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38) 빌립보 교회의 선교연보②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32

"빌립보 교회의 선교연보"
복음의 고난에 동참한 좋은 일
빌립보서 4장 11~14절
 
석원태 목사


 Ⅳ. 결론(빌 4:10-23)

  1. 빌립보 교회의 선교 연보(헌금: 빌 4:10-20)

  1) 다시 싹이 나게 된 기쁨(빌 4:10)

  2) 복음의 고난에 동참한 좋은 일(빌 4:11-14)

  이 부분의 결론은 빌립보서 4장 14절에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앞 절에서 주의 종 바울이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한 사실을 생각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생각하던 것이 다시 싹이 난 일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가 얼마간은 기회가 없어 바울을 향한 선교 헌금을 중단하였다가 다시 재개한 일을 두고 ‘다시 싹이 났다’고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다시 생각하여 선교 연보를 보낸 일은, 복음의 고난에 동참한 차원적인 축복이라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착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빌립보서 4장 11절로 13절에서 바울은 결코 빌립보 교회가 다시 시작한 선교 연보, 곧 물질 때문에 살고 있는 자가 결코 아니라고 변호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그는 두 가지 경우에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1) 그 하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운 부요라고 했다.

  빌립보서 4장 11절 하반절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다.
  여기 자족 ‘아우탈케스’ (auvta,rkhj)란 ‘스스로 충족함’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 노자의 이른바 ‘은허주의’, 곧 자연으로 돌아가서 만족하는 사상은 아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때 풍미했던 헬라의 스토익 철학파가 말한 대로 ‘사람은 모든 일에 자기에게 만족하며 자기 뜻대로 행하며 모든 환경의 힘을 초월하여 항의하라’는 사상도 아니다. 이 자족은 당시 헬라 스토익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도덕상 최고의 목표였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는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야말로 가장 부한 자라고 했다. 자연이야말로 부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저들의 자족의 근원은 인간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자족은 하나님 중심의 자족이었다. 마치 다윗의 자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하는 자족을 말한다(고후 9:8, 빌 1:21).
  빌립보서 4장 12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비천’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비천 때문에 낙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풍부’에서도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풍부에 처해 있을 때 교만하거나, 자긍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물질을 의지하거나 남을 멸시치 아니하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배부르며’, ‘배고프며’, ‘풍부하며’, ‘궁핍한’ 모든 일에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돈에 대해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고 하였다.「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약할 때 감사하고, 병들 때 주의 능력을 체험하고, 자신이 약한 그때 곧 강해짐을 배웠다고 했다(고후 12:8-11).
  그는 시간과 장소, 곧 어떠한 환경과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 배움의 학교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스도의 가난과 부요,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죄, 그리스도의 인내, 그리스도의 축복, 그리스도의 약속, 그리스도의 현장 임재 등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다.
  그것은 ‘체험적인 배움’, ‘현장 체험의 배움’이었다.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하였다. 이 말을 다시 번역하면 ‘어디서든지’, ‘무슨 일에든지’ 자족하는 처신을 배웠다는 말이다.
  이런 ‘자족의 부요’는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비(연보)를 보내기 전에 벌써 주 안에서 누리던 자신의 부요, 곧 자족하던 풍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풍요는 특별한 은사가 아니고,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배워서 체득되어지는 것이다.

  (2) 그 두 번째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능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크롬웰은 이 본문을 외우면서 운명했다고 하였다.
  여기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누구인가? 두말할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편지할 때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를 능하게 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헬라 철학자(스토아학파)들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 의해서 만족(자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영감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만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저들은 모든 정죄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다(롬 8:1-2).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의 실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 ‘가능’의 내용이 무엇일까? 그것은, ① 사죄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마가복음 2장 10절에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였다.
  ② 구원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거저 주시는 은혜의 힘이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즉시 허락되는 구원의 권세이다.
  ③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이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다.
  ④ 주께 기도함으로 얻는 축복의 능력이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주께 주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온갖 가능의 열매들을 받는, 이른바 축복의 힘을 받는 것이다.
  ⑤ 성경을 읽고, 듣고, 깨닫고, 행할 때 능력을 받는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였다.
  ⑥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받는다. 마가복음 16장 15-18절에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였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능력은 ‘임마누엘’ 약속의 응답이기도 하다(마 28:20).
  이것이 바울이 배워 체득한 자족의 비결이다. 그는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을 체험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였다. 이는 간질로 고생하던 한 어린아이의 아비가 예수께 나아와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는 소청에 주님께서책망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가능! 이것이 자족의 비결이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낱말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세인트헤레나 섬의 유배지에서 자신은 실패자요, 나사렛 예수는 성공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헬라의 스토익학파들은 인간의 수양으로 얻어지는 능력을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가능’을 믿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에게 보내준 선교연보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중에, 자기의 감사는 어떤 물질적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간증하고 변호한 내용이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연보를 보내오기 전에도 결코 궁핍하지 않고 부요하였다는 간증이요 변호였다. 그 부요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이고, ‘자기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자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의 비결’을 체험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4)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선교연보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선교연보는 바로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한 것에 대한 축복이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선교연보는 주님이 ‘주릴 때에 가져온 먹을 것’이었고 주님이 ‘목마를 때에 마시게 된 음료’였고, 주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한 일이었고, 주님이 ‘벗었을 때에 입힌 옷’이었고, 주님이 ‘병들었을 때에 돌아본 것’이었고,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사랑의 행위였다고 하였다(마 25:35-36).
  실로 빌립보 교인들은 오른편에 있는 양들이었고, 의인들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었다(마 25:34). 어떻든 빌립보 교인들의 선교연보는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교회의 모습이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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