누가 따라오겠느냐고 했다. 그는 실로 신뢰할 만한 7대 자랑의 특권이 있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러한 육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특권들과 결별한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지난날(B. C.)에는 ‘내게 유익하던 것들’이라고 했다. 그것들을 포기한다고 했다.

  (1) 어느 정도의 포기였던가(포기의 상태)?

  ① 해로 여겼다고 했다.
  빌립보서 3장 7절 중에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라고 했다.

  ②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빌립보서 3장 8절 하반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라고 했다. 이는 생각조차 하지 아니함을 뜻한다.

  ③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다.
  빌립보서 3장 8절 하반절에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했다. 여기 배설물 ‘스퀴발론’(sku,balon)은 ㉠ 식탁에서 내어버리는 부스러기, 또는 분토들을 의미 한다. 이것들은 다 개들의 식물이다. ㉡ 우리 몸에서 나오는 소변, 대변, 기타 노폐물들이다. 이것들은 두 번 다시 생각조차 아니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더러운 것들이다. 부정한 것들이다. 전혀 생명에 유익이 없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비유대로 그물에 가득한 것들 가운데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린다고 하심과 같다(마 13:48).
  바울은 신뢰할 만한 육체적 특권들을 이렇게 다 해로 여기고, 다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잊어버리고, 나아가 배설물같이 여겼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상 바울 인생에 있어서 참된 가치관의 변화요, 판단의 변화였다.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는 포기를 두고 한 말이 된다. 칼빈(J. Calvin)은 바울의 이러한 모든 포기는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 체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점진적 포기가 아니라 완전 포기, 결정적 포기, 영원한 포기를 의미한 것이다.

  (2) 그 큰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는 3장 7절에서 말한 ‘그리스도’를 다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다. 참으로 중대한 이유이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본문이 중심이 되어서 그 다음에 따라오는 중대한 지식, 곧 고상한 지식의 내용을 만나게 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의 뜻이다.
  ‘안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야다’이며, 헬라어 번역은 ‘기노스케인’(ginoskein)인데, ① 몸으로 아는 체험적 지식을 의미했다.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경우와 다른 뜻이다. ② 그것은 어떤 원리에 대한 지식이나, 어떤 사실이나 이론적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경험적 앎을 가리킨다.
  그래서 구약의 경우 ‘안다’는 이 말은 부부관계, 성적 교제의 뜻으로 사용했다. 창세기 4장 1절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했다. 이 경우 동침은 남녀가 서로의 비밀을 아는 경우를 뜻했다. 남자와 여자(부부)가 서로 상대가 갖고 있는 비밀을 아는 것을 뜻함이다. 그것은 경험적 앎이고, 비밀적 앎이다. 독점적 앎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한 경우, 어떤 철학적 이론이나, 과학적 논리나, 증명에 따른 앎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적 인격을 체험하는 인격적 앎, 영적 앎, 신비적 앎, 경험적 앎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비유할 때,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신랑과 신부(처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는 신비적, 영적 앎을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다. 여기 지식 ‘그노시스’(gnw/sij)는 단지 이지적 지식을 의미함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앎으로’ 체득된 지식을 말함이다. 그 지식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다. 곧 다시 말하면 차원적인 지식, 뛰어난 지식(으뜸), 절대적인 지식, 생명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의 내용이 무엇일까?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의의 지식이다(칭의의 지식).
  빌립보서 3장 9절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했다.
  바울이 경험한 고상한 생명의 지식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의, 은혜로 받은 의라고 했다.
  로마서 3장 21-22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다.
  로마서 3장 28절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 결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예수는 죄인의 칭의를 위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였다(롬 3:21).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로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지은 죄를 사유하시고, 우리의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했다고 했다(롬 3:21-31). 그러므로 바울은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롬 3:30)고 했다.
  빌립보서 3장 9절의 중심점은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의’(Righteousness)는 ‘디카이오수네’(dikaiosune)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죄가 없는 무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의 피로 우리 죄를 없이 해 주고, 믿게 함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재판적인 공의로운 선언을 하게 되신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효력을 발생하는 유효적 선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선포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의 육신적 모든 특권들, 이른바 육신을 다 해로 여기고(빌 3:7),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빌 3:8),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빌 3:8), 심지어 배설물로 여긴다(빌 3:8)고 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8절 하반절에 「그리스도를 얻고」, 3장 9절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은 바로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이다. 그 고상한 지식의 내용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을 때, 예수 속죄 공로를 보시고, 하나님 편에서 ‘죄 없다’고 무죄를 선언해 주는 이것이다. 실로 고상한 지식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바른 관계, 정식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3-24)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을 체험했을 때, 자기에게 있었던 신뢰할 만한 세상적이요, 인간적인 모든 특권들이 배설물처럼 더럽게 여겨지고, 염증이 나고, 구역질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다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적 간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자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다(마 13:44).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자에게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명령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버리면(희생) 100배나 받고, 영생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은 인간적 산물이나 종교적 자율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빌립보서 3장 9절 하반절에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했다. 바로 초자연주의적 산물, 은혜의 산물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도는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 6:33) 최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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