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26) 아브람의 성화(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01

2. 아브람의 성별(창 13:5-18)

아브람은 애굽에서 뼈저린 실패와 그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크신 구원과 축복의 섭리를 나타내었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다(창 13:1-4).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창 12:10) 이제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3:1). 여기 남방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머물면서 단을 쌓고(창 12:7-8, 13:3),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다(13;4).
이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영적 출발, 영적 부흥, 영적 성화를 알려주는 중대한 기록이 된다. 그는 애굽적 공포와 불안의 정황에서 떠나 이제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순수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John Calvin). 그리고 그 예배는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인근의 가나안 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표징이 되었다(M. Luther).
다시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성화시키는 축복스러운 장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조카 롯과의 이별에서 볼 수 있다.

1) 아브람의 성별(聖別)은 다툼에서의 성별이다.
즉 화평주의의 추구이다. 창세기 13장 8절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하였다.
지금 아브람은 숙질 간에 큰 불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그 결과 쟁투가 일어날 징조를 보며 롯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저들이 소유한 재산의 풍부 때문이었다.
아브람은 창세기 12장 5절에서 보여주는 대로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본토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브람의 연약과 실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애굽 왕 바로에게 엄청난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섭리하심으로 그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고 하였다(창 13:2). 이때 아브람의 일행이었던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고, 종들이 따랐다고 하였다(창 13:5, 8).
저들이 받은 물질적 풍부는 숙질 간에 함께 거하고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많았다. 성경은 저들의 소유가 많아 동거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창 13:6). 그 결과 아브람과 조카 롯의 종들은 가축떼들을 먹일 초장(草場) 때문에 빈번히 다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유목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샘(물)과 목초는 재산 보호와 증식에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숙질의 종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 아브람은 예기되는 다툼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롯에게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화평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아브람의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 징표가 된다. 물질 때문에 다툼이 일어남은 사탄의 농락이 아닐 수 없다.

2) 유물주의(물질)에서의 성별이다.
창세기 13장 9절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였다.
이때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을 택했다(창 13:10). 롯의 눈에는 요단강의 수분을 받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쪽이 비옥해 보였다.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했다고 하였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는 도시였다. 그곳이 롯이 보기에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하였다. 비옥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애굽 땅」과 같았더라고 하였다. 이는 나일강의 혜택으로 늘 기름진 땅을 연상하고 하는 말이다(창 13:10).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이 조건이 롯의 욕구를 더할 나위없이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13장 11절에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고 하였다.
롯의 눈에는 세상만 보였다. 육만 보였다. 물질만 보였다. 그러나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고 하였다.
이러한 롯의 선택은 아브람보다 앞선 교만된 선택이었다. 육신의 눈에 의한 세속적이고 불신앙적 선택이었다. 욕망에 차버린 이기적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것을 아브람을 물질적 세속주의에서 성별시키는 성별의 수단으로 섭리하셨다.

3) 혈통주의에서의 성별이었다.
창세기 13장 8절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하였다.
골육끼리 물질 때문에 다투게 하지 말자고 한 것이다. 벌써 이런 경지에 살고 있는 아브람은 롯의 인간 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들의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다」(창 13:7)고 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였다. 저들은 아브람과 롯이 숙질 간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인인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 숙질 간의 불화는 ① 하나님 앞에서 불합당하고, ② 숙질 간의 윤리적 입장으로도 불합당하고, ③ 더욱이 불신자들 앞에서 불합당하고, ④ 또 저들을 따르는 많은 종들에게도 불합당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혈통’에서의 성별이었다. 아브람은 ‘혈통’이라는 이유 때문에 화평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 롯과 이별함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고 하였다. 육통 곧 혈통보다 영통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비나 어미나 자식을 나(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마 10:37).
예수를 영접하는 것, 곧 그 이름을 믿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요 1:12-13).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브람의 결단은 단연 혈통주의에서의 갈라짐이다. 떠남이다. 영의 승리이다. 육정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영통주의가 손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혈통 때문에 하나님 사랑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되리라고 하였다(마 10:34-36). 예수님은 영통주의와 혈통주의의 전쟁을 일으키려 왔다고까지 하였다.

