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37) 빌립보 교회의 선교헌금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28

"Ⅳ. 결론(빌 4:10-23)"
빌립보 교회의 선교헌금
빌립보서 4장 10~23절
 
석원태 목사


  Ⅳ. 결론(빌 4:10-23)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영감의 편지는 이제 그 마지막 부분에 이르고 있다.
  이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빌립보 교회의 선교 헌금(연보)(빌 4:10-20),
  두 번째는 마지막 인사와 축도를 기록하고 있다(빌 4:21-23).

  1. 빌립보 교회의 선교 연보(헌금: 빌 4:10-20)

  본문은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봉사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칭찬(빌 4:10-20)이다.
  이 부분의 큰 주제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상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또 다른 간증이기도 하다. 그는 빌립보서 1장 12-30절에서 자기가 투옥된 사실을 말할 때에도 바울 자신의 생사관에 대한 간증을 토로한 일이 있다.
  다시 그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빌립보 교회가 자기를 위하여 물질적 봉사를 한 사실에 대하여 주 안에서 크게 감사하면서 곁들여 자신의 자족한 삶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1) 다시 싹이 나게 된 기쁨(빌 4:10)

  먼저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봉사는 주 안에서 크게 기쁜 일이라고 했다. 다시 싹이 남을 기뻐했다.
  빌립보서 4장 10절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이라고 했다. 기쁨은 빌립보서의 특징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이미 생각했다(빌 1:18, 2:17, 18, 28, 3:1, 4:4).
  투옥된 전도자 바울은 자신이 세운 빌립보 교회로부터 보낸 물질적 선물을 받고 ‘크게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기쁨은 어떤 세속적 물질의 쾌감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주 안에서」의 기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들의 물질적 교제는 적어도 자원적이었다.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투옥되어 있는 자기를 위하여 연보를 보내온 것이 바울 자신의 어떤 육신적 욕구를 채워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물질적 봉사의 행위가 「주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때 빌립보 교인들의 주를 향한 신앙의 선행 앞에 크게 기뻐한 것이다.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의 물질적 봉사는 바로 저들의 신앙 성장의 열매를 보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4장 10절 중에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했다. 아마 빌립보 교회가 처음에 바울을 위하여 연보를 보내오다가 얼마 동안 중단되었던 것 같다. 이제 다시 그 물질적 봉사가 재개되는 일을 두고 ‘다시 싹이 난다’는 비유적 표현을 하고 있다.
  추운 겨울에 나오지 못하던 싹이 해동과 함께 봄이 올 때 다시 새싹이 남과 같은 일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가 왜 잠간 동안 그 물질적 봉사를 중단 하였을까?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물질적 봉사가 잠간 중단되었던 것은 저들에게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전도자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러 사정들을 익히 알고, 도리어 저들의 형편에 서서 변호를 해 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격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중대한 것은 「다시 싹이 남」이다. 죽은 나무에는 봄이 없다. 다시 볼 수 있는 싹이 없다. 그러나 살아 있는 나무는 봄이 있다. 싹을 내고, 움을 내고, 꽃을 피우는 재생의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빌립보 교회는 이미 저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르는 구원 소망의 확신이 자리 잡은 교회였다(빌 1:6).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 바울은 저들에게 ‘다시 싹이 나는 때’가 오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기대했던 ‘싹’이 났을 때 그는 ‘크게 기뻐한다.’고 했다. 이 싹은 믿음(구원)에서 나는 ‘사랑’이다. 복음을 사랑하는 싹이다. 주의 사자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싹이다. 저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구원 신앙은 언제든지 때가 오면 ‘싹’이 나게 할 수 있는 가능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 속에 이미 말씀의 씨, 곧 구원의 복음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경우의 외적인 여건들 때문에 시련의 과정을 겪었지만 결국 사랑의 싹을 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했다. 왜 기회가 없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기회가 다시 왔을 때 ‘다시 싹이 난다.’는 사실에서 바울은 크게 기뻐했다.
  여기 ‘다시 싹이 났다.’는 말은 ‘소생시키다’, ‘다시 꽃이 피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재생, 재기, 재활을 의미한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위해 여러 번 물질로 그의 선교비를 충당해 준 교회였다.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고 했다.
  그가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이 쓸 것을 보내어 주었다고 했다(빌 1:25). 그 어간에 얼마간 바울을 위한 빌립보 교회의 선교비가 중단된 것 같다. 바울은 이 사실을 ‘기회’가 없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바울을 향한, 아니 주를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에 ‘다시 싹이 났다’는 사실이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할 일이 되었다. 중단된 듯 했던 선교비가 재개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를 향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다시 싹이 나는’ 축복의 때가 있어야 한다. 재기, 재생, 재활하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 큰 이유는 우리에게 복음의 씨, 말씀의 씨, 생명의 씨, 다시 말하면 ‘구원의 생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구원’하심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시 싹이 나는’ 축복의 때를 받아야 한다.
  주일 성수의 싹, 부모 공경의 싹, 십일조와 물질 봉사의 싹, 다시 기도하는 싹, 다시 전도하는 싹, 다시 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싹이 나야 한다. 다시 충성하고, 봉사하는 싹이 나야 한다.
  ‘새싹’의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것은 부활의 세계가 아닌가? 움을 터뜨리고, 순을 내는 새싹의 세계는 실로 신비롭다. 거기에는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다. 미래가 있고, 기대가 있다. 웃음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생각했던 것이 다시 싹이 남 때문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교역자의 즐거움이다.
  실로 이 싹은 주를 다시 사랑하고, 교회를 다시 사랑하고, 주의 사자들을 다시 사랑하고, 주의 복음 선교를 다시 불붙이는 성화적 진보를 갖게 되는 축복이 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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