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25) 아브람의 성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00

II. 아브람의 성화(창 12:10-25:18)

‘한 생애’ 중에 인생은 여러 가지 경우에서 변화의 자극을 받게 된다. 자신에게 미친 질병이나 가정의 우환, 직장이나 사업상의 변화 때문이거나, 국가적인 사정이나, 천재지변이나, 세계적인 어떤 정황 때문에 인생은 자극을 받게 된다. 특히 성도들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성도가 성도되고, 점점 성화되는 변화,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굳건해진다.

1. 아브람의 연약과 구원(창 12:10-13:4)

아브람의 생애는 하나님 자신의 극적인 개입, 주권적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장래에 받을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히브리서 11장 8절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다.
가나안 땅으로 옮긴 아브람의 삶은 지극히 유동적이었다. 결코 이 세상은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나 정착지는 아니었다. 가나안 땅으로 옮겨온 아브람은 점점 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창 12:9). 여기 ‘남방’은 유다 네게브(Negeb) 지방, 지금의 브엘세바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브람의 연약과 실수를 보게 된다.

1) 환경에 연약한 아브람(창 12:10)
창세기 12장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옮겨 놓은 가나안 경내를 떠나 애굽에 우거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는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창세기 12장 10절에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라고 하였다. 여기 ‘우거하다’라는 말은 본래 ‘길옆으로 빗나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염려하다’(신 32:27), ‘두려워하다’(민 22:3)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염려와 두려움에 머물러 잘못된 길을 걷고 말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아닌 아브람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었다.
그 결과 애굽으로 내려가는 걸음을 걸었다. 내려갔다는 말은 지형적으로 애굽이 아래쪽이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상 이 말은 아브람의 영적 전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말이다.