4) 성별에 따라오는 축복의 약속들(창 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였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오셨다. 말하자면 분쟁을 예방한 후, 즉 재산을 나눈 후, 혈통적 유대관계가 끊어진 후, 롯이 낙원처럼 보이는 들판을 차지한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다. 롯에게는 없었던 장면이었다.
모든 것이 다 떠난 후에라도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은 사람에겐 축복이 있다. 아브람에게 과감한 자기 결단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왜 오셨는가? 아브람에게 축복을 약속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는가?
(1) 땅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다.
창세기 13장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다.
창세기 13장 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였다.
창세기 13장 17절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땅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이미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약속한바 있다(창 12:7). 이는 사실상 물질 축복에 대한 약속이다. 땅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제공한 생존의 노다지이다. ‘지구’라고 하는 땅 자체가 온갖 생존여건의 노다지이다. 무진장의 생존자원이 땅에 있지 않은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 지구를 살아갔던 수많은 아브람의 자손들이 받은 축복에서 웅변적으로 입증되고 있지 않은가? 물질축복의 머리는 아브람의 자손들의 것이었지 않았던가? 동서남북으로 약속된 물질 축복은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풍성한 선교자원이 되었다.
(2) 자손에 대한 축복이다.
창세기 13장 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였다.
창세기 15장 5절에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였다(창 22:17a). 창세기 22장 17절 하반절에는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는 아브람의 영적 자손, 곧 구원 얻을 자들의 무수한 수를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나오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말한다. 곧 14만 4천 인(계 7:4, 14:1)의 상징적 구원의 총수를 가리킨다.
(3) 제단(예배)의 축복이다.
창세기 13장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하였다.
‘헤브론의 제단’은 사실상 아브람이 하나님과 동맹하는 축복스런 밝은 장면을 가리킨다. 헤브론은 ‘친교’ 혹은 ‘동맹’을 뜻하는데, 유다 산지로서 히브리족장들의 무덤이 자리잡은 곳이었고 먼 훗날에 다윗의 왕도(王都)가 된 곳이기도 하다. 조카 롯이 요단의 기름진 들판과 동맹할 때, 아브람은 하나님과 동맹하였다. 그 동맹의 내용은 예배였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헤브론 산에 올라와 축복의 약속을 받았을 때, 그것을 믿는 신앙의 응답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즉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의 족적에 나타난 최고의 빛나는 축복이었다.

4) 결론적 교훈
(1) 성화(聖化)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람이 조카 롯과 이별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성별시키는 성화의 섭리적 수단이다. 그것은 아브람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또 하나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성도가 다툼에서 화평으로, 물질주의에서 영으로, 혈통주의에서 영통주의로 옮겨지는 상태는 성화적 삶이 된다. 그런 곳에서 갈라져야 한다. 떠나야 한다. 그러므로 조카 롯과 이별한 아브람의 처사는 더 높은 곳으로 아브람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성화의 한 과정이다.
(2) 물질적 풍요는 성화의 한 적은 수단이 될지언정 그것이 육신적 행복의 목적이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브람과 롯의 이별은 사실상 물질적 풍요에서 발단되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고 제의하였다.
이것은 아브람이 풍요한 물질에 자신의 처신 원리를 취하지 않고, 사실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결과로 나타난 제안이었다. 그것은 아브람이 금세중심의 삶보다 내세중심의 삶, 현실(오늘)중심의 삶보다 미래(내일)중심의 삶을 지향한 까닭이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무수히 나타난다. 아브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는 말은 바로 천국 곧 내세중심으로 움직이는 그의 삶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계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천국을 믿는다는 말이 된다. 또 천국 중심으로 산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금세중심이 아닌 내세중심이 아닌가?
아브람은 천국중심, 곧 내세중심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풍요로 말미암은 조카와의 다툼에서 저렇게 여유 있는 처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브람은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했다.
반대로 롯은 금세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었다. 그 결과 그는 ‘죄인들의 소굴’로 빠져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창 13:13). 나중에 가족과 재산을 통째로 빼앗김을 당했고(창 14:12),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심판을 받을 때 모든 것을 놓치고 겨우 몸만 빠져나오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창 19:22-29). 그는 그곳 소돔과 고모라에서 날마다 그의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하였다(벧후 2:8).
그렇다면 롯은 풍요한 물질을 행복의 목적으로 삼았고, 아브람은 그 풍요한 물질로 자신이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가까워지는 성화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주께 바치는 모든 물질들은 바로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더 큰 축복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성화의 한 수단인 것이다. 헌신과 봉사의 진보는 곧 성화의 수단이 되고, 그 성화는 축복과 정비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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