2) 아브람의 불신앙적 처신(창 12:11-13)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그 아내 사래 때문에 또 걱정이 일어났다. 사래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자기는 죽임을 당하고 아내는 빼앗길 것이라는 위험을 예감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가서는 부부라 하지 말고 남매라고 하자고 합의했다. 그리하면 아브람 자신도 살고, 아내도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략을 꾸몄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 경이고, 사래는 그보다 열 살이 낮은 65세 경이었다. 사래가 127세가 죽었음을 생각할 때(창 23:1) 그때는 중년 초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 애굽인은 혈색이 갈색인 것에 비해, 히브리인은 백색이기 때문에 애굽인의 눈에는 이색적인 아름다움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본문에서 아브람의 불신앙을 보게 된다.
(1) 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했다(창 12:2-3). 아브람은 이러한 언약에 대한 불신앙을 일으켰다.
(2)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에 대한 불신앙이다.
그는 애굽적 성향을 직감했다. 예민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에는 둔했다.
(3) 더욱이 아내의 아름다움을 미끼로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기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내의 정조를 포기하기까지 하려 했다. 참으로 비겁하고 파렴치한 생존의 수단이었다.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 12:13)고 하였다. 이기적 불신앙의 처신이 보인다.
아브람의 이러한 연약은 창세기 20장에서도 나타난다.
창세기 20장에는 ① 장소가 애굽이 아닌 불레셋이고, ② 상대가 애굽왕 바로가 아닌 아비멜렉이며, ③ 남방으로 내려가게 된 동기는, 본문에는 기근 때문이고 20장의 경우는 유목생활의 이동 때문이었다. ④ 두 사건 다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아브람의 신변에 위험을 느껴서 생긴 일이다(창 12:12, 20:11). ⑤ 두 사건의 결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인한 보호와 구원이었다. ⑥ 본문의 경우는 사래가 65세 정도였을 때이고, 20장의 경우는 90세 정도였을 때였다. 사래가 언약의 아들 이삭을 약속받고 있을 때였다. 그가 127세에 죽었는데, 이때까지도 중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아브람의 연약에 따르는 하나님의 구원(창 12:14-20)
저들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 아브람의 예감대로 사래의 아름다움이 애굽 사람들을 놀라게 해 버렸다. 그 결과 바로의 대신들에 의해서 바로의 궁으로 취한바가 되었다.
아름다운 아내 덕분에 아브람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 등 후한 선물을 받았다(창 12:16). 이는 애굽 왕 바로가 사래를 취한 대가로 아브람에게 보낸 선물이다. 아브람의 예감은 적중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브람은 슬퍼했다거나 두려워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바로 왕의 후대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창 12:17)고 하였다. 그 재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으나, 속수무책이었던 아브람의 삶 속에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 왕은 그 아름다운 여인이 아브람의 누이동생이 아니라 아내임을 알게 되었다.
혹자는 사래 자신의 고백이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나, 그 정도로는 바로가 사래를 내어놓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환상이나 두려운 꿈 같은 계시 현상인지 모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바로는 아브람을 불렀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창 12:18-19)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는 신하들에게 사래의 출궁을 명하였다(창 12:20). ‘어찌하여’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중대한 본문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만난 위기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 왕을 ‘큰 재앙’으로 깨우쳐서, 그가 사래에게 우를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극적으로 그를 구원했다는 사실이다.
저들의 신분과 가정과 재산까지 보호를 받게 하고, 가나안의 기근이 끝날 때까지 거기 애굽에서 안보하셨다는 사실이다. 언약에 신실하시고 구원에 능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4) 결론적 교훈
(1) 인간의 연약성은 그리스도 밖에서나 안에서나 다 있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인도를 받고, 큰 축복을 약속받았던 사람인데도 가나안 땅의 흉년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땅의 환경에 연약해졌다는 사실이다. 가나안이라고 하는 환경, 애굽이라고 하는 환경에 연약해졌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도 인간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도 인간이다. 다만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인생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구원의 영역 안에 있는 인생이다.
칼빈은 이 사실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배(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같고, 불신자는 배 바깥, 곧 바다에 빠져 있는 인생과 같다. 배 안에 있는 사람도 넘어지고 쓰러진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 영역이 이미 배 안에서의 넘어짐이니 사망에 이르는 연약은 아니라는 의미의 말이다.
(2) 범사에 신앙으로 행하지 아니할 때는 불신자에게 부끄러운 책망을 받을 때가 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할 때, ① 지나치게 환경의 변화에 예민한 나머지 두려워하게 되고, ②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를 동원하게 될 때 결국 불신자(바로 왕)에게 질책을 받게 된다. 아브람은 바로의 질책 앞에서 유구무언이었다. 오늘 교회의 지도자들이 21세기라고 하는 새로운 1000년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다. 애굽성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다.
(3) 그리스도인의 기복적 인생 여로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아브람이 가나안에 기근이 있을 때 그곳을 떠나 ① 애굽으로 내려가고 ② 거기서 머물다가(창 12:10) ③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의 섭리가 있을 때는 다시 애굽에서 나와 유대 남방으로 올라가는 여로에서 볼 수 있다(창 13:1).
내려가는 때와 올라가는 때가 있는 삶의 기복을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에 성도는 성화를 향한 연단을 받게 된다.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갔던 늪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이 인도하신 땅으로 올라와서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다(창 13:4). 그곳은 그가 처음 단을 쌓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였다고 하였다(창 13:4, 12:6, 7-8).
(4)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본다.
아브람은 가나안과 애굽의 환경에 연약했다. 가사에 연약했다. 그리고 하나님 신앙에 연약했다. 세상처신에 비신앙적이고, 비신사적이고, 또 비겁했다. 아름다운 아내를 미끼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존의 수단을 취했다. 그러다가 불신자인 바로에게 질책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단연 아브람의 편이었다. 하나님은 연약하지 아니했다. 바로에게 큰 재앙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부족과 연약에 대하여는 일언반구의 말씀도 없으셨다. 다만 아브람과 사래와 그 재산과 종들을 바로에게서 능하신 손으로 구원하실 뿐이었다.
그 큰 이유는 하나님은 아브람을 선택하고 구원하신 믿음의 조상으로 약속(언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까지 따라서 연약해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연약이 하나님의 언약을 더 강하게 하고, 더 빛나게 하고, 더 유효하게 함이 아닌가?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오히려 강하다. 성장하는 어린아이가 질병 때문에 연약할 때 그 시간 부모는 아이를 향하여 더 강해진다. 사랑과 돌봄과 축복하는 마음이 더 강해진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